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2 4-2 동행 =========================================================================
2장 동행 - 4
샤를은 놀라 망원경을 들었다.
정말 안개 너머로 흐릿한 그림자들이 보였다.
“뭐지?”
정확히 보이지 않지만,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배들의 크기도 최소 장갑함이나 전열함으로 보였다.
‘설마?’
샤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전 세계에서 저런 규모의 함대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딱 두 국가뿐이다.
바로 자신들, 프랑소엔 공화국과 브리티아 제국!
그리고 이 근방엔 자신들 말고 공화국의 함대가 없었다.
그 말은……?!
“로마노프 황실기, 로열 네이비(Royal Nayv)입니다! 비상! 제국 함대입니다!”
조타수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이제 샤를 제독의 눈에도 보였다. 적들 배에 꽂혀 있는 장엄한 로마노프 황가의 깃발이!
‘아니, 저 표식은 제국 3함대의 깃발? 왜 동방 힌디에 있어야 하는 3함대가 흑해에?!’
샤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브리티아 제국의 3함대는 동방의 힌디 근방에 주둔하고 있는 함대로 어마어마한 화력을 자랑했다.
‘어째서? 내가 지금 잘못 보고 있는 건가?’
하지만 이 순간 그의 이런 의문은 무의미했다.
“적 함대 다가옵니다! 함장님,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샤를은 화들짝 명령을 내렸다.
“포문을 열어라! 접근을 허용하면 안 돼!”
그러나 제국의 해군, 로열 네이비는 그야말로 세계 최강이다.
공화국도 강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지만, 제국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
바다에서 로열 네이비를 당해낼 수 있는 함대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적 함대 U자 형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막아! 포를 쏴! 당장!”
공화국의 함대가 다급히 불을 뿜었다.
하지만 제국의 철갑 함대는 유유히 그 공격을 무시하고 공화국의 함대를 에워쌌다. 마치 그림을 그리는 듯한 우아한 조타술이었다.
그리고 열리는 제국 함대의 포문.
끼잉. 철컥. 철컥.
“안 돼!”
샤를은 비명을 질렀다.
콰앙!
하늘을 울리는 대포 소리와 함께, 공화국의 함대가 바다로 가라앉았다.
***
제국의 3함대의 사령관 루이스 후작은 망원경으로 최후를 맞은 공화국의 함대를 바라보았다.
“아군의 피해는?”
“퀀트 호와 마젤랑 호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현재 수리 중입니다.”
“그래.”
루이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 전하의 명은 숙지하고 있지?”
“네, 제독.”
제국 3함대의 부사령관 랑트 백작은 고개를 숙였다.
“기함인 전열함 퀸(Queen) 호를 비롯한 1진은 이곳에서 대기하며 공화국의 배를 오는 족족 격파한다. 크림반도의 공화국군의 총알과 밀이 한 톨도 남지 않을 때까지 보급을 완전히 끊을 것이다.”
루이스 백작은 황태자 린덴이 내린 두 번째 명을 전달했다.
“그리고 자네의 2진은 굴카족 용병들과 함께 크림반도의 남쪽에 상륙한다.”
굴카족.
힌디 북쪽 히리야 산맥의 전투 민족으로, 서대륙 밖에서 제국군에 드문 패배를 안겨준 절대의 강병이었다.
지금 3함대와 함께한 대규모 수송선에는 그 용병들이 3만이나 타고 있었다. 제국군의 수까지 합치면 5만 이상의 대군.
“공화국군이 밀집해 있는 심페폴 이남은 현재 무주공산. 우리 3함대가 그 이남을 모조리 점령한다.”
루이스 백작은 차갑게 말했다.
“이 전쟁은 그걸로 끝이다. 황태자 전하의 명을 따라 우리 제국 3함대의 손으로 이 전쟁을 끝낸다.”
***
한편 우크라 산맥의 한 기슭.
한 화사하게 생긴 꽃 같은 남자가 건량을 씹고 있었다.
“아,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남자는 지도를 보며 투덜거렸다.
“지금쯤 이쯤 도착해야 하는데? 설마 바보 형님, 길 잃은 것 아니겠지?”
그러며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 경관이라곤 눈과 나무, 그리고 봉우리밖에 없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설마 길을 잃은 건 나인가? 여기가 아닌 건 아니겠지?”
남자는 다시 지도를 뚫어지라 살폈다.
왠지 길을 잃은 것은 연애 바보 형님이 아니라, 자신인 것 같다.
사실 그는 길을 찾는 데 영 소질이 없었다. 동방에서 무사 여행할 때도 툭하면 길을 잃었으니까.
