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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08화 (108/194)

00108  4-4 운명  =========================================================================

4장 운명 - 3

“그런데? 그러면 그 방법을 사용해 수혈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라는 거지?”

린덴은 일분일초가 귀중한 시간에 이런 쓸데없는 설명을 하는 의사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사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데임께 맞는 혈액형이 없습니다.”

“뭐?”

“지금 건장한 병사들의 혈액을 채취하며 계속 교차 검사를 하고 있는데, 그 어떤 혈액과도 데임의 피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거부반응이 일어납니다.”

“……!”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엘리제가 혈액 교차 반응을 도입한 이후로,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떤 피가 들어와도 거부반응을 일으키다니?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길래.

‘도대체 모르겠구나.’

세상 사람들의 혈액에는 단순히 ABO type 말고도,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더 많은 요소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의사는 답답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데임 클로랜스라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을까?’

왠지 그녀라면 왜 이런 반응이 일어나는 것인지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수술대에 누워 있다.

그녀 없이 자신들만으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지?”

“일단 데임께 맞는 혈액을 조금 더 찾아보긴 할 것입니다만, 만약 맞는 혈액이 없다면.”

의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락에 떨어지는 것 같은 한숨이었다.

“아무 혈액이라도 주입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게 해서 거부반응이 일어나면?”

“그때는…… 방법이 없습니다.”

방법이 없다. 그녀가 사망한다는 뜻이었다.

그 절망적인 말을 들은 순간이었다.

콰앙!

린덴이 벽을 강하게 후려쳤다.

“빨리 구해.”

“…….”

“맞는 혈액. 빨리 구하라고! 무슨 수를 써도 좋으니!”

“네, 전하!”

그 흉포한 기세에 의사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제길, 엘리제! 엘리제!’

맞는 혈액을 찾지 못하면 이대로 그녀를 보내야 한다고?

‘웃기지 마. 절대. 절대 너를 이렇게 보내지 않아.’

린덴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나 강하게 깨물었는지, 입술이 찢어지며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

하지만 그 누구의 피를 반응시켜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저주라도 내린 듯, 그녀의 피는 모든 피에 거부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수술하던 집도의들의 피도 시도해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아아, 엘리제.’

린덴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미 수술이 끝난 엘리제는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미동도 없이 시체처럼 창백한 그녀의 안색은 그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이 자리에 누워 있는 게 네가 아니라, 나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차라리 죽어가는 게 자신이었다면, 그랬다면 좋았을 것 같다.

‘내 피라도 줄 수 있으면, 그러면 내 모든 피를 너에게 주었을 텐데. 그래서 내가 죽더라도 너만 살아날 수 있다면.’

그는 그렇게 절망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왜 내 피는 검사해 보지 않지?”

“아…….”

의사들이 황태자를 바라봤다.

“전하께서는 수혈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수혈하려면 최소 400㏄ 이상의 혈액을 빼내야 한다. 하지만 현재 린덴은 그런 부담을 감수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큰 이유.

“아마…… 전하의 피를 검사하셔도 똑같을 것입니다.”

이미 무수히 많은 이의 피를 반응시켜 봤다.

다 소용없었는데 황태자의 피라고 다르겠는가? 똑같을 것이다.

“…….”

린덴은 입을 다물었다.

그도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피가 그녀의 혈액과 일치할 확률은 기적이 일어날 확률보다 낮다는 것을.

아무리 그녀가 자신의 약혼녀라도 실제로는 피 한 방울 안 섞이지 않았는가?

‘만약 엘리제와 내 피가 일치한다면 그건 우리가 기적보다도 더 깊은 운명이란 뜻이겠지.’

황태자는 실없이 생각했다.

어쨌든 좋았다.

이렇게 그녀를 보낼 수는 없었다.

기적보다도 힘든 확률이라도 바라고 싶었다.

“실패해도 좋으니. 그래도 내 피도 검사해 봐.”

“……알겠습니다.”

의사들이 조심히 존귀한 그의 피를 채취했다.

그리고 엘리제의 혈관에서 뽑은 혈액에 반응을 해보았다.

“…….”

모두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크게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이의 피가 일치하지 않았는데 약혼자인 황태자라고 다르겠는가?

그건 검사를 명한 황태자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기적을 바란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피가 그녀에게 맞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그저 발악이었을 뿐이다. 어떻게든 그녀를 붙들고 싶은.

그런데 분명 그랬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누군가 엘리제의 혈액을 보며 중얼거렸다.

“왜…… 응집 반응이 일어나지 않지?”

원래 예상대로라면 딱딱하게 응집 반응이 일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그녀의 피는 모든 혈액에 거부반응, 즉 응집 반응을 나타냈다.

그런데 전혀 변화가 없었다.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직…… 시간이 안 지나서 그런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린덴은 눈을 깜빡거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내 피는…… 괜찮은 것인가?”

“다,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의사들이 다급히 재검사를 시행했다.

하지만 여전히 응집 반응은 일어나지 않았다. 황태자와 엘리제의 혈액이 일치하는 것이다!

“Oh, My God!(오! 신이시여!) 이런 기적이!”

놀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기적. 이건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내…… 피가 그녀에게 맞는 것인가?”

황태자가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전하!”

한 의사가 흥분해서 외쳤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황태자의 얼굴에 환희가 차올랐다.

그 환희는 초주검이 된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이 순간 그는 온 세상이 구원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그러면 엘리제는…… 엘리제는 살 수 있는 것이지?”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한 완고한 인상의 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전하의 피를 수혈받으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또 무슨 문제?”

