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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07화 (107/194)

00107  4-4 운명  =========================================================================

4장 운명 - 2

그레이엄을 비롯해 군영 내 최고의 실력을 가진 의사들이 수술을 시작했다.

‘데임 클로랜스, 아니, 로제.’

그레이엄은 이전 그녀가 사용하던 가명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처음 자신의 교수실에 왔던 순간이 떠올랐다.

‘전 당신을 그냥 쫓아내려 했었죠.’

그는 처음에 그녀를 싫어했다. 부랑자 병실에 방치했고 도망가길 바랐었다.

분명 그랬는데 그녀는 언제부터 이렇게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것일까?

자신은 언제부터 이렇게 그녀만 바라보게 된 것일까.

‘죄송합니다. 데임 클로랜스. 전 사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결코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마음.

그녀는 황태자비가 될 것이다. 그러니 자신은 그저 그녀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

그레이엄은 씁쓸히 웃었다.

그가 그녀에게 이 마음을 밖으로 보이는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가겠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로제.’

그레이엄은 표정을 굳혔다.

반드시 그녀를 살릴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

수술은 길었다.

황태자는 응급 처치를 받은 후 꼼짝도 않고 수술장 앞에 앉아 수술이 끝나길 기다렸다. 마치 석상이라도 된 것 같았다.

“저, 전하. 전하께서도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괜찮다.”

“하, 하지만…….”

의사가 땀을 뻘뻘 흘렸다.

맥가일 원수도 사색이 되어 황태자에게 말했다.

“전하, 몸을 돌보셔야 합니다.”

“괜찮다고.”

언제나 이지적이고 냉철하던 황태자다. 찔러도 피나 한 방울 나올까 의심되던 그가 이성을 잃고,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응급 처치를 받았다지만,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태인데…….

“데임 클로랜스께서는 금방 회복되실 겁니다.”

“알아.”

그 말에 린덴은 강하게 긍정했다.

그 긍정은 확신이나 믿음보다는 간절한 기원이었다.

‘제발…… 좋아져야 한다. 엘리제…….’

린덴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토록이나 자신이 무력하다니. 자신의 심장인 그녀가 저렇게 생명이 걸린 수술을 받고 있는데, 제국의 만인지상인 그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무력하게 하늘을 보며 기도하는 것 외에는.

린덴은 씁쓸히 생각했다.

‘도대체 요즘 몇 번이나 기도하는지 모르겠군.’

15년 전 ‘그날’ 이후 그는 신을 찾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그는 몇 번인지도 모를 정도로 계속해서 신을 찾고 있다. 모두 엘리제 때문이다.

‘그런 것 따위 상관없어. 엘리제…… 너만 괜찮아진다면.’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다.

작은 체구로 환자를 보며 미소 짓던 모습을, 여리지만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모습을, 론도의 테스 강변에서 다소곳이 걷던 모습을, 케이크를 먹으며 좋아하던 모습을. 심지어 그녀의 삐뚤삐뚤 못난 글씨까지.

전부 보고 싶었다.

그 모습을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편안히 누워 기다리고 있을 기분이 도저히 아니었다.

‘이렇게 다시……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는 없어.’

그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그런 마음은 린덴만이 아니었다.

군 병원이 위치한 프라바.

3만의 제국군이 머물고 있는 그 군영에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었다.

“밥 됐어. 밥 먹어.”

“안 먹어.”

“뭐?”

취사병은 놀라 잭슨을 바라봤다. 산만 한 덩치의 잭슨은 늘 밥이 모자라다 투정 부리던 놈이었는데?

“정말 안 먹어? 어디 아파?”

“아, 몰라. 조용해.”

그러며 잭슨은 눈을 감았다.

뭐야?

취사병은 다른 병사들에게 말했다.

“밥 됐어. 다들 나와.”

“안 나가.”

“뭐?”

“우리 초소는 다 안 먹을 거야. 다른 초소에 넘겨줘.”

이놈들이 단체로 미쳤나? 전쟁에 나온 병사가 밥을 안 먹겠다고 사양하다니.

