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9 4-4 운명 =========================================================================
4장 운명 - 4
그 시각.
크림반도의 남부에 위치한 해안 요새 퐁트뢰.
경비를 서던 스위센 용병들이 하품했다.
“하아, 피곤하네. 좀 자도 되려나.”
“뭐, 여기까지 제국군이 오겠어. 좀 자.”
“그럴까.”
퐁트뢰는 반도의 서남부 해안 교통의 요충지로, 흑해로 향하는 중요 항구이기도 했다.
따라서 굳건한 요새가 세워져 있었지만, 그 요새를 지키는 병력은 적었다.
고작 2,000명 남짓한 스위센 용병들이 전부.
공화국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군의 주력들은 모두 반도의 중부, 심페폴 인근에서 제국군과 각축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전황이 안 좋다던데.”
“그러게. 공제가 심페폴로 혼자 들어와서 사막의 전갈을 빈사 상태로 만들었다며?”
아직 사막의 전갈의 사망 소식은 반도 남부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공화국이 형편없이 밀리고 있음은 모두 알고 있었다.
“모르겠다. 우리야 뭐, 돈이나 대충 받으면 되지. 이런 데서 죽으면 개죽음이야.”
한 용병이 말하며 하품을 찍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하품을 한 입을 다물기 전, 그는 믿지 못할 광경을 보았다.
“저건?”
그는 자신이 헛것을 보았나 눈을 비볐다. 하지만 헛것이 아니었다. 옆에 용병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웬 배들이?”
한두 대가 아니었다.
낮게 깔린 해무를 뚫고 시커먼 철갑함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수가 아찔했다.
“공화국의 함대인가?”
“아니야. Liverty, Equaility, and Fraternity(자유, 평등, 박애) 깃발이 없잖아. 뭐지?”
공화국은 자유와 평등, 박애를 의미하는 삼색의 깃발을 사용한다.
하지만 저 함대가 사용하는 깃발은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 병사가 깃발 문장을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
“제국 황실기다! 제국 3함대야!”
“뭐, 제국 3함대?!”
많은 이가 제국 3함대가 어떤 함대인지 알고 있었다. 동방에 주둔하며 적에겐 악몽이나 다름없는 화력을 지니고 있는 함대였다.
“말도 안 돼! 3함대는 동방에 주둔하는 함대잖아!”
그리고 3함대뿐이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병력이 실려 있는지, 수송선들도 끝없이 뒤에 늘어서 있었다.
“대포, 대포 준비해!”
“적선의 접근을 허용하지 마!”
하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고작 2,000명의 군기 빠진 용병들이 막기엔 3함대는 너무나 강력한 적이었다.
기잉. 철컥. 철컥.
요새에 다가온 장갑함들이 포문을 열었고, 곧 수많은 대포가 불을 뿜었다. 벼락과도 같은 위력의 포격이었다.
“크악!”
“아악!”
얼마 지나지 않아 요새는 기능을 잃고 너덜너덜하게 변해 버렸고, 무력화된 요새 앞 해안가로 수송선들이 접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배의 문이 열리며 나타난 굴카 용병들.
세계에서 가장 드높은 산맥, 히리야의 지배자이자 과거 청의 대제(大帝)를 격파하고 브리티아 제국군에도 악몽을 안겨주었던 이들.
그 전투 민족들이 쿠크리를 들고 요새에 진입했고, 그걸로 퐁트뢰 요새의 주인이 바뀌었다.
“요새의 점령이 끝났습니다.”
3함대의 부사령관 랑트 백작은 그 보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러면 우리는 황태자 전하의 작전을 수행하겠다.”
황태자 린덴이 그들에게 내린 작전.
“이제부터 심페폴 이남의 모든 요충지를 우리 3함대가 점령한다.”
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의 종막을 선언하는 명령이었다.
***
수혈이 끝난 후, 엘리제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는 것을 목격한 린덴은 곧바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사실 그때까지 버티고 있던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를 향한 마음이 아니었다면 군영에 도착하기도 전에 쓰러졌으리라.
어쨌든 그런 그의 마음 덕에 엘리제는 살 수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군영에 도착하기 전에 진즉 죽었을 것이다.
“엘리제.”
린덴은 병실의 침대에 누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얇은 커튼 하나를 두고 침대에 누워 있는 하얀 얼굴의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심장, 엘리제였다.
‘아픈 것은 싫지만 이건 좋군.’
둘은 지금 한 병실에 입원 치료 중이었다.
야전 병원의 열악한 환경상 1인실이 없었기 때문인데, 그는 좋았다.
눈만 뜨면 그녀를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자신을 영원히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얼마나 아프던지.
지옥의 고통이 이러할까. 무저갱과도 같은 좌절이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린덴은 조금 더 그녀를 가깝게 보고 싶어 몸을 옆으로 돌리려다 끊어질 듯한 격통을 느끼고 신음을 흘렸다.
“큭.”
도주 당시 워낙 초상 능력을 무리하게 사용해 온몸이 만신창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수혈까지 했으니, 당분간 병실에서 벗어날 생각은 꿈에도 못하는 상태였다.
그래도 좋았다.
그녀가 무사해서,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어서.
이렇게 계속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그는 얼마든지 아파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언제 일어나는 거지?’
원체 의사들이 정성을 쏟은 탓일까, 그녀의 몸은 굉장히 많이 회복된 상태다.
특히 그레이엄, 그 마음에 안 드는 놈은 어찌나 그녀에게 붙어 있던지.
‘물론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서 그런 것인 것은 알지만.’
그래도 마음에 안 들었다. 굉장히.
