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0 4-2 동행 =========================================================================
2장 동행 - 2
그 시각, 제국군의 사령부 프라바.
한 무리의 젊은 장교들이 총사령관실에 몰려들어 강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각하! 출정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대로는 참을 수 없습니다!”
나이 지긋한 노장군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참게. 조금만 기다리면 우리 군의 승리야.”
하지만 젊은 장교들은 오히려 언성을 높였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하극상이라 처벌받아도 할 말 없는 목소리 높이였다.
“승리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등불을 든 여인이 적의 손아귀 안에 있단 말입니다!”
“아니, 지금 예비 황태자비께서는 심페폴에서 탈출해 우크라 산맥에…….”
“그러니까 지금 당장 달려가 구해야 합니다!”
노장군, 임시 총사령관 맥가일 원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게 몇 번째 시달림인지 모르겠다.
일반 병사, 초급 장교, 중급 장교, 고급 장교, 심지어 장군들까지!
당장 심페폴과 우크라 산맥으로 달려가자고 얼마나 그를 들들 볶던지.
심지어 지금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는 젊은이들은 귀족파의 영식들이었다.
바로 클로랜스 가문과 대치점에 있는.
‘등불을 든 여인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상관없는 저희 모두의 레이디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며 지금 당장 등불을 든 여인을 구하러 가야 한다고 외쳤다.
“이 사람들아. 다 이긴 전쟁이야. 그렇게 막무가내로 움직이면 어떤 피해를 입을지 몰라. 그리고 개인을 구하기 위해 군을 움직일 수는 없어.”
고래로 한 개인을 위해 군 전체를 움직인 사례는 없다.
심지어 동방의 청에서는 하늘의 아들이라 부르며 떠받드는 천자(天子), 황제가 북쪽 오랑캐에게 사로잡히는 일이 일어났는데, 그때 청나라 사람들의 선택은 천자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황제를 뽑는 것이었다.
하늘의 아들이라는 천자도 이럴진대, 아무리 예비 황태자비라도 일개 여인을 위해 군을 움직일 수는 없다.
더구나 다 이기고 있는 전쟁 아닌가?
지금의 압도적인 전황과 더불어 황태자 린덴이 뒤에서 꾸민 전략이 곧 시행되면 승전이 굳혀질 것이다.
‘하지만…….’
맥가일은 씁쓸히 생각했다.
‘이 나도 당장 뛰쳐나가고 싶으니 문제지.’
알고 있다.
절대 군을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임시 총사령관인 자신마저 우크라 산맥으로 총진격을 외치고 싶은데, 다른 이들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황태자 전하의 지시가 아니었다면 당장 움직였을 텐데.’
린덴은 엘리제를 구하러 떠나기 전, 단호히 명령했다.
그녀는 자신이 구할 테니 맥가일은 절대로 군을 움직이지 말라고.
이제 한 달, 아니, 빠르면 보름.
그 정도의 시간이면 린덴의 전략이 완성된다. 황태자는 그걸 망치지 않기 위해 단호히 명령한 것이다.
‘하아, 힘들군.’
그렇게 젊은 장교들이 물러가고 맥가일 원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린덴의 빈자리를 채우랴, 저런 호소들을 들으랴,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총사령관저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병사가 급박히 뛰어들어왔다.
“각하, 큰일 났습니다!”
“……?!”
맥가일 원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큰일? 무슨?!
병사가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3황자 전하께서!”
“……?!”
“영창에서 탈옥하셨습니다!”
깜짝 놀란 맥가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이냐?! 분명 2중, 3중으로 잘 감시하라고 했을 텐데?”
황태자인 린덴이 적 진영에 홀로 들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3황자는 제국군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
린덴이 그를 영창에 가두라고 명령한 것은 단순히 악감정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이유가 있어서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3황자의 성격상, 가만히 두었다가는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까.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는데…….”
“있었는데?”
“초상 능력으로 철창을 모두 잘라버리고, 하늘을 솟아올라 사라졌습니다. 이 종이를 던지시면서요.”
