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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06화 (106/194)

00106  4-4 운명  =========================================================================

4장 운명 - 1

“아, 네. 그러게 말입니다. 파리스는 지금쯤 봄일 텐데.”

“자네도 파리스 출신인가?”

“네, 중령님. 제가 이래 뵈어도 마르뜨 언덕에서 잘나가는 놈이었습니다.”

“그런가? 그래서 그런지 잘생긴 것 같기도 하군.”

그 말에 병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중령님. 이놈 말을 믿으십니까?”

“이놈보다는 중령님이 훨씬 잘생기셨습니다.”

그 화기애애한 대화를 들으며, 린덴은 눈을 깜빡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못 본 건가?’

아니다. 분명 봤다.

적 지휘관의 갈색 눈동자는 짧은 시간이지만, 분명히 자신과 자신의 품에 안긴 엘리제를 훑었다.

더구나.

“그러고 보니 자네들의 말이 맞는 것 같군.”

“네?”

“이곳에 공제와 등불을 든 여인이 올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렇죠?”

“계속 대기하느라 쉬지도 못하고 있는데, 자네들은 저쪽으로 가서 잠시 쉬고 돌아오게.”

“중령님께서는?”

“나는 이곳에서 아까 못다 한 생각이나 잠시 정리하겠네.”

“네, 금방 쉬고 돌아오겠습니다!”

중령의 명에 공화국 병사들은 신이 나서 사라졌다. 그들이 멀찍이 사라지자, 파비앙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말에서 내려 본인도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이런 중얼거림을 남기며.

“이제는 말을 타는 것이 좋을 겁니다.”

“……!”

린덴은 도저히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적의 지휘관이 자신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지?

어쨌든 지금은 호의를 거절할 때가 아니다.

특히 말이라니. 지금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그는 급히 엘리제를 안고 말에 올라탔다.

‘파비앙이라고.’

그러고 말의 배를 차 미친 듯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한편,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파비앙이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파비앙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일이 들키면 교수형이겠군.’

다 잡은 적의 총사령관을 놓아주었다. 잘못 걸리면 교수형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도 평소라면 절대 적 총사령관을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등불을 든 여인을 이렇게 죽게 놔둘 수는 없지.’

그는 씁쓸히 생각했다.

상처 입은 작은 소녀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왜인지 모르지만, 저 소녀를 이런 곳에서 죽게 놔두면 안 될 것 같았다.

‘모르겠군. 이 일로 나중에 잘못되면 제국에 망명 신청하면 받아주려나.’

그렇게 파비앙, 공화국의 중령이자 향후 몇 차례의 혁명 끝에 프랑소엔 공화국의 총통이 되는 그는 복잡한 머리로 생각했다.

***

드디어 탁트인 평야가 나타났다.

린덴은 제국군 부대를 향해 말을 달렸다.

사실 온몸이 한계에 이른 그는 방향 감각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본능적으로 북쪽을 향해 말을 채찍질했다.

그런데 얼마 말을 달리지 않아, 저 멀리서 우루루 먼지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

그 모습을 보고 린덴은 우뚝 말을 멈추어 섰다.

초상 능력의 반작용으로 시야가 흐릿해 정확한 적아가 구별되지 않았다. 적인가? 아군인가?

만약 저 기병대의 정체가 공화국의 큐래시어면 자신들은 그걸로 끝이었다. 이런 상태로는 절대 도망칠 수 없었다.

‘제발. 주여.’

그는 가슴 속 십자가 징표를 잡고 품에 안긴 작은 소녀를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이윽고…….

선두에 선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린덴은 온몸에 맥이 탁 풀렸다.

“전하! 엘리제!”

보도(寶刀)와 같이 아름다운 얼굴. 그 차가운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초조함에 덮여 있었다.

렌이었다.

“……늦었잖아.”

황태자는 중얼거렸다.

늦었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너무 늦어 나중에 엘리제의 몸이 회복되면 기념으로 죽을 때까지 술이라도 먹여야겠다. 저이가 제일 싫어하는 독한 위스키로.

그렇게 그는 멍하니 생각했다.

“전하!”

“전하! 괜찮으십니까?!”

“황태자비께서는?!”

