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99화 (99/194)

00099  4-2 동행  =========================================================================

2장 동행 - 1

지긋지긋하게 긴 크림의 겨울 탓에 아직 우크라 산맥은 흰 눈에 덮여 있었다.

산맥에 도착해 어느 정도 길을 걸은 린덴과 엘리제는 깊은 동굴을 찾아 잠시 휴식을 취하러 들어갔다.

공화국군이 포위망을 완성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북쪽으로 넘어가야겠지만, 휴식을 취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더는 길을 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린덴의 상태 때문이었다.

“전하……?!”

“괜…… 찮다.”

린덴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했다.

엘리제가 화들짝 놀라 그의 몸을 만져 보니 마치 얼음장 같았다.

‘저체온증(Hypothermia)!’

이 정도면 34도보다도 낮아 보였다.

굉장히 낮은 체온으로, 오히려 고열보다도 더 안 좋은 상태다. 열마저 나지 못할 정도로 안 좋은 상황에 저체온증이 오기 때문이다.

‘이런 몸 상태로.’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힘든 티 하나 내지 않고 그녀를 이끌었다. 오로지 그녀를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전하…….’

엘리제의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와 재회한 이후 현기증이 날 듯 계속해서 마음이 어지러웠다.

‘전하는 왜 이렇게 바뀐 것일까?’

이전 삶에선 이러지 않았다.

그와 그녀는 부부, 즉 동반관계였지만 그건 말 그대로 형식적인 관계일 뿐이었다. 아니, 그녀의 마음은 안 그랬지만 그는 그랬다.

그의 눈은 항상 차가웠고,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어떤 감정도 그녀에게 주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이 바라는 염원만 강렬히 추구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괜찮다. 너는 괜찮은가? 눈 때문에 많이 추운데…….”

창백한 얼굴로 힘겹게 숨을 쉬면서도 자신을 걱정스레 쳐다보는 그.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바보 같다. 내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목숨을 버릴 각오로 나를 구하러 왔고, 저렇게 안 좋은 상태에서도 본인의 몸은 돌보지 않고 나를 걱정하고 있을까.

바보같이.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 왜 이렇게 그는 바보가 되었을까?

‘이러지 마세요. 전하.’

그녀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보지 못하도록.

‘저 힘들어요.’

뚜욱.

결국,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마음이 너무나 흔들렸다. 찢어질 듯한 흔들림이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아팠다.

너무나.

‘문제가 있으면 직시해.’

큰오라버니 렌의 말이 떠올랐다.

‘눈을 피하면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그래, 그의 말이 옳다.

자신은 더 이상 그의 마음을 외면할 수 없다. 어떻게든 답을 내야 한다. 알고 있다.

그런데 그때였다!

“쿨럭! 쿨럭!”

“전하!”

그 거친 기침에 그녀의 가슴이.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급히 그를 살피니 전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괜…… 찮다. 초상 능력의 반작용이야.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린덴은 눈을 크게 떠 그녀를 바라봤다. 처음이다. 그녀가 그에게 목소리를 높인 것은.

하지만 엘리제는 자신이 그에게 목소리를 높였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저 끝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엘리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렇게 몸이 안 좋은데, 신경 쓰지 말라니. 그냥 두면 낫는다고? 말이 되는 소리인가!

“빨리 치료를 해야겠습니다. 이대로는 어떻게 될지 몰라요.”

계속 가슴이 요동쳐 엘리제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침착해. 엘리제.

마음을 가라앉혀. 너는 의사야. 전하를 돌볼 사람은 지금 나밖에 없어.

그녀는 최대한 빠른 동작으로 그의 상태를 살폈다. 먼저 활력 징후를 확인했다.

‘족배 동맥에서도 맥박이 확인돼. 정확한 혈압은 모르지만, 맥의 강도를 보면 다행히 쇼크 상태는 아니야.’

문제는 맥박수와 체온, 그리고 내장 출혈이었다.