그러며 병사는 엉거주춤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종이에 써진 글씨를 읽은 맥가일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사표>
검기사단 단장직.
-중장 미하일 드 로마노프.
아아……! 도대체 이놈의 황자들은!
맥가일은 좌절한 마음으로 물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셨느냐? 그건 파악했겠지?”
“남서쪽, 우크라 산맥을 향해 가신다 하셨습니다.”
그러며 병사는 주저주저하다가 조심히 말했다.
“바보 형과 예쁜 레이디를 구해오겠다고. 혼자 갈 테니 따라오지 말라고…….”
“…….”
그 말을 들은 맥가일은 하얀 머리를 쥐어뜯었다.
울고 싶었다.
***
엘리제의 기도 때문일까, 아니면 약이 잘 들은 것일까, 다음 날 정신을 차린 린덴의 몸은 한결 좋아진 상태였다.
“몸 상태는 어떠십니까, 전하?”
“많이 괜찮아진 것 같다.”
린덴은 신기한 눈으로 자신의 몸을 살폈다.
원래 초상 능력의 반작용이 오면, 며칠은 고생하는데 이번엔 하루 만에 말끔히 좋아졌다. 체온도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녀 덕인가.’
린덴은 왠지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엘리제를 바라봤다.
“다 좋아진 것 같아. 네 덕분인 것 같다. 내가 자는 사이, 무슨 처치를 한 거지?”
그 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트, 특별히 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
“네, ……네!”
린덴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렇게 당황하지?
그는 워낙 깊은 잠에 빠져 있어서, 그녀가 밤새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단 것을 알지 못했다.
“어, 어쨌든 다행히 좋아진 것 같지만, 이상 증상이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워낙 염증 반응이 심했던 것 같아 뒤늦게 이상 증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린덴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의사로서 으레 하는 이야기겠지만,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았다.
“좋군.”
“네?”
“엘리제, 너에게 걱정의 말을 들으니 말이야. 몇 번이고 아파도 좋겠어.”
그래서 너의 걱정을 조금 더 들을 수 있다면.
그러면 몇 번이고 아프고 괴로워도 좋을 텐데.
린덴은 그런 마음으로 말했다.
“……!”
그 말뜻을 알아들은 엘리제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 그러지 마십시오.”
“뭐가?”
“그, 그러니까…….”
엘리제는 말을 더듬었다. 뭔가 할 말이 많은 것 같은데, 머릿속에서 하나도 정리가 안 됐다.
“……?”
황태자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엘리제는 필사적으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일단 이 당황에서 벗어나 할 말은 해야 한다.
그녀는 숨을 내쉬며 굳은 마음으로 말했다.
“다시는 그러시면 안 됩니다.”
“무얼 말하는 거지?”
“저 구하러 온 것 말입니다.”
“……!”
엘리제는 일부러, 최대한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는 이 제국의 황제가 되셔야 하는 존귀한 몸이십니다. 고작 저 같은 일개 여인을 위해 이런 위험을 자초하시다니요.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습니다. 잊으시면 안 됩니다. 황제가 될 전하의 몸은 이 제국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것을.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을 반복하지 마십시오.”
물론 안다.
황태자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구하러 왔는지.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심지어 목숨까지 버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다른 이는 몰라도, 황태자인 그만큼은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때, 린덴이 말했다. 그녀의 말에 심기가 상한 듯 비틀린 목소리였다.
“웃기지 마.”
“……!”
린덴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황제? 고작 그 자리 따위가 뭐라고?”
“저, 전하!”
“물론 황제 자리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하지만!”
황태자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 황제가 되는 것은 중요하다. ‘그날’ 이후 그가 살아가는 이유가 된 하나의 염원,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자리니까.
하지만.
“너보다 중요하진 않아.”
“……!”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에겐 황제도, 이 브리티아 제국도, 나의 이 생명도! 너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으르렁거리듯 내뱉는 그의 말에 그녀의 심장이 다시 파르르 진동했다.