로열 나이츠들이 하얗게 질려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그녀와 그, 그와 그녀의 여행이 끝을 내렸다.

이제 남은 것은 엘리제를 치료하는 것이다.

***

한편 그때, 협곡에 남은 미하일은 공화국군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투 장면이 묘했다. 분명 1대 1,000의 싸움이건만 겁에 질려 있는 것은 1,000명이었다.

“으으…… 괴물 같은.”

공화국군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선, 넘어오지 마라니까.”

검제 미하일은 차갑게 경고했다.

“쏴! 쏘라고!”

한 장교가 병사들에게 명했다.

공화국군은 이를 악물고 소총을 겨누었다.

타앙! 타앙!

하지만 이미 진열이 흐트러져서인지 화망 형성도 되지 않았고, 그 탓에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그나마 검제에 근처에 닿은 총탄은 그의 초상 능력, 에어 배리어(air barrier)를 뚫지 못했다.

“총 말고! 수류탄! 척탄병 어디 있나?! 수류탄을 던져!”

확실히 수류탄은 오러 나이츠도, 초상 능력자도 무시하기 어려운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다.

수류탄 전문 보병인 척탄병이 미하일에게 수류탄을 집어 던졌다.

하지만.

“소용없다니까.”

그의 발이 허공을 밟았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가속을 시작했다.

파앗!

일순간 그의 몸이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빨라졌다. 미하일은 폭발이 일어나기 전 허공에서 수류탄을 낚아채 그대로 공화국 병사들의 머리 위로 던져 버렸다.

콰앙!

“크악! 으악!”

공화국 병사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바닥에 엎드렸다.

수류탄이 한참 허공 위에서 터진 덕분에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검제의 말도 안 되는 무위에 사기는 바닥을 쳤다.

“이익! 대포를 쏴!”

그들은 공제를 잡기 위해 소형 대포도 끌고 왔었다.

치익! 콰앙!

불이 타오른 후 포문이 불을 뿜었다.

아이언 볼! 궤적에 닿는 것은 모조리 파괴해 버리는 철제 쇠공이 미하일에게 직선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미하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검을 들었다.

우웅!

단전의 호흡과 더불어 자연의 에너지, 오러가 검에 모여들었고, 그는 그 기세 그대로 중단세로 베었다.

서걱!

그리고 다시 일어난 믿지 못할 일. 아이언 볼이 두부처럼 검에 잘려 나간 것이다.

“으…… 이런 말도 안 되는…….”

“괴물…….”

도저히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무위를 계속해서 보여주는 검제에게 공화국 병사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기가 질려 주춤거렸다.

미하일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 선 넘어오지만 마. 그러면 살려준다.”

이미 아무도 그가 정한 선을 넘어가지 않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대치가 이어졌다.

1명이 1,000명을 핍박하는 말도 안 되는 대치 속에서 미하일은 속으로 생각했다.

‘힘들군. 이제 곧 한계인데.’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강인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사실 허세였다.

‘이런 다수와의 싸움은 기세에서 밀리면 그대로 끝이니까.’

린덴과 다르게 그는 이런 싸움의 경험이 많았다. 그래서 알고 있었다.

무조건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그나마 시간을 끌고 버틸 수가 있다.

하지만 이것도 곧 한계였다.

‘확실히 초상 능력을 사용하면 금방 피로가 오긴 하는군.’

무(無) 속성의 린덴은 초상 능력을 사용할수록 몸에 반작용이 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유(有) 속성의 초상 능력을 사용하는 황족들이 무한대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부작용이 없다 뿐이지, 피로도는 똑같았다.

‘이제 슬슬 벗어났겠지?’

그는 린덴과 엘리제가 떠난 시간을 계산했다.

‘내가 이렇게나 고생하는데 리제가 잘못되기만 해봐라.’

그는 린덴의 품에 처져 있던 엘리제를 떠올렸다. 만약 그녀가 잘못되면 그때는…….

‘아니야. 괜찮을 거야.’

미하일은 억지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끔찍한 생각은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소중한 존재가 된 것은 린덴뿐이 아니었다.

어느덧 그녀는 미하일, 그의 가슴 속에도 깊숙이 들어와 있었으니까.