황태자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그놈의 문제는 왜 끝도 없이 나온단 말인가!

“현재 전하의 몸은 수혈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

“간신히 억지로 버티고 계시지만, 전하께서도 몸 상태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 몸으로 수혈은 무리입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린덴의 몸도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그런 상태에서 수혈이라니.

하지만.

“그딴 것 상관없다.”

그는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수혈을 시작해! 지금 당장!”

“하, 하지만! 전하!”

“명령이다! 지금 황태자인 나의 명에 따르지 않을 생각인가?”

서릿발 같은 단호한 외침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의사들은 황태자의 몸에서 피를 뽑아 엘리제의 몸에 수혈을 시작했다.

“몸에 무리가 가는 것 같으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피가 몸에서 빠져나가자 곧바로 무리가 왔다. 머리가 어지러우며 시야가 하얘졌다.

하지만 황태자는 질끈 눈을 감았다.

‘엘리제, 너만 살아날 수 있다면 이런 것 따위.’

몇 번이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낮은 목소리가 황태자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힐끗 눈을 떠보니 까칠한 인상의 남자, 그레이엄이었다.

황태자는 이 와중에도 그의 감사가 마음에 안 들어 입술을 비틀었다.

“내 여자다. 그러니 네가 감사할 필요 없다.”

“…….”

“너는 엘리제나 잘 치료하도록.”

그렇게 황태자의 피가 엘리제에게 수혈되었다.

조금씩 그의 피가 들어갈 때마다 종잇장 같은 그녀의 얼굴에 붉은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흐릿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보며 린덴은 가슴이 울컥했다.

자신의 피가 그녀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니. 그건 놀라우면서도 환희가 넘치는 광경이었다.

“좋아…… 지는 것인가?”

린덴은 의사들에게 물었다.

듣는 의사들이 흠칫 놀랄 정도로 그의 목소리에는 기력이 없었다.

“네, 전하. 이제 데임께서는 좋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다행…… 정말 다행이군.”

린덴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졸렸다.

이제 잠시만 눈을 붙였다, 뜨면 다시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볼 수 있겠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앉은 채로 의식을 잃었다.

“전하!”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전하를 병실로 옮겨! 빨리!”

결국, 그가 쓰러지자 의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의식을 잃은 채 급히 응급처치를 받는 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

며칠 뒤.

사령부가 위치한 제국군 군영에 거지 몰골을 한 남자가 도착했다.

“정지! 누구냐!”

“아아. 나야, 나.”

남자는 힘없는 동작으로 손을 흔들었다.

경계를 서던 병사는 총으로 남자를 겨누다 눈을 크게 떴다. 거지 몰골이긴 했는데, 익숙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3황자…… 전하?”

“그래, 나야.”

남자, 3황자 검제 미하일은 한숨을 푹 쉬며 답했다.

“드디어 도착했네. 왜 이렇게 길이 어려운 거야.”

그가 며칠이 지나서야 군영에 도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화국군 때문이 아니라 길을 잃은 탓이었다.

심각한 길치인 그는 우크라 산맥에서 방향을 잘못 잡아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한참을 내려가다 온갖 고생을 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나저나 풍(風) 속성 초상 능력자인 주제에 길치라니. 참 미하일다운 일이었다.

“아아, 드디어 집에 왔네. 오는 길에 다른 군영에서 듣긴 했는데 리제는 괜찮아진 거지? 형님도 괜찮다고 하고.”

“…….”

“어쨌든 씻을 물 좀 준비해 줘. 먹을 것이랑 같이.”

그런데 병사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의 정체를 알았음에도 겨누고 있는 총을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뭐해? 나 미하일이라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총사령관님의 명을 받아서.”

“명? 형님이 무슨 명을?”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미하일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설마? 그 바보 형님이?

그때, 그가 군내에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창 가셔야죠, 전하.”

“으악! 갈트 준장!”

군대 내 경찰, 헌병대(Military Police).

갈트 준장이 마치 새디스트같이 얄미운 미소를 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죄명은 아시죠? 무단 탈옥죄.”

“아악!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난 형님과 리제를 구했다고!”

“네, 큰 공을 세우신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건 차후 포상이 내려질 것입니다. 얼핏 들으니 무척 큰 상이 내려질 거라 하더군요. 기대하십시오. 하지만 공은 공, 잘못은 잘못이지 않습니까? 잘못한 것은 벌을 받아야죠. 어물쩍 넘어가면 군 기강이 서지 않습니다. 그러니 뭐, 군 기강을 세운다 생각하시고 잠깐 한 몸 희생하시죠, 전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별것입니까?”

“아악! 무슨 헛소리야?! 싫다고! 영창 싫어! 또 벌레 나오는 방 줄 거잖아?!”

“이번엔 특별히 깨끗한 방으로 드리겠습니다. 좋은 방이 남아 있으면요.”

“거짓말하지 마!”

“근데 벌레는 왜 이렇게 싫어합니까? 쯧, 다 큰 남자가.”

“그러는 넌 좋아?!”

“뭐, 저야. 영창 갈 일이 없으니까요. 하여튼 갑시다. 시간도 늦었는데.”

미하일은 끌려가며 비명을 질렀다.

“아악! 이거 일부러 그러는 거지?! 이 바보 형님을 진짜!”

============================ 작품 후기 ============================

내일 22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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