‘맥박은 분당 140회, 체온도 34도 이하의 저체온증이야. 내장 출혈은 다행히 처음 이후로 재발은 하지 않고 있지만. 왜 이렇게 맥박이 빠르고 체온이 낮은 거지? 특별히 감염증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린덴은 초상 능력의 반작용이라고 했다.

그녀는 저체온증의 기전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떠올렸다.

‘저체온증은 물에 빠지거나 하지 않는 한, 보통 심각한 염증 프로세스의 결과로 나타나는데. 그러면 그의 초상 능력이 몸속의 사이토카인을 자극하는 걸까? 사이토카인 스톰처럼?’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초상 능력은 아직 과학이 닿지 않는 미지의 영역이니까.

어쨌든 그녀는 이 순간 해야 할 조처를 결정했다.

‘일단 염증 작용을 가라앉히고, 몸을 최대한 따뜻하게 해야 해.’

염증 작용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하나. 항염증약을 복용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그들에게는 항염증약이 있었다. 린덴이 무겁게 들고 온 가방에 약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약은 어째서?”

“네가…… 혹시 아프면 먹이려고 챙겨왔다. 네가…… 몸이 자주 아프니까.”

린덴의 짧은 답에 엘리제는 다시 가슴이 울렁거렸다. 진짜 바보 같은 남자다.

일단 그녀는 그에게 항염증약을 복용시켰다.

낮은 체온에 목이 마르는지, 그는 간신히 약을 삼키며 말했다.

“고맙다.”

“…….”

그는 입꼬리를 힘겹게 들어 올렸다.

“그래도 나쁘진 않군. 그대가 이렇게 나를 걱정해 주는 게. 지금 이 상황이 꿈인가 여겨질 정도야.”

“전하…….”

“꿈이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데…….”

“그런 이야기는 몸이 다 낫고 하십시오.”

“그래, 걱정하지 마라. 금방 좋아져 그대를 지킬 테니.”

그의 목소리가 차차 잦아들었다.

지금까지 지나치게 무리한 탓에 잠이 들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자고 일어나마.”

그러고 그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엘리제는 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최대한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해.’

저체온증인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굴의 기온도 추웠다.

아무리 항염증약을 먹었다지만, 이대로 잠이 들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어떻게든 체온을 높여야 했다.

그녀는 일단 자신이 치마 위 겉에 두르고 있는 외피를 벗어 그에게 덮어주었다.

그리고 그가 들고 온 짐에서 보온이 될 만한 모포를 찾았다.

이렇게 우크라 산맥을 탈 걸 미리 계산한 것인지, 그는 모포마저 가져온 것이다. 그녀가 춥지 않도록.

그녀는 그 모포도 그에게 둘러주었다.

‘안 돼. 이걸로는 모자라.’

그녀는 고민했다.

어떻게 그를 더 따뜻하게 하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를 조금 더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순간 멈칫했다. 아무 생각 없이 시행하기에는 주저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난 의사니까. 이건 치료야. 환자를 치료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

그녀는 그렇게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엘리제는 그에게 다가가 두 팔로 그를 감싸 안았다.

“……!”

그의 몸이 순간 흠칫 떨렸으나, 곧 잠잠해졌다.

다행히 잠에서 깨지는 않은 것 같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가 깨서 자신의 얼굴을 보면, 붉어진 얼굴을 고스란히 들켰을 테니까.

‘전하…… 린덴…….’

엘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몸이 그녀의 온몸으로 느껴졌다.

어째서일까? 그의 몸은 차가운데, 그의 몸과 맞닿은 그녀의 얼굴과 몸은 뜨겁게 빨개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품 안에 닿은 그를 느끼니 주책맞게 가슴이 뛰었다.

이전 삶이 떠올랐다.

파국으로 끝났지만, 그녀는 그를 바랐다. 자신은 그의 품에 있기를 원했고, 그가 자신의 품에 있기를 바랐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전하…… 제발 좋아지세요. 주여, 도와주세요.’

그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를 더욱 끌어안았다. 이렇게 자고 일어나면 그가 다시 완전히 좋아져 평소의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의 가슴에 닿은 그녀의 손에 한 가지 금속 물질이 와 닿았다.

‘이건? 뭐지?’