‘이제 슬슬 나도 이곳을 떠야겠군.’

미하일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며, 공화국군을 노려보았다.

그러며 슬금슬금 공화국군이 눈치 못 챌 정도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도망갈 준비를 하였다.

***

린덴과 엘리제는 드디어 제국군 군영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혈인(血人)이 된 총사령관과 등불을 든 여인을 보고 제국군 모두가 경악했다.

“전하!”

“아니, 황태자비께서!”

홀로 군을 진두지휘하며 고군분투하던 맥가일 원수가 화급히 뛰쳐나왔다.

본인의 신분을 잊고 무책임하게 행동한 황태자에게 잔뜩 잔소리라도 하려 했지만, 그의 눈빛을 본 순간 입을 다물었다.

초상 능력의 반작용으로 괴롭게 꺼져가면서도, 자신의 소녀를 향해 형형히 타오르는 눈빛.

“빨리. 빨리 수술 준비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살려라!”

“……!”

“반드시 살려야 한다. 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잘못된다면…… 너희를 절대……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린덴은 허겁지겁 달려온 의사들을 겁박했다. 황태자의 그 흉포한 기세에 의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한 의사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 전하. 전하께서도 치료를…….”

엘리제뿐 아니라 린덴의 몸 상태도 엉망이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황태자는 굳게 고개를 저었다.

“난 됐다.”

“하, 하지만…….”

“날 신경 쓸 정신이 있으면 엘리제를 조금이라도 더 돌보라고! 난 괜찮으니!”

발작적인 외침.

평소와 전혀 다른,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엘리제, 제발.’

그가 그러는 이유는 이곳 군영까지 오며 엘리제의 상태가 한층 더 악화한 탓이었다.

장기간 피를 흘린 탓인지 이제 맥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간신히 느껴지는 맥은 실낱같이 약했다.

‘아아, 제발. 제발…….’

린덴은 그녀가 이대로 목숨을 잃고 자신을 떠나버릴까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초조함과 불안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 불안함은 린덴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등불을 든 여인께서?”

“황태자비께서?”

그녀의 몰골을 본 제국군 병사들이 크게 동요했다.

엘리제는 단순한 예비 황태자비가 아니었다. 바로 그들 모두의 소중한 여인이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 빨리 응급 수술에 들어가야 해.”

“그래, 반드시 살려야 해.”

의사들도 이를 악물었다.

지금 제국군 군영의 의료진들은 엘리제의 헌신에 감동해 자원하여 전장에 온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그들에게 이 작은 소녀는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동료이자 본받을 만한 스승이었고 이상이며, 빛이었다. 이렇게 이 소녀를 잃을 수는 없었다.

군 병원에 곧바로 수술이 준비되었고, 엘리제는 창백하게 의식을 잃은 채 수술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수술이 시작하기 직전.

린덴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누가…… 누가 그녀의 수술을 집도할 것이지?”

“저입니다, 전하.”

그녀의 스승, 그레이엄 남작이 답했다.

이 군영에서 엘리제 다음으로 뛰어난 수술 실력을 가진 이는 다름 아닌 그레이엄이었다.

“자네가?”

“네.”

평소 린덴은 마음속으로 엘리제의 스승이라는 그레이엄을 못마땅해했었다.

그레이엄이 자신의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마음에 안 들었던 탓이다.

하지만 이 순간.

린덴은 그런 마음을 버리고 그의 손을 잡았다.

“……!”

그레이엄은 지고한 황태자가 자신의 손을 잡자 흠칫 놀랐다.

그리고 린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간절한 목소리.

“제발…… 제발…… 부탁한다.”

“……!”

“그녀를 살려다오. 어떤 보상이라도 하겠다. 제발 부탁한다.”

그레이엄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봤다.

저 황태자가 ‘부탁’이라고 했다. 명령 외에는 절대로 해보지 않았을 만인지상의 지고한 이가. 그만큼 간절한 것이리라.

그레이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마음이…… 그리고 우리 모두의 마음이 전하의 마음과 같습니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반드시 살리겠습니다.”

짧지만 확고한 의지가 담긴 말.

그리고 수술장의 문이 닫혔다.

============================ 작품 후기 ============================

내일 21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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