‘의사들은 쇼크의 후유증 때문에 못 일어나는 것이라고. 곧 아무 이상 없이 정신을 차릴 거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빨리 환한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크윽.”
린덴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 옆의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엘리제.”
그의 손이 그녀의 백금발에 와 닿았다.
부드러운 감촉.
그러고 깨지기 쉬운 보석을 다루듯, 조심히 그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넌 내 거다. 이제는 도망갈 생각하지 마.”
그날, 수혈하던 밤을 떠올렸다.
오로지 자신만이 그녀에게 피를 줄 수 있었다. 그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고,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래,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분명했다.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물론 서로의 피가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 단순한 우연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린덴은 그냥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서로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에 신이 그런 기적을 일으켜 준 것이라고.
‘그런데 그때 총을 맞았을 때, 엘리제는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이지?’
‘전하…… 린덴…… 저……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그리고 그녀의 말.
‘저 당신을…….’
그 뒤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당시에는 그녀가 위독해 정신이 없어 생각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자꾸 신경이 쓰였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일까?
‘설마? 그녀도 나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항상 자신을 밀어내던 엘리제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때의 눈빛은…….’
마지막 순간. 자신을 바라보던 엘리제의 눈빛에는 안타까운 갈망이 가득했었다.
무엇에 대한 갈망이었을까? 왜 안타까워했던 것일까?
‘엘리제…… 빨리 일어나라.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인지 알려줘야지.’
린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 징표도 다시 받아가야지.’
그는 진주 십자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에게 이 목걸이도 돌려주어야 한다.
‘또 너랑 하고 싶은 게 많아. 그러니 빨리 일어나길.’
그래, 그는 하고 싶은 게 많았다.
그녀가 웃는 모습도 보고 싶었고, 그녀와 아무것도 아닌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도 싶었다.
조용한 공원을 같이 걷고 싶기도 했고, 그녀가 좋아하는 파스타와 케이크도 먹고 싶었다. 론도에 돌아가면 러브 스토리 연극도 같이 보고 싶었다.
물론 린덴은 잡담도, 산책도, 파스타도, 디저트도, 연극도 모두 싫어한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라면 그도 좋았다.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
‘엘리제…….’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졌다.
“전…… 하……?”
“……!”
린덴의 눈동자가 크게 뜨여졌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흐릿하게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푸른 눈을 보는 순간, 린덴은 가슴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눈을 뜨면 너무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못했다. 가슴이 요동쳐 진정할 수가 없었다.
“엘…… 리제…….”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은 아닌지.
만지면 터져 나가는 거품 같은 환각은 아닌지 두려워하면서.
하지만 아니었다.
너무나 부드러운 촉감이 그의 손끝에 와 닿았다. 그녀가 맞았다.
“전…… 하…….”
그녀는 자신의 뺨을 만지는 그의 손길에 흠칫 놀란 듯했다. 하지만 이제 막 의식을 차려 몽롱한 탓인지 피하거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저 멍하니 그의 눈을 보며 말했다.
“저…… 꿈을 꾸었어요.”
“무슨 꿈을?”
“긴 꿈인데 악몽이었어요. 길고…… 끔찍한.”
그 말에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악몽을?’
이전 엘리제가 잠을 잘 때마다 잠꼬대하던 것이 떠올랐다.
매번 도대체 무슨 악몽을 꾸는지, 그녀는 항상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또 똑같은 악몽을 꾼 것인가?
그런데 그 순간, 엘리제가 살짝 웃었다.
옅지만 잔잔하고 평온한 미소.
마치 무언가를 내려놓은 것처럼, 평안한 그 표정에 린덴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악몽을 꾸었다면서 왜 저런 표정이지?
“이제 괜찮아요. 악몽 꾸어도. 나…… 이제 알았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냥…… 그게…… 그러니까…….”
그녀는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듯 떠듬떠듬 말하였다.
하지만 무언가 힘에 부치는지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눈동자의 빛도 다시 스르르 줄어들었다.
“미안…… 미안해요. 저…… 조금만…… 나…… 전하께…… 할 말이…… 있는데…….”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조금 더 쉬어라.”
“네…… 조금만…….”
곧 엘리제의 눈이 완전히 감겼다. 다시 의식이 가라앉은 것이다.
“하아.”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이지?’
지난번 총에 맞는 순간부터, 두 번째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도 저렇게나 아련한 눈빛으로.
“일어나면 이야기해 주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처음 의식을 차렸으니, 완전히 의식이 돌아오는 것도 멀지 않을 것이다.
린덴은 그녀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푹 자라. 악몽 따위 꾸지 말고.”
그러고 그는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 벽면에 기대앉아 하염없이 그녀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에게 창틈 사이로 잔잔한 달빛이 내려앉았다.
***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 그녀는 다시 의식을 차리지 않았다.
의사들은 곧 의식을 차릴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린덴을 달랬다.
심한 쇼크를 앓은 후 완전히 의식이 회복될 때까지 오래 걸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하지만 설명을 들어도 린덴은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그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계속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린덴은 병실에서 의외의 손님을 맞았다.
“……!”
근엄한 얼굴의 중년 귀족.
“……엘 후작?”
명재상이자, 명실상부한 브리티아 제국의 2인자, 엘리제의 아버지인 엘 드 클로랜스 후작이었다!
그의 근엄한 얼굴은 마치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뒤에는 엘리제의 작은오빠 크리스도 서 있었다. 항상 부드럽던 그의 얼굴도 후작과 마찬가지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차가운 인상, 렌 남작도 있었는데 뭔가 평소와 다르게 아버지의 눈치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토, 일요일은 쉽니다.>
============================ 작품 후기 ============================
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