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110화 (110/194)

00110  4-4 운명  =========================================================================

4장 운명 - 5

“전하를 뵙습니다.”

엘 후작은 먼저 황태자인 린덴에게 예를 표했다. 하지만 성의 있는 태도는 아니었다.

예를 표하면서도 후작의 시선은 한 곳. 바로 자신의 딸, 엘리제에게 꽂혀 있었다.

“……엘리제. 내 딸.”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딸을 본 아버지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눈물을 참으려는지, 후작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덧없이 눈물 한 방울이 눈동자에서 흘러내렸다.

목숨보다도 소중한 딸이 전쟁에 참여해 고생하다 적에게 납치당하고, 총까지 맞아 의식을 잃고 있다니.

후작은 너무나 속이 상했다.

“……후작.”

린덴은 엘 후작을 불렀다.

말없이 눈물 흘리는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많이 좋아진 거라고? 이제 금방 깨어날 거라고?

하나도 위로 안 될 것이다. 자신도 그런 말이 하나도 위로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탄식하듯 말했다.

“……미안하오. 다 내 잘못이오.”

사실 그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엘리제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는 미안하다 말했다.

빈말이 아니라, 그녀가 저렇게 누워 있는 것이 정말 미안했다.

그의 잘못도 아니면서, 다 미안했다.

엘 후작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전하께서 이 아이를 위해 하신 일들, 전부 다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

“이 아이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이 아이가 잘못한 것이지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제가 잘못한 것이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터에 오게 하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군 병원 사망률 20배 감소, 등불을 든 여인, 코프스크 대회전 승리의 주역, 대전염병 유행 차단 등.

그녀가 이 전쟁에서 해낸 일이 수도 없이 많건만, 후작에게 그런 것들 따위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딸이 이렇게 누워 있는 것이 가슴이 찢어질 듯 속상할 뿐이었다.

“전하.”

“……말하시오.”

“엘리제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

그 뜻밖의 말에 황태자는 눈을 크게 떴다.

후작은 단호히 말했다.

“더 이상 이 아이를 전장에 두지 못하겠습니다.”

“……알겠소. 그렇게 하시오.”

아버지가 딸을 데려간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더구나 그녀가 이 위험한 곳에서 떠나기를 바라는 것은 린덴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데.’

그녀가 자신에게 하려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계속 신경이 쓰이는데, 론도에 돌아가기 전에는 못 듣게 되었다.

그리고 훨씬 더 큰 문제.

‘보고 싶을 텐데. 어떻게 버티지.’

옆에 두며 이틀에 한 번꼴로 볼 때도 보고 싶어 일이 잘 안 잡혔는데, 아예 본토로 돌아가면 그리움을 어떻게 감당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엘 후작을 말리진 않았다. 자신의 감정보다 그녀의 안전이 당연히 중요하니까.

대신 이렇게 다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대한 빨리 이 전쟁을 마무리 지어야겠군.’

그렇게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제국군의 총사령관 린덴은 빠른 종전을 결심했다.

“의사의 소견으로는 움직이는 데 큰 무리는 없다고 하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엘 후작은 그렇게 말했다.

클로랜스 가문에서 미리 준비해 온 최고 시설의 마차와 의료진이 엘리제의 이송에 동원되었다.

먼저 근처 역으로 이동 후 기차를 통해 가까운 로마노프령에 가 신식 병원에서 치료를 마무리하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배를 타고 론도로 돌아갈 예정이라 한다.

“그러면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엘리제와 엘 후작, 크리스를 태운 마차가 전장을 떠났다.

로열 나이츠, 총기사단의 휘하 연대가 호위를 맡았다.

엘 후작은 과분하다며 사양했으나, 린덴이 억지로 붙였다. 호위대장은 당연히 렌 남작이었다.

“…….”

린덴은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녀가 사라지자 왠지 가슴이 비는 듯한 느낌이 들어 빨리 이 전쟁을 끝내겠다고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했다.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 고개를 돌린 린덴은 문득 중얼거렸다.

“봄이군.”

군데군데 나무에서 꽃이 피고 있었다.

드디어 영원할 것 같은 겨울이 지나고 크림반도에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 론도에서 만날 때는 지금과 다를까?’

마지막 그녀의 눈빛이 떠올랐다.

어딘지 아련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

‘그랬으면 좋겠군.’

아픈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듯.

그녀와 자신의 관계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앞으로는 그녀와 같이 웃고 싶었다.

