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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05화 (105/194)

00105  4-3 직시  =========================================================================

3장 직시 - 3

죽지 마. 제발…… 부탁이니…….

“하아, 제발…….”

린덴은 그렇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안고 산맥을 돌파했다.

그의 몸도 만신창이였으나, 어떤 적이 나타나도 무릎 꿇지 않았다.

어느덧 그도 자신이 흘린 피로 흠뻑 젖었으나 그녀를 품 안에서 놓지 않았다.

그리고 이윽고.

그의 시야 너머로 목적지인 협곡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마지막 목적지였다.

저 협곡만 지나면 드디어 우크라 산맥에서 벗어나며 공화국군의 세력권에서 탈출하게 된다.

이 밖은 공화국군과 제국군이 세력다툼을 벌이는 완충 지역. 제국군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었다.

‘다 왔으니……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라, 엘리제.’

하지만.

협곡에 다가간 린덴은 아득한 절망감에 빠졌다.

이미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쪽으로 올 줄 알고 있었지, 공제.”

괴물 같은 표정.

사막의 전갈, 루이 니콜라스였다!

그리고 전갈의 주위로 무수히 많은 병력이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족히 1,000명은 넘어 보이는 병력이었다.

‘아아…….’

린덴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이런 몸 상태로 공화국 정예 1,000명이라니. 아무리 자신이라도 이제 더 이상은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다니, 대단하군. 역시 공제야. 혼자 몸으로 도대체 몇 명을 쓰러뜨린 거야?”

“…….”

“등불을 든 여인은 죽은 건가? 아쉽군. 살아 있으면 조금 가지고 놀다 죽이려 했는데.”

루이 니콜라스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우리의 지긋지긋한 인연도 이제 끝낼 때가 되었군.”

그가 팔꿈치밖에 안 남은 왼팔을 들어 올렸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그 신호와 함께 무수히 많은 소총병이 장전을 완료했다. 전갈의 팔이 떨어지는 순간 일제히 발포할 것이다.

마지막 순간.

총구들을 보며 린덴은 간절히 기원했다. 이제 자신은 저 총알 세례를 막을 힘이 없었다.

‘제발…….’

그래, 자신은 죽어도 괜찮다. 하지만 이 소녀만큼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 소녀만큼은 살려야 하는데.

‘제발…….’

그런데 그 최후의 순간.

도저히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장내를 갈랐다.

“드디어 찾았다!”

“……?!”

모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봐도 아무도 없었다.

“누구지? 누가 말한 거지?”

“어디에 있는 거지?”

그때, 공화국의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 하늘에!”

“……?!”

높다란 나무 길이 정도의 허공에 화사한 인상의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마치 허공을 계단으로라도 삼은 듯이. 그의 검은 군화 밑으로 희미한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었다.

“검제(劍帝)!”

공화국의 병사들이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하지만 검제, 미하일 드 로마노프는 공화국군이 아닌, 린덴과 엘리제를 보았다.

“가관이군.”

그의 화사한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혈인이 된 바보 형님과 총에 맞은 예쁜 레이디를 본 탓이었다.

“정말 가관이야.”

낮은 중얼거림.

그러고 다음엔 검제는 이 모든 일의 원흉, 사막의 전갈, 루이 니콜라스를 바라봤다.

그 허공을 뚫는 시선에 루이 니콜라스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선연히 느껴지는 검제의 살기(殺氣)였다.

***

검제는 초상 능력을 거둬 사뿐히 린덴과 엘리제 옆으로 내려왔다.

린덴은 꿈을 꾸듯 멍하니 물었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는?”

“어떻게는 무슨 어떻게야. 그냥 왔지.”

미하일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나저나 그때 의식 추방 진짜 강하게 썼더라? 방심하고 있었는데 치사하게.”

“……영창에서 탈옥한 건가?”

“그래, 탈옥했다. 어쩔래? 또 영창에 넣을 거야?”

“탈옥…… 한 거면, 영창에 다시 가야지…….”

그 말에 미하일은 이마를 꿈틀했다. 진짜. 이 바보 형님이.

“내 영창 일부러 습하고 구석진 곳으로 배치한 거지? 곰팡이랑 벌레 많이 나오게.”

“……그래.”