취사병은 눈을 깜빡였다.

“후회하지 마. 나중에 달라고 해도 안 준다.”

“그래.”

오히려 병사들은 귀찮다는 듯 손짓했다. 진짜 뭐야?

그런데 옆에 초소를 가니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들도 식사를 거부한 것이다.

“너희도 안 먹는다고?”

“그래. 다른 초소 줘.”

“…….”

하지만 그 옆의 초소도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취사병은 중대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중대장 라인 대위는 당황해 물었다.

“뭐? 병사들이 식사를 거부하고 있다고?”

“네, 모두 안 먹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대위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군인이 단식이라니. 원래 단식은 강한 불만이나 문제가 있을 때 항의의 의미로 행하는 경우가 많다.

‘도대체 무슨 불만들이 있길래?’

어쨌든 가만히 놔둘 일이 아니다.

단식할 정도의 불만이라니. 더 큰 일이 일어나기 전, 정확히 무슨 불만이 있는지 확인하고 해결해야 했다.

“너희 도대체 무슨 불만이 있는 거냐?”

라인 대위는 초소의 분대장들을 불러 먼저 대화를 시도했다.

“밥을 안 먹다니. 불만이 있으면 먼저 지휘관인 나에게 이야기해야지, 다짜고짜 단식하면 어떻게 해?”

그런데 대답이 의외였다.

분대장들은 웬 불만이냐는 듯 말했다.

“불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왜 단식을?”

“아…… 그건…….”

그들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기도 중이었습니다.”

“뭐? 웬 기도?”

“지금 데임 클로랜스께서 수술을 받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희 부대에 계신 군종 목사님이 식사를 거르며 기도하시길래 따라 해봤습니다.”

그 말에 라인 대위는 입을 벌렸다.

예비 황태자비를 위해 기도 중이었다고? 부대원 모두가? 식사까지 거르며?

그는 짧은 머리의 분대장에게 말했다.

“자네 구교잖아? 근데 목사님을 따라 기도해?”

“그게 뭐 무슨 상관입니까.”

“그리고 자네는? 무교잖아? 근데 무슨 기도야?”

같은 브리티아인이지만, 종교는 조금씩 달랐다.

물론 주로 신교나 구교였지만, 무교도 가끔씩 있었다.

평소 무신론을 주장하던 대머리 분대장, 스캇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 뭐. 그렇긴 한데요.”

“근데?”

“제가 두 달 전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파편에 튄 상처가 곪아서. 근데 등불을 든 여인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분 아니었으면 전 죽었을 거란 말이죠. 그리고 그런 이가 여기에 한둘이 아닙니다.”

스캇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으시고 헌신하던 소중한 레이디께서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단 말입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게 하늘에다 대고 비는 것밖에 없으니, 기도라도 해야죠. 지금 구교든 신교든 무교든 무슨 상관입니까?”

“…….”

“그러니 수술이 끝날 때까지라도 뭐라고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다들 심각하다고요.”

그래도 라인 대위는 뭐라고 하려고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한 분대장이 낮게 말했다. 과거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감옥에 수감 경력이 있던 병사였다.

“만약 등불을 든 여인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때 공화국 놈들은 저희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

결국, 라인 대위는 그들을 만류하지 못했다.

그렇게 사령부 프라바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은 한마음으로 수술이 시행되고 있는 병원과 하늘을 바라보았다.

병사들은 출정 전, 출정식에서 그녀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여러분이 다쳤을 때 때, 상처로 고통받을 때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작은 소녀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녀는 다친 그들과 함께했다.

그래서 그들은 간절히 기원했다.

자신들의 등불을 든 여인이 쾌유하길.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수술장 앞에서 기다리는 린덴의 시야가 깜깜하게 변하고 있을 때.

드디어 수술장 문이 열리며 한 중년 의사가 밖으로 나왔다.

수술이 드디어 막바지에 이르러 결과를 알려주러 온 것이다!

“어떻게 됐나?!”

린덴은 다급히 일어나며 물었다.

