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1 4-2 동행 =========================================================================
2장 동행 - 3
“전…… 하?”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그가 한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만졌다.
“……?!”
“언제부터 이런 것이지?”
“네?”
그녀는 무슨 말인지 몰라 반문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열이 났느냔 말이야.”
“아…….”
그 말에 그녀는 자신의 체온을 체크했다.
뜨거웠다. 정확한 온도는 모르지만, 최소 38.5도는 넘을 것 같았다.
그녀는 급히 그의 손에서 벗어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쩌다 고열이…….’
아마 강행군과 눈 덮인 우크라 산맥의 추운 날씨 탓에 감기가 온 것 같았다.
린덴은 여린 그녀를 배려 못 한 자신을 탓했다.
“안 되겠군. 쉬어야겠다.”
“괜찮습니다!”
엘리제는 화들짝 답했다.
그러며 그녀는 정말 괜찮다는 듯 짐짓 강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냥 감기입니다. 정말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더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린덴은 눈썹을 찌푸렸다. 발끝이 희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마음에 안 들어. 정말.’
힘들면 그냥 힘들다고 하면 안 되는가? 저 작고 여린 소녀는 왜 이렇게 항상 강한 척하는지 모르겠다.
‘정말 마음에 안 들어.’
고작 감기이지만 그녀의 몸에서 열이 나니 자신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왜 저렇게 몸은 약해 가지고.
린덴은 앞장서 가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갑자기 닿은 그의 감촉에 엘리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하?”
“따라와.”
“네?”
“쉬어야겠다. 명령이니 따라와.”
***
그가 그녀를 데려간 곳은 오다가 발견한 한 동굴이었다.
그들에겐 천만다행으로 우크라 산맥엔 몸을 녹일 만한 작은 굴이 많이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 간다.”
“하, 하지만…… 괜찮습니다.”
“어차피 시간이 늦었어.”
린덴은 밖을 바라봤다.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괜히 밤사이 강행군을 하다 다치거나 그녀의 몸이 악화하면 그게 더 큰일이다.
“어차피 근처에 공화국군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 내일은 다시 강행군으로 이동해야 하니, 오늘은 푹 쉬어.”
“네…….”
어쩔 수 없이 엘리제는 자리에 앉았다.
사실 티를 안 내고 있었지만, 몸이 많이 지친 상태긴 했다.
자신 때문에 걸음이 늦어져 그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 내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따뜻한 곳에 들어오니, 열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머리도 아파오고, 전신이 무거웠다.
‘빨리 나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때 린덴이 말했다.
“잠깐 엘리제.”
“네?”
“일어나 봐.”
그가 다가오더니 그녀가 앉을 자리에 자신의 외피를 깔아주었다.
그러고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바닥이 차다.”
“저, 전하…… 괜찮습니다.”
“난 안 추워. 명령이니 편하게 앉아.”
그뿐이 아니었다.
엘리제가 자리에 앉자, 배낭을 뒤지더니, 모포를 꺼내 그녀의 몸에 둘러주었다.
“쉬어라.”
그가 들고 온 커다란 배낭엔 별의별 물건이 다 들어 있었다.
따뜻한 외피, 모포, 마른 식량, 비상약 등. 대부분 약한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챙겨온 것이다.
‘하아, 전하…….’
그런 그의 마음에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 삶이 떠올랐다.
이전에 그는 이렇지 않았다.
‘도망쳐도 소용없어. 날 봐.’
저렇게 뜨겁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처럼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없이 차가웠을 뿐이다. 한없이 차가워 파국에 이르렀고, 결국 자신은 망가져 단두대의 칼날을 받았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난 어떻게 해야지?’
‘눈을 돌리지 마. 직시해.’
큰오라버니의 말.
그리고 그의 말.
‘날 바라봐.’
그래, 이렇게 도피해서는 안 된다.
그는 달라졌다. 그러니 과거를 핑계 삼아 그를 피하면 안 된다. 그를 마주 바라봐야 한다. 답을 내야 한다.
‘하아, 하지만…….’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어두워진 얼굴을 린덴이 가만히 보더니 말했다.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보군. 괜찮나?”