십자가 목걸이였다. 끝 부분이 오돌토돌한 것이 진주 장식이라도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전하께서 왜 십자가 목걸이를?’

그녀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그가 십자가 목걸이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신을 믿기는 했지만, 좋아하진 않았으니까. 마음속 깊이 한 가지 강렬한 염원(念願)을 가지고 있는 그는 용서를 강조하는 십자가의 기치를 싫어했다.

그런데 그 순간,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

‘설마……?’

엘리제의 손끝이 떨렸다.

진주 장식 십자가 목걸이. 그녀의 어머니, 테레사의 유품이 바로 저것과 같은 진주 장식 십자가 목걸이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 전쟁에 참여하기 전, 한 남자에게 그 유품을 징표로 준 적이 있다.

바로 ‘론’에게.

‘아니, 아닐 거야. 그냥 비슷한 종류일 거야. 진주 십자가 목걸이가 어머니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지금까지 이상했던 점들이 무수히 떠올랐다.

단순히 닮았다기엔 너무나 똑같았던 론과 린덴의 모습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히 그의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그의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

<주여, 당신의 가호가 임하소서.>

그 문구를 읽은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자신이 론에게 준 그 목걸이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것이지? 왜 론 님에게 준 목걸이를 전하가?’

무수히 많은 생각이 점멸했다.

하지만 당연히 답은 하나였다.

론이 린덴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전하가? 왜 론 님으로 나에게 접근했던 것이지?’

그녀는 혼란에 빠졌다.

그와의 여러 만남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살려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첫 만남은 테레사병원에서 황실 시종의 총상 수술 때문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그와 만났었다.

하지만 그 뒤부터는.

‘그냥 보러 왔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자신을 보러 왔다.

갑상선의 병도 황실십자병원에서 치료받으면 되는데, 굳이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꼭 자신에게 진료를 받았다.

그리고.

‘먹을 거라도 사주마. 아니, 딸기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했나? 아니면 망고 푸딩? 바나나 타르트? 원하는 음식은 뭐든지 사줄 테니 따라와.’

디저트는 손도 안 대면서, 늘 자신을 위해 맛있는 디저트 카페에 갔으며.

뮤지컬이라곤 관심도 없으면서.

‘너와 같이 보고 싶다.’

늘 자신과 함께했다.

왜 그랬을까? 왜 전하는 그런 바보 같은 일을 했을까?

당연히 이유는 간단했다.

그때부터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론’이란 인물로 자신을 속였던 것일까?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추측이 떠올랐다.

‘설마 내가…… 전하를 싫어해서?’

확신과 비슷한 추측이었다.

그 이유가 아니라면, 황태자가 굳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다가올 필요가 전혀 없었다.

‘전하…….’

엘리제의 마음이 찌잉 울렸다.

그녀는 그를 싫어했다. 과거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서 계속해서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론’이란 인물로 정체를 숨기고 다가온 것이다.

그것도 수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전하…… 왜 그렇게 하셨어요.’

그런 생각들을 하니 알 수 없이 가슴이 울컥했다.

론도에서 ‘론’과 보냈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무뚝뚝하고, 위트 넘치는 재미는 없었지만 행복한 순간순간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도 그와의 만남을 기다렸다.

병원에서 일하다가도, 오늘은 그가 오지 않을까,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하…….’

그녀는 다시 중얼거렸다.

‘언제부터 제 옆에 있었던 것인가요. 언제부터 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가요.’

그리고 떠오르는 마음.

‘저는 언제부터 전하께 마음이 흔들렸던 것인가요.’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제는 다시 그의 품 안에 ‘징표’를 넣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전하, 론 님으로 저 속인 것 넘어가 드릴 테니.’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때 약속했던 것처럼 나중에 이 ‘징표’ 저에게 돌려주세요. 지금 아픈 것 다 낫고, 무사히 론도로 돌아가서요.’

-주여, 당신의 가호가 임하소서.

그녀는 징표에 써진 문구를 중얼거렸다.

그 축복이 그에게 임하기를.

============================ 작품 후기 ============================

내일 13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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