린덴은 부정하지 않았고, 미하일은 다시 이마를 꿈틀했다.

아, 정말 진짜. 내가 벌레랑 곰팡이 싫어하는 것 알고.

저런 몸 상태만 아니면 드잡이질이라도 하겠는데.

“하아.”

미하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

“…….”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가라고.”

린덴은 지칠 대로 지쳐 흐릿해진 눈동자를 들어 잠시 동생의 눈을 바라봤다. 금빛 눈동자들이 마주쳤다.

“뭐해? 빨리 가라고. 시간 없잖아. 리제, 죽일 거야?”

“……그래.”

린덴은 거부하지 않았다.

미하일의 말처럼 사양할 시간도 없었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선 일분일초라도 빨리 제국 군영의 병원으로 가야 했다.

미하일은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공화국 놈들 때문에 저 협곡으로는 못 가니, 저 방향으로 가. 하늘에서 살피니 저쪽으로 가도 길이 연결되어 있어.”

린덴은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며…… 그는 짧게 말했다.

“……고맙다.”

“별말씀을.”

“……꼭 살아 돌아와라. 명령이니.”

미하일은 그 말엔 살짝 놀랐다.

살아 돌아오라니. 슬프게도 둘 사이에는 조금 안 어울리는 말이었다.

“살아 돌아오라고? 진심이야?”

“……그래.”

그러며 린덴은 말했다.

“……돌아오면 무단 탈옥 죄로 영창에 다시 갈 각오는 하고.”

“…….”

그는 지금 린덴의 말이 진담인지, 살짝 농담한 것인지 고민했다.

미하일은 리제를 안은 채 힘겹게 걸어가는 린덴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미하일과 린덴은 정적(政敵).

이제 곧 론도로 돌아가서 서로를 죽고 죽여야 하는 관계였지만, 왠지 아주 잠시. 일순간 일반적인 형제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15년 전, 백원(百原)의 궁에서 일어난, 로마노프 황가의 혈사(血事), ‘혈탑(血塔)의 비극’ 이전처럼 말이다.

그때, 린덴과 엘리제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루이 니콜라스가 퍼뜩 정신이 들어 외쳤다.

“막아!”

미하일이 루이 니콜라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누구 마음대로?”

“……!”

다시 선연히 느껴지는 살기.

“허억!”

루이 니콜라스는 허겁지겁 추하게 뒷걸음질 쳤다.

미하일은 허리춤에서 한 가지 물건을 꺼내 들었다. 검제란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권총이었다.

“예전부터 생각한 것이 있지.”

그러며 가만히 루이 니콜라스의 인중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다른 놈은 몰라도, 네놈만은 기회가 되면 없애야겠다고.”

“……!”

루이 니콜라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거, 거기서 쏜다고 맞을 것 같으냐?!”

지금 미하일과 전갈의 거리는 400m가 넘는다. 권총은 물론 소총도 닿을 수 없는 거리.

하지만 미하일은 피식 웃었다. 얼음 같은 웃음이었다.

“당연히 이 거리에서 총알이 닿을 리가 없지.”

루이 니콜라스는 미하일이 무슨 의중을 가졌는지 몰라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타앙!

권총이 불을 뿜었다.

“일반적인 총알이라면 말이야.”

투명한 바람이 공이를 맞고 튀어나온 총알을 감쌌다.

미하일의 초상 능력은 다름 아닌 바람, 풍(風) 속성.

총알이 향하는 허공의 바람 저항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길을 총알을 감싼 쐐기 모양의 바람이 날아들었고……!

퍼억!

루이 니콜라스의 이마가 정통으로 뚫렸다.

“……컥.”

그렇게 사막의 전갈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사망했다.

한때 제국을 떨게 하였던 모략의 귀재치고는 다소 허망한 최후였다.

“각하!”

“니콜라스 각하!”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공화국군이 비명을 질렀다.

급히 상태를 살폈으나, 이미 즉사한 상태였다.

“이이! 검제!”

공화국 최강의 오러 나이츠이자 흉갑기병대의 사령관 위고 중장이 분노로 고함을 질렀으나, 미하일은 검을 빼 들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이 선.”

파앗!

바람이 불며 그의 전방 50m에 기다란 선이 생겼다.

“이 선 넘어오면 다 죽인다.”