“아, 정말 어디에 있느냐고?!”
그런 그의 주변에는 이십여 명의 푸른 제복을 입은 공화국 병사들이 쓰러져 신음 흘리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검제(劍帝), 3황자 미하일 드 로마노프.
자신도 모르게 우크라 산맥에서 조난 중이었다.
***
그렇게 동굴에서 휴식을 취하고, 엘리제와 린덴은 다시 산을 이동했다.
이틀을 푹 쉰 탓에 엘리제의 몸은 많이 나아졌다. 다행이었다.
그런데 산을 이동하던 중이었다.
“여기서 잠시만 쉬고 있어라.”
“네?”
그녀를 놔두고 린덴은 잠시 어딘가를 다녀왔다.
그리고 곧 나타난 그는 손에는 의외의 것이 들려 있었다.
“전하, 그건?”
“꿩이다.”
“꿩이요? 그건 어째서……?”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린덴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식량으로 사용하려고.”
“아…….”
산맥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챙겨온 비상식량이 거의 떨어졌다.
“꿩은 못 먹나?”
“아니요. 잘 먹어요.”
“잘 먹어?”
“네, 맛있잖아요.”
린덴은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생각했다.
‘한국에서도 은근히 찾아 먹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한국에서 병원 생활을 하며 가끔 외과의 높은 교수들과 회식하러 간 적이 있다.
흔하게 먹는 요리는 아니지만, 나름 닭과 오리를 섞은 듯해 별미였다.
“그런데 불을 피워도 되나요?”
불을 피우면 연기가 오른다. 그러면 공화국군에 그들의 위치를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잠깐이니 괜찮다. 초상 능력으로 가리면 되니까.”
“아…….”
“그 정도 초상 능력은 몸에 부담도 가지 않아.”
확실히 전투에 사용하는 초상 능력이 아니면, 간단간단한 것들은 몸에 부담을 거의 주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요리할 테니.”
“전하께서…… 요리를 하신다고요?”
엘리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생 요리는커녕 주방에서 물 한 번 안 묻혀봤을 텐데 요리라니?
하지만 린덴은 무뚝뚝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 나 나름 잘한다.”
“…….”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어쨌든 린덴은 요리를 시작했다.
털을 다듬어 꼬챙이에 꿩을 꿰고, 장작을 모으고, 성냥으로 불을 지피고.
어찌 된 일인지, 의외로 정말 능숙했다.
“이런 건 도대체 언제……?”
“2년 전, 앙젤리에서.”
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2년 전, 앙젤리 전쟁에서 그는 사령부의 사령관이 아니라, 일선 부대의 전투 지휘관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전하가 해주는 요리를 먹는 날이 오다니.’
엘리제는 복잡한 시선으로 장작 구이에 열중 중인 린덴을 바라봤다. 참 다시 살고 볼 일이다.
그가 직접 해주는 요리라니! 지난 삶에서는 상상도 해본 적 없다.
심지어 그녀가 앉아 있는 바위에는 모포가 펼쳐져 있었다. 춥다고 그가 직접 깔아준 것이다.
‘이러고 있으니 꼭 캠핑 온 것 같네.’
장작에 불이 붙으며 따뜻한 기운이 올라왔다.
추운 겨울, 남자가 땔감을 가져와 불을 붙이고 여자를 위해 맛있는 장작 구이를 해준다!
눈이 빨개져 그들을 쫓고 있는 공화국군만 아니면, 완전히 알콩달콩한 캠핑의 한 장면이었다.
‘하아.’
다시 좋은 기분이 들어,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좋았다. 이 순간이.
복잡한 마음과 별개로 바보같이.
아무런 생각 없이 지금처럼 따뜻한 불을 쬐며 그를 바라보고만 있고 싶었다.
-이 겁쟁아. 빨리 이 마음을 정리해.
-알잖아. 도망만 가면 언젠가는 후회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한창 장작 구이에 열중하던 린덴이 꼬치에 고기를 꽂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한번 맛봐라.”
그런데 그녀는 고기를 바로 받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
“왜 그러지?”
“아, 아니…… 전하.”
“응? 왜?”
엘리제는 뭐라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터지려고 해 그걸 참는 것도 곤란했다.
“그…… 얼굴이…… 쿡.”
다름 아닌, 조각 같은 그의 얼굴에 검은 재가 잔뜩 묻었던 것이다!
항상 흔들림 없고 완벽하던 그가 숯검둥이 얼굴이라니!