안 좋은 몸으로 워낙 급하게 일어나, 현기증이 일며 몸이 휘청 흔들렸다.

“전하! 진정하십시오!”

맥가일이 불안 초조한 얼굴로 린덴을 부축했다.

하지만 황태자의 눈은 의사의 입에 고정되어 있었다. 제발!

“그게…….”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린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밝은 목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린덴은 그렇게 믿었다. 그녀는, 그 작은 소녀는 거짓말처럼 일어나 이전처럼 강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묻는 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어…… 떻게 됐지?”

중년 의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수술은 잘되었습니다.”

“……!”

“수술은 성공적입니다. 다행히 총알이 중요 신경이나 근육, 뼈, 힘줄을 건들지 않아 후유증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레이엄 경께서 심혈을 다해 수술해 상처 치료만 잘 받으면 흉터도 거의 안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은 희망적이다.

그런데 왜 저렇게 의사의 얼굴이 어둡단 말인가?

“수술은 잘되었는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가?”

“지금까지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수액으로 보충하였지만, 출혈의 정도가 너무 심해 한계가 있습니다. 빈혈 수치가 너무 낮아 장기에 산소 공급이 원활히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면?”

“수술은 잘 끝났지만, 이대로라면 과다 출혈에 의한 합병증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

절망적인 이야기였다.

린덴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웃기지 마.”

“…….”

“웃기지 말라고! 그녀가 죽는다고?!”

고함을 지르자 피잉 머리가 돌며 비틀거렸다.

맥가일이 만류했지만,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죽는다고? 그럴 리가 없어!

그런데 그때, 의사가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였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뭐지?!”

“하지만 위험합니다.”

“……?”

“검사 결과를 봤을 때 실패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그리고 만약 실패하면 데임 클로랜스께서는 사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방법 외엔 없습니다.”

“……!”

린덴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 방법이 뭐지?”

의사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수혈입니다.”

***

“수…… 혈이라고?”

수혈(輸血).

환자의 몸에 직접 타인의 피를 주입하는 것을 뜻한다.

현대 지구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라 어린애도 아는 의료 처치.

하지만 린덴은 낯선 단어를 중얼거리듯 읊조렸다.

“네, 전하. 부족한 혈액을 타인의 피로 채워주는 것입니다. 수액을 주사하듯 직접 혈관에 넣어주게 됩니다.”

“그러면…… 하면 되지 않는가? 뭐가 문제지?”

깊은 의학 지식이 없는 린덴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피가 필요하면 넣어주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 시대 때 수혈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타인의 피가 몸에 들어가면 높은 확률로 거부반응이 일어납니다.”

“거부반응?”

“네, 몸에 들어간 피가 체내 거부 반응에 의해 용해되며 고열이 일어나며 검은 소변이 나오게 되지요.”

의사가 말하는 것은 현대 지구에서 ‘급성 용혈성 수혈 부작용’라 불리는 거부반응을 뜻한다.

현대 지구에서는 상식적인, ABO 등의 혈액형 미 일치로 일어나는 거부반응으로, 일단 발생하면 치명적인 결과를 일으킨다.

“그래도 다행히 최근 데임 클로랜스께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였습니다.”

“뭐지?”

린덴은 급히 물었다.

“수혈 전 미리 몸 외부에서 혈액끼리 반응시켜 보는 것입니다.”

지구에서는 1901년이나 되어서야 시작된 혈액형 교차반응 검사(cross-matching test)였다.

엘리제는 크림반도에 온 후, 전쟁터에서 수혈의 필요성을 곧바로 깨달았고, 간단한 교차 반응 검사를 도입했다.

그녀가 그 검사를 도입하기 전까지는 제국의 의사들은 과거 지구의 의사들이 그랬듯 혈액형의 존재를 모르고 무작위적으로 수혈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 결과 혈액형이 일치하지 않아 거부반응이 수없이 일어나 수혈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률이 50%에 육박하고 있었다.

“데임께서 도입하신 방법 덕분에 50%에 육박하던 수혈 부작용 사망률이 1% 미만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바로 다음편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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