“……!”

미하일은 빙글 웃었다.

“난 어딘가 무른 형님과 달라서 말이야. 착한 인상과 다르게 한다면 해. 그리고 나 지금 리제 때문에 조금 빡쳐 있어서.”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위고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공화국군은 1,000명이 넘는다. 그런데 고작 한 명이 1,000명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하일은 루이가 죽어 자동으로 지휘권을 넘겨받은 위고 중장에게 말했다.

“뭐가 이상하지, 위고 중장? 중장은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청(淸)에서 원래 불렸던 별명이 무엇인지.”

“……!”

“검귀(劍鬼)였다고. 쉽게 말해 검에 미친 귀신.”

미하일은 과거 3년간의 가출을 떠올렸다.

가출.

그건 장엄한 오페라로까지 꾸며지는 그의 영웅담에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그의 어머니인 1황비 마리엔이 결국 미쳤다.

아직은 성숙하지 못했던 그는 어머니의 광증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무사 여행을 떠났다. 말이 무사 여행이지, 도망이고 가출이었다.

‘어쩌면 미친 것은 어머니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티가 나지 않았을 뿐.

당시에는 미하일도, 큰형님 1황자 지펠도, 작은형님 2황자 린덴도 모두 미쳐 있었다.

그렇게 처음 가출을 나왔을 당시, 그는 어딘가 망가져 있었고 서대륙, 검은 대륙을 지나 밀항을 통해 청나라에 갔을 때는 그 정도가 가장 심했다.

아무리 악인을 향해서라지만, 그의 검에는 자비가 없었고, 그 무자비한 검술을 본 청인들은 미하일을 검귀(劍鬼)라 두려워했다.

검룡(劍龍) 운학. 은화(銀花) 남궁소예 등.

당시 좋은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어쩌면 검에 먹힌 살육귀(殺戮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들 다시 한 번 보고 싶군. 어렵겠지만.’

미하일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었다.

지금은 잡념에 빠질 때가 아니라 싸울 때다.

“참고로 나 지금 화가 정말 많이 나 있거든. 최근 이렇게 화가 난 적이 언제인지 모를 지경이야.”

그러며 검제는 웃었다.

잔잔한 웃음이건만, 1,000명의 군대가 흠칫 놀랐다.

“그러니 올 거면 이 악물고 와. 조금 거칠 수도 있어.”

***

한편 린덴은 뚝뚝 피를 흘리며 길을 걸었다.

‘이제…… 조금……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가면 지긋지긋한 공화국군의 세력권에서 벗어난다.

앞의 협곡에 마지막 공화국군이 모두 모여 있었던 것인지, 그의 앞에는 어떤 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건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이제 린덴은 초상 능력은커녕 검 하나 들어 올릴 힘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조금만…… 제발…… 조금만 더 버텨다오…… 엘리제…….’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소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때였다!

“파비앙 중령님. 어차피 이곳으로 공제가 오겠습니까? 각하께서 처리하시겠죠.”

“그래도 각하의 명령이니 우린 이곳을 사수하고 있겠다.”

린덴은 다시 아득한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까지 공화국군이 있는 것이다.

숫자는 많지 않았다. 일개 소대 규모, 즉 3~40명 정도?

평소라면 가볍게 제압할 병력. 하지만 지금 그는 30명은커녕 5명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하지?’

설상가상으로 적들은 순찰이라도 하는지 그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제 산맥이 끝나는 부분이라 그런지, 파비앙 중령이라 불린 적 지휘관은 갈색 군마를 타고 있었다.

린덴은 일단 짙은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군인이라기보단 성실한 학자처럼 생긴 적 지휘관, 파비앙 중령은 5명 정도의 적병과 함께 린덴이 숨은 수풀 쪽으로 다가왔다.

린덴은 제발 적들이 자신들을 눈치채지 못하길 빌었다.

하지만.

“……!”

하필 적 지휘관과 린덴의 눈이 딱 마주쳤다.

린덴은 이를 악물었다.

끝장이었다. 이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면으로 저들을 돌파해야 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계속 날씨가 춥군.”

파비앙 중령이라 불린 적 지휘관이 쓰윽 눈을 돌리며 병사에게 말을 건 것이다.

마치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 작품 후기 ============================

내일 20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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