“쿡쿡.”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지?”
“얼굴이. 얼굴이…… 쿡쿡.”
그 말에 그는 자신의 얼굴을 쓰윽 만졌다. 검은 재가 묻어나오는 것을 보고 그녀가 웃는 이유를 깨달았다.
“이상한가?”
“아니요. 아니요. 그래도 잘생기셨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순간 아차 했다.
그에게 잘생겼다니. 웃다가 너무 편하게 말해버린 것이다.
‘그래도 잘생기시긴 하셨는걸.’
엘리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첫 번째 삶도 그렇고, 두 번째 삶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그보다 잘생긴 사람은 없었다.
아니, 실제로는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그보다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겐 그가 가장 잘생긴 남자였다. 저렇게 숯검둥이 된 것도 멋져 보였으니까.
‘잘생겼다고? 이렇게 재가 묻었는데?’
린덴은 그녀가 자신을 놀리는 것인가 살짝 고민했다.
어쨌든 정말 간만에 엘리제가 웃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아 넘어가기로 했다.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놀려도 얼마든지 좋았다.
“어쨌든 먹어봐라.”
“네, 감사합니다.”
엘리제는 고기를 받아 한입 깨물었다.
천연 그대로의 장작 구이. 닭과 오리가 섞인 부드러우면서도 담백한 맛…… 을 기대했는데.
‘읍. 뭐지, 이 맛은?’
그녀는 린덴을 올려보았다.
그도 고기를 깨물며 말했다.
“맛이 괜찮을 거다. 2년 전, 앙젤리에서도 야전에서 내가 취식을 하면 다들 맛있다고 좋아했거든.”
“……혹시 그 칭찬을 하신 분들이?”
“내 부하들이지.”
“……혹시 굉장히 과하게 칭찬하진 않던가요?”
“그랬지. 맛이 괜찮았던 것 같아.”
역시나.
그가 요리를 잘할 리가 없지.
그는 상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한 칭찬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는 것이었다.
“그 고기 이리로 줘보세요.”
“왜?”
“제가 더 맛있게 해드릴게요.”
“엘리제, 네가?”
황태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귀족가의 영애인 엘리제가 요리를?
그야 야전에서 전쟁을 수행하며 생존을 위해 해본 것이지만, 그녀는 요리해 볼 기회가 없었을 텐데?
하지만 엘리제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네, 이래 봬도 제가 요리 경력이 꽤 길다고요.”
“……그대가?”
의아한 시선에 엘리제는 아차 했다.
그녀의 요리 경력은 의과대학에 들어간 후, 자취하면서부터다.
“어쨌든 기대하세요.”
뭐, 사실. 맨날 대학 도서관에서 살아서 요리 경험 자체는 많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나을 것이다.
‘자취생의 요리 실력을 보여줘야지.’
그런 생각으로 그녀는 그가 가져온 커다란 배낭에서 양념을 꺼냈다.
도대체 이 가방은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지, 별의별 게 다 들어 있었다.
의아한 시선으로 황태자를 바라보니,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혹시나 너에게 요리해 줄 일이 생길까 가져왔다.”
“……!”
다시 얼굴이 붉어지려는 것을 참으며, 그녀는 꿩고기에 양념을 쳤다.
‘어차피 여기서 스튜나 찜을 만들 수도 없으니, 간만 맞춰도 훨씬 나을 거야.’
고르게 소금을 쳐 간을 맞추고, 살짝 덜 익은 부분을 다시 익혔다. 그리고 비린내와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후추를 쳤다.
그것만으로도 맛이 훨씬 좋아졌다.
아까 전엔 비린 맛이 나고 밍밍했다면, 지금은 진정한 천연 꿩 장작 구이가 되었달까? 캠핑 와서 먹는 것 같았다.
“대단하군.”
황태자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맛있어. 밖에서도 이런 맛을 낼 수가 있군.”
사실 별로 한 것도 없건만, 그 칭찬을 들으니 엘리제는 왠지 으쓱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한 요리를 그가 잘 먹으니 기분도 좋았다.
그런데 그가 불쑥 물었다.
“그러면 이제 엘리제, 네가 나에게 요리를 해줄 건가?”
“아…… 이곳에서 요리할 일이 있으면 제가…….”
“아니, 그것 말고. 론도에 돌아가서 말이야.”
“……!”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지만, 모르는 척 대답했다.
“한 끼…… 정도는 가문에 오시면 해 드릴게요.”
하지만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한 끼 말고. 난 자주 먹고 싶은데?”
============================ 작품 후기 ============================
내일 15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