‘아아…… 전하.’
엘리제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도저히 그를 마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저 타오르는 시선을, 저 갈망을 감히 마주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의 차가운 손이 그녀의 턱을 잡았다. 그러고 거칠게 자신을 바라보도록 하였다.
“나를 봐, 엘리제.”
“……?!”
“나를 보라고.”
엘리제의 눈망울이 크게 흔들렸다. 항상 차갑기만 한 그의 금안은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알아. 하지만.”
그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하였다.
“난 너를 놓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내 것으로 만들 테니.”
이미 넌 내 심장이 되었으니까.
밀어내려 해도 소용없어.
“그러니 도망갈 생각하지 마.”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제의 마음이 내려앉았다.
가슴이 떨려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
그 후, 린덴과 엘리제는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이동했다.
그녀를 구하러 오기 전 짧은 시간, 린덴은 많은 준비를 하였다.
애초에 우크라 산맥을 탈 생각을 하고, 휴대용 비상식량과 보온이 되는 옷, 그리고 자세한 지도와 나침반 등을 챙겨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다행히 며칠간은 공화국군을 피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대로 쭈욱 가면, 아무런 문제 없이 제국군 진영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엘리제.”
린덴은 앞서 걷고 있는 엘리제를 불렀다.
하지만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
“엘리제?”
“네, 네? 전하?”
그녀가 빨개진 얼굴로 답하자 린덴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을 하지? 계속 말도 없이.”
“아, 아닙니다.”
엘리제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뭐가 불편한가?”
“아, 아니요.”
그녀는 화들짝 말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전하 때문이잖아요.’
‘난 너를 놓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내 것으로 만들 테니. 그러니 도망갈 생각하지 마’라니.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 어떻게 하지?’
자신의 턱을 잡고 타오르듯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계속해서 심장이 뛰었다. 마치 심장이 고장 나 부정맥이라도 온 것처럼.
도저히 그를 마주 볼 수가 없어, 계속 시선을 피하고 있다.
“엘리제.”
“…….”
“엘리제!”
계속되는 외면에 그는 결국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
손목에 느껴지는 뜨거운 감각에 엘리제는 철렁 놀랐다. 그저 손을 잡은 건데 왜 이렇게 심장이 떨리는 것이지?
“도대체 뭐하는 거지? 나한테 불만이 있나?”
다시 타오르는 듯한 금색 눈동자.
엘리제는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어, 없어요. 불만.”
“거짓말하지 마.”
그는 그녀가 자신의 눈을 피하자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탁.
다시 그녀의 얼굴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내가 말했지?”
“……!”
“도망쳐도 소용없으니 날 보라고. 외면할 생각하지 말라고.”
두근. 두근.
엘리제의 귀에 심장의 고동이 들렸다.
너무 떨렸다. 그의 타오르는 눈동자를 보는 것이, 그의 뜨거운 손에 닿은 감촉을 느끼는 것이, 그의 감정을 마주하는 것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져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타악.
하필 뒤에 있던 나무에 그녀의 몸이 막혔다.
푸스스.
가지 위에 걸려 있던 눈이 그들에게 떨어졌고,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
둘은 그렇게 잠시 서로를 말없이 바라봤다.
두근. 두근.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엘리제의 가슴이 끝없이 뛰었다.
이러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그는 놔주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맹수에게 잡힌 초식 동물이 되었다. 도망치려 했으나, 맹수는 놔주지 않았다.
‘아아…… 전하.’
그런데 묘한 일이었다.
이 강압적인 상황이 싫지가 않았다. 오히려 느껴지는 감정은 강렬한 속박에 따른 떨림이었다.
싫지 않다. 오히려 그가 더 자신을 몰아붙여 주었으면 좋겠다.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한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놔, 놔줘요.”
그러나 그는 입술을 비틀었다.
“싫어.”
“제, 제발…… 부탁…… 이에요.”
그녀는 빌듯 말했다.
이렇게 더 그에게 잡혀 있으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그의 얼굴이 굳었다.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