“아…… 괜찮습니다.”
엘리제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저 소녀는 약한 모습을 안 보이는 것이지? 고열이 오르는데, 약한 티도 안 내는 모습을 보니 그의 가슴이 더 아프고 끓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괜찮긴. 그렇게 얼굴이 안 좋으면서. 하긴 이렇게 추운데 몸이 좋을 턱이 없겠지. 잠시만 가만히 있어봐라.”
그러더니 그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서 앉았다.
그리고.
“……전하?!”
“가만히 있어.”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다 안았다.
갑자기 그의 몸이 느껴지며, 그녀의 가슴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특별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주려는 것이니, 불편해도 참아.”
물론 그건 거짓말이다. 특별한 마음은 많았다. 다만 추운 그녀를 따뜻하게 해주려는 의도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
“난 신경 쓰지 말고, 눈이라도 붙여라.”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탄탄한 가슴이, 차갑지만 뜨거운 체온이,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나 바보 같아.’
그녀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그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불편하지 않았다. 싫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따뜻했다. 무거운 마음과 별개로 아늑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알고 있어.’
그는 자신을 좋아한다. 이전 삶과 달랐다.
그리고 자신도 그가 좋았다. 이전 삶처럼,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도 더.
그건 그녀가 아무리 고개를 저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미 자신은 그에게 빠져들었다.
하지만.
‘난 정말 바보야. 겁쟁이야.’
이전 삶의 기억이 자꾸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파국을 맞았던 과거가, 단두대의 칼날이 트라우마처럼 마음이 열리는 것을 가로막았다.
-직시해야 해.
알고 있다.
그리고 두 번의 삶을 통해 또 알고 있는 사실.
-계속 눈을 돌리다가는 후회할 수도 있어.
그래, 알고 있다. 이렇게 계속 눈을 돌리다가는 후회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 안다고. 난 바보야. 겁쟁이야. 정말로.’
엘리제는 괴로운 한숨을 내쉬었다.
린덴은 그녀가 몸이 아파 그런 것인지 알고, 조금 더 부드럽고 강하게 엘리제의 몸을 안아주었다.
그 강인하고 부드러운 손길에 엘리제는 눈을 감았다.
따뜻했다.
그러고 그녀가 잠에 빠진 후.
황태자는 자신의 품에 안긴, 엘리제를 내려다보았다.
‘엘리제.’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움찔. 그녀의 몸이 잠시 흔들렸으나 더 움직이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프지 마라.”
그는 나직이 말했다.
“네가 아프면 내가 더 훨씬 아프니까.”
***
다음 날에도 엘리제는 아팠다. 열이 조금 더 올랐다.
아무래도 하루 정도 더 쉬어야 좋아질 것 같지만, 엘리제는 괜찮은 척 말했다.
“다 나았습니다.”
물론 속을 린덴이 아니었다.
“거짓말하지 마.”
“정말 좋아졌습니다. 보세요.”
그녀는 힘껏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금세 다시 풀썩 넘어졌다.
린덴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
또다시 그의 품에 갇힌 엘리제는 화악 얼굴이 붉어져 말했다.
“저, 전하? 왜…… 또?”
“이렇게 몸이 뜨거운데 괜찮다고? 거짓말하는 나쁜 버릇은 누구한테 배웠지?”
“저…… 정말 괜찮습니다.”
계속 부정하는 그녀를 보며 린덴은 입술을 비틀었다.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였다.
그런 충동적인 행동을 한 것은.
린덴은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감싸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의 이마가 그녀의 이마에 와 닿았다.
“……!”
그의 얼굴이 바로 앞에서 느껴지자 엘리제는 뻣뻣이 굳었다. 온몸이 전기에 맞은 것 같았다.
본인이 행동하고도 린덴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바로 코앞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얼굴에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이 그녀의 붉은 입술을 훑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바로 앞에서 보이는 그 붉은 입술을 마주하니, 갑자기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가지고 싶다.
저 입술을 범해,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를 느끼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전하…….”
“……!”
그 말에 린덴은 화들짝 놀라 그녀의 이마에서 얼굴을 뗐다. 그러며 헛기침하며 말했다.