저 꽃이 피는 것처럼 화사하게 말이다.

4막 She and He, He and She - fin

***

5막 : Love

1장 원죄. - 1

시간이 흘렀다.

황태자 린덴의 전격적인 작전 덕분에 봄이 지나기 전, 반도의 수도 심페폴과 그 인근을 제외한 반도의 모든 요충지가 제국군의 손에 넘어왔다.

공화국군은 보급이 끊긴 채 심페폴에 고립되었고, 여름이 다가오자 도저히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말라비틀어진 채 간신히 제국군에 대항했지만, 사실 저항할 기력도, 의지도 사라진 상태.

그렇게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가올 때, 결국 프랑소엔 공화국의 총통 시몬 니콜라스는 론도 로마노프 황실에 서신을 보냈다.

강화 제의였다.

이로써 반도에서 제국민이 학살당함으로써 벌어졌던 크림전쟁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많은 피를 흘렸지만, 결국 제국의 대승리였다.

처음 제국민 학살을 주도했던, 반도의 과격주의자들을 체포했고, 그 밖에 전략적으로 얻은 소득도 컸다.

우선 흑해(黑海)의 재해권을 완벽하게 얻었다. 이제 서대륙 북동부와 중동 대륙의 바다는 오롯이 제국의 영향에 놓이게 되었다.

두 번째는 공화국에서 받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

그 액수는 전비를 한 번에 만회할 정도로 막대했고, 무리한 원정에 배상금까지 물게 된 공화국은 재정이 뿌리째 흔들렸다.

이는 나중에 철혈(鐵血)의 독재자 시몬 니콜라스의 몰락과 프랑소엔 2공화국이 건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 공화국에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은 다름 아닌 엘리제를 구해준 파비앙 중령이었다.

나중에 그가 공화국의 총통이 됨으로써 제국과 공화국의 관계는 많은 변화를 맞게 되지만,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먼 미래의 이야기.

그렇게 전후 협상 과정 중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었고, 새로운 해가 다가왔다.

그리고 엘리제는 18살 생일을 앞둔 소녀가 되었다.

***

파리스(Paris)와 더불어 서대륙 최고의 도시 론도(Londo). 하지만 문화의 중심이라는 빛의 도시, 파리스가 화창한 것과 다르게 론도에는 늘 안개가 자욱했다.

더구나 겨울이 깊어지니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눈으로 변해, 마차를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서기관님, 오늘은 일찍 퇴근하세요?”

그 론도의 중심, 황궁 옆에 위치한 행정부.

관료들의 업무를 보조하는 일을 하는 젊은 여인이 웃으며 물었다.

서기관이라 불린 젊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부드러운 인상의 청년이었는데, 훈훈하게 잘생겼다.

“네, 어떻게 알았어요?”

“오늘 그날이잖아요.”

“아…….”

청년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일주일에 한 번 카린 베이커리에서 특제 케이크가 나오는 날 맞죠? 그거 다 팔리기 전에 사가셔야 하잖아요.”

“네.”

여인은 부럽다는 듯 말했다.

“저도 서기관님 같은 오빠가 있으면 좋을 텐데. 제 오라비들은 절 보면 못 잡아먹어서 항상 안달이거든요.”

“하하.”

“하긴 저라도 서기관님의 동생분 같은 동생이 있으면 잘해줄 것 같아요.”

그 말에 청년은 미소를 지었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의 동생이 특별하긴 하지. 그의 동생은 바로 다름 아닌 엘리제였으니까!

청년, 크리스는 생각했다. 누구라도 엘리제같이 사랑스러운 동생이 있으면 잘해주지 않고 못 배길 것이라고.

‘아니, 형님 보면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크리스는 막내 여동생에게도 항상 까칠한 형을 생각하며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어쨌든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 서기관님.”

“네?”

젊은 여인이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곧 다른 보직으로 옮기시죠?”

“네, 황태자 전하의 비서관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곧 전하께서 본국으로 귀국하시면 옮기게 될 거예요.”

차후 황제가 될 황태자의 비서관!

어마어마한 요직이자 권력의 핵심 자리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

젊은 나이임에도 능력을 인정받은 덕이었다.

특히 전쟁에 참전하기 전, 엘리제의 취향을 알기 위해 황태자는 도움 안 되는 렌 대신 그를 불러 몇 번 독대한 적이 있는데, 그때 크리스의 능력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축하를 드려야 하는데, 아쉽네요.”

