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1 5-1 원죄 =========================================================================
1장 원죄 - 2
“리제가 먼저 했잖아?”
“그, 그건 장난으로 조금…….”
“하여튼 이리로 와.”
“꺄악! 싫어요!”
여인은 매정하게 눈을 뿌렸고, 눈을 뒤집어쓴 엘리제는 자신도 양손으로 눈을 뿌렸다.
하지만 두 눈 질끈 감고 허우적거리는데 맞을 턱이 있나? 눈싸움은 여인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크흠. 크흠!”
동생이 가련하게 당하는 모습을 불편하게 보던 크리스는 헛기침하였다.
그제야 그의 존재를 눈치챈 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오빠!”
이제 그를 오라버니가 아닌, 오빠라 부르게 된 엘리제가 활짝 웃으며 뛰어왔다.
눈에 뒤덮여 완전 하얀 눈 토끼가 된 엘리제의 몸을 털어주며 크리스가 잔소리했다.
“누가 추운데 이렇게 나와서 놀래? 또 감기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하지만 간만에 언니가 와서.”
“또 감기 걸리면 그때는 밤에 논문 쓰는 거 금지야.”
“안 돼요! 지금 쓰고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 논문인데…….”
하지만 크리스는 부드러운 얼굴로 칼날같이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돼.”
그러고 그는 고개를 돌려 엉거주춤 서 있는 도도한 인상의 여인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유리엔.”
“……그러게요. 일찍 오셨네요.”
어딘가 불편한 대답에 크리스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여인의 이름은 유리엔 드 차일드.
클로랜스 가문의 가장 큰 적인 차일드 후작가의 적녀이자, 차기 당주(當主) 후계자였다!
‘어쩌다 둘이 이렇게 친해진 거야.’
크리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크림반도에서 귀국한 후 엘리제와 유리엔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리제가 전쟁 때 전(前) 후계자였던 알버트 경의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했지. 그것도 자기의 목숨을 걸고 수술해서.’
그 일로 암셀 후작은 엘리제를 몇 번이고 초대해 감사를 표시했다.
정적의 딸이었지만, 엘리제의 목숨을 건 헌신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며 엘리제는 유리엔과도 계속 만나게 되었고, 그렇지 않아도 길 건너 이웃사촌(?)이었던 그녀들은 마음도 잘 통해 금세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난 불편하단 말이지.’
크리스는 씁쓸히 생각했다.
지금은 전쟁 때문에 잠잠하지만, 이제 곧 론도에는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황태자와 3황자.
황위를 놓고 다투는 형제들 간의 전쟁 말이다.
그리고 그 전쟁은 총칼을 들고 하는 싸움보다 더 슬프고 괴로울지도 몰랐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눈싸움은 제가 시작한 것이 아니에요. 리제, 동생이 먼저 시작했어요.”
그 말에 크리스는 추운지 얼굴이 빨개진 엘리제를 바라봤다.
“엘리제?”
그 시선에 켕기는지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냥 전…… 장난친 건데…….”
크리스는 한숨을 내쉬고 유리엔에게 말했다.
“어쨌든 추운데 들어가시죠. 케이크나 먹읍시다.”
***
그들은 접객실로 들어가 따뜻한 난로 앞에 몸을 녹였다.
그러고 크리스가 사온 케이크와 엘리제가 달인 차로 티타임을 가졌다.
유리엔은 차향(茶香)을 맡으며 감탄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리제의 차는 정말 훌륭한 것 같아.”
“그래요, 언니?”
“응, 동방의 귀인들이 직접 끓인 것 같아. 난 아무리 해도 이렇게 안 우려지던데 어떻게 하는 거야?”
엘리제의 다도(茶道)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전 삶, 황후로 살며 부단한 노력을 한 덕분이었다.
“천하의 데임 클로랜스가 설마 다도까지 훌륭한 레이디라고 누가 상상하겠어? 너무 완벽하잖아.”
“어, 언니.”
민망해하는 엘리제를 보며 유리엔은 쿡쿡 웃었다.