“어쨌든 이마가 이렇게 계속 뜨겁지 않으냐?”
“아? ……네, 네.”
그녀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뭐라고 물어봤는지, 하나도 안 들렸다.
“오늘은 여기서 하루 더 쉬도록 하겠다.”
“하지만…….”
“괜찮아. 어차피 적들이 없는 루트를 파악해 이동했으니. 지금쯤 공화국놈들은 완전히 반대 방향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우크라 산맥은 넓다.
그 넓은 산맥에서 2명을 찾는 것은 백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동 루트를 파악해 움직이지 않으면 절대 못 찾지.’
모략의 달인인 사막의 전갈이라면 모를까, 고지식한 위고 중장이 지휘하는 한, 공화국군이 그들을 찾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애초에 지리를 파악한 린덴이 적들의 허를 찌르는 방향으로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루 정도 더 쉬어도 돼. 너는 빨리 낫기나 해라.”
“……네, 전하.”
어쩔 수 없이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까 전 자신의 이마에 닿은 그의 느낌이 너무 선명해, 똑바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동굴에서 하루 더 쉬기로 하였다.
“좀 쉬고 있어라. 난 잠시 근처를 둘러보고 오겠다.”
“네, 전하.”
그가 동굴을 나가자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 어떻게 해…….’
그와 함께하는 한순간, 한순간 가슴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끝없이 밀고 들어오는 그에게 도저히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하아.’
곧 그가 돌아왔다.
“근처에 공화국군은 없는 듯하다. 안심하고 쉬어라.”
“……네.”
그렇게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하며 린덴은 엘리제를 간호했다.
그녀가 춥지 않도록 모포를 둘러주고, 때에 맞게 약을 챙겨주며, 심지어 비상식량을 이용해 죽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밖으로 나가 공화국군이 근처에 오는지도 확인했다.
분명 자신도 힘들 텐데 그런 내색은 일절 없었다.
오로지 그녀만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그의 정성 어린 간호에 그녀는 가슴이 뭉클했다.
‘전하.’
따뜻했다.
몸도 따뜻했지만, 마음이 더 따뜻해졌다.
지구에서 그녀는 고아였다.
몸이 아파도 아무도 그녀를 간호해 주지 않았다. 그저 혼자서 끙끙거렸을 뿐이다.
그런 기억 때문일까?
이런 그의 정성 어린 간호에 더욱 마음이 울렁거렸다. 또다시 알 수 없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그녀는 무릎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난 정말 바보야. 정말. 정말로.’
이전 삶, 경험했던 단두대의 칼날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하는 자신은 바보였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순간이 좋았다.
너무나.
***
한편 비잔티움 인근의 흑해로 접어드는 해안.
프랑소엔 공화국의 해군 함장 샤를은 조타실에서 부관에게 물었다.
“크림반도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한 5일 정도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안개가 짙군. 암초가 있는 지역은 아니지만 조심해야겠어.”
“네, 함장님.”
10여 척에 이르는 공화국 함대가 크림반도를 향해 안개가 낀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보급품과 지원군 조달을 위한 함대였다.
“전황이 많이 안 좋다던데.”
“네, 그렇다고 합니다.”
“큰일이야.”
샤를은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애초에 무리해서 일으킨 전쟁이다.
아무리 흑해의 재해권을 얻기 위해서라지만, 40만의 장병을 동원하다니. 공화국이 휘청할 규모의 파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무리했는데, 전쟁에서 패전한다? 그 후폭풍이 얼마나 심할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시몬 니콜라스가 30년간 공화국을 지배했다지만, 어쩌면 이 패전으로 권력을 내려놓아야 할지도 몰랐다.
‘패전을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균형이라도 맞춰야 해. 압도적으로 패해 버리면 강화 회담을 할 때 조건을 감당할 수가 없어.’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제국의 총사령관인 황태자와 예비 황태자비가 아군의 세력권에 갇혀 탈주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패전을 피할 수 없다면 이들이라도 반드시 잡아야 했다.
“저, 함장님!”
“응?”
“전방에 식별 불가한 함정들이 나타났습니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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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14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