“뭐가 아쉬워요. 오히려 저랑 일하느라 힘드셨을 거면서. 이제 ‘리볼버’는 갈 테니, 편하게 일하세요.”

그 말에 젊은 여인은 당황해 손을 저었다.

‘리볼버’는 부드러운 인상과 다르게 단호하고 확실한 일 처리 때문에 붙여진 그의 별명이었다.

확실히 쉴 틈 없이 몰아치는 그의 일 처리 스타일 때문에 고생하긴 했지만.

“그래도 잘해주셨잖아요.”

크리스는 미소 지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잘 따라줘서 더 고맙고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밥이나 한 끼 해요.”

“……네.”

그러고 크리스는 정장에 코트를 걸치고 우산을 펼치며 사라졌다.

젊은 여인은 작게 중얼거렸다.

“밥 안 사줄 거면서.”

아쉬운 눈으로 크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떻게 1년 내내 눈치를 못 채냐. 내가 얼마나 티를 많이 냈는데. 여동생만 챙기고. 바보, 서기관님.”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

일찍 퇴근한 크리스는 카린 베이커리에 들러 엘리제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샀다.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해 품절 전에 구입할 수 있었다.

‘또 사온다고 뭐라고 하려나?’

엘리제가 그에게 케이크를 사달라고 부탁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이런 궂은 날씨에 오빠가 고생하는 것을 바랄 그녀가 아니니까.

그냥 그가 사고 싶어서 사가는 것이다. 동생이 맛있게 먹는 것이 좋아서.

‘리제.’

크리스는 크림반도에 그녀를 찾아갔을 때를 떠올렸다.

어깨에 총을 맞고 누워 있는 모습이 얼마나 가슴을 찢던지, 아버지와 그 모두 그녀를 전쟁터에 보낸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래도 다행히 잘 회복되었다.

병원에서 집중적인 치료를 받고, 집에 돌아와 푹 요양한 덕이다. 그녀는 후유증 없이 다시 완전히 건강해졌다.

‘물론 건강이란 단어는 그 아이와 어울리지 않지만.’

다 좋아지긴 했지만, 건강하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았다.

원체 약했던 아이니까. 지금도 툭하면 감기에 걸려 골골거렸다.

마음만 같아선 집에서 못 나가게 하고 싶지만, 하고 싶은 일은 뭐가 그렇게 많은 것인지.

동생이 최근 ‘새로 얻은 직장’에서 해내고 있는 일들의 양을 보면, 일벌레라 불리는 자신도 혀가 내둘러졌다.

‘황제 폐하께서도 기뻐하시는 일을 내가 말릴 수도 없고.’

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기특하긴 했지만, 무리는 안 했으면 좋겠는데. 늘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 걱정이 들었다.

너무 무리 말고, 쉬엄쉬엄하라고 만류해도.

괜찮다고 웃으며 답할 뿐이다.

‘오늘도 자정 넘어서까지 안 자면 강제로 불을 꺼버려야겠어.’

그렇게 부드러운 ‘리볼버’는 단호하게 생각하며 클로랜스 가문의 저택에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공자님?”

“응, 리제는? 아직 안 돌아왔나?”

크리스는 오자마자 동생부터 찾았다.

“아닙니다. 오늘 공식 휴무라서. 출근 안 하셨습니다.”

“그러면? 방에서 일하나?”

그 물음에 가문의 기사, 벤톨 경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응, 왜? 무슨 일 있어?”

하지만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근처 정원에서 엘리제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꺄악!”

“……?!”

크리스는 깜짝 놀랐다. 동생이 비명을?

“리제!”

그는 귀하게 사온 케이크를 대충 팽개치고 다급히 소리가 들린 곳으로 달려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리고 정원에 도착한 크리스는 맥이 풀렸다.

뭐야.

“하, 하지 마요!”

“뭘 하지 마, 리제?”

“눈 뿌리면 차갑단 말이에요!”

정원엔 가디건을 걸친 하얀 소녀와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모델 같은 여인이 있었는데, 서로 정원에 쌓인 눈을 뿌리며 놀고 있었던 것이다.

고고하면서, 자신감 넘치는 인상의 여인은 씨익 웃으며 양손에 눈을 들고 엘리제에게 다가갔다.

엘리제는 겁먹은 토끼처럼 뒷걸음질 쳤다.

“하지 마요. 언니. 응?”

============================ 작품 후기 ============================

내일 26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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