“물론 눈싸움을 좋아하는 소녀란 것도 상상 못하겠지만 말이야. 제국 최고의 의료기관인 황실십자병원의 수석 교수이자 신임 황궁 어의(Royal Physician)의 취미가 눈싸움이라니.”
“아, 아니에요! 오늘은 그냥 장난으로…….”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만약 또 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안 해요!”
당황하는 엘리제를 보며 유리엔은 소리 내어 웃었다.
현재 제국의 가장 이름 높은 명사(名士)가 이렇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라니. 참, 신기한 일이다.
‘뭐, 신기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지.’
저 크리스만 해도 집에선 마냥 좋은 오빠지만, 행정부에서의 별명이 ‘리볼버’다.
그리고 그 별명은 귀족파가 지은 별명이다. 저 크리스가 추진한 정책으로 귀족파가 손해 본 게 한둘이 아니었다.
‘하아.’
한 가지 떠오른 생각에 유리엔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뭐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언니?”
“아, 아니야. 일은 할 만해?”
“네, 너무 좋아요.”
엘리제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유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피는 한 방울도 못 보겠는데.”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엘리제는 최근 새로운 직장을 얻었다.
아버지인 엘 후작은 그녀가 다친 후 의사 일을 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렇지 않아도 약한데 이제 절대 무리하는 것을 보지 않겠다고.
그래서 원래 직장인 테레사병원에서도 해고당하고, 강제로 요양하던 중 의외의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엘 후작도 차마 반대하지 못할 곳에서.
“그나저나 참 대단해. 최연소 황실십자병원의 수석 교수 겸 황궁 자문 어의라니.”
그녀에게 스카우트 제의가 온 곳은 황실 직속 의료기관인 황실십자병원과 황궁에서였다!
그들은 무려 제국 최고 병원의 수석교수직과 황제를 직접 진료하는 황궁 자문 어의직을 제안했다.
엘리제는 당시를 생각했다.
‘나도 깜짝 놀랐지.’
아무리 그녀의 명성이 높다고 해도, 18살도 되기 전에 수석교수직과 황궁 자문 어의라니.
유례가 없던 일이다.
하지만 배경을 알고 이해했다.
‘폐하께서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지시다니.’
황제 민체스터의 건강이 갑작스레 안 좋아진 것이다.
황궁 어의이자, 황실십자병원의 병원장인 밴 자작은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황제를 치료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최고의 의사가 필요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선택된 것이 바로 엘리제였다.
그녀가 지금까지 이룩한 의학적 업적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반대하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밴 자작은 한마디로 반대를 잠재웠다.
‘그러면 자네들이 폐하를 치료할 수 있겠는가?’
그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의외는 폐하의 반응이었지.’
그녀가 의사가 되는 것을 그토록 이나 반대하던 황제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 드셨는지, 별 반대 없이 승낙했다.
‘영애가 어의라고? 좋군. 사실 린덴, 그 아이도 워낙 부탁하고 나도 생각이 바뀌어 영애에게 ‘선물’을 하나 주려 하기도 했었고.‘
이런 아리송한 말도 하였다.
무슨 선물인지 물었으나, 웃으며 이렇게만 답하셨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전례가 없었던 일이라 황궁의 궁내부장이 분명 반대할 것이고, 법적 절차가 있어 처리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네. 허허. 나도 살면서 내가 이런 법안을 발의하게 될 줄은. 하여튼 조금만 기다리게.’
‘도대체 뭘까?’
그때, 유리엔이 말했다.
“황실십자병원에서 수석교수로 일하는 거 힘들지 않아?”
“즐거워요.”
엘리제의 답에 유리엔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 워낙 고명한 의사가 많아서 어린 영애가 왔다고 싫어하지는 않아?”
“뭐, 그런 분들도 계시긴 해요.”
엘리제는 여상이 답했다.
당연히 모두가 그녀를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명성이 높다지만, 일단 너무 어리지 않은가?
편견을 가지고 보는 이들도 당연히 있었다.
다만 이제 곧 황태자비가 될 지고한 신분의 그녀이기에 대놓고 말을 못할 뿐이다.
“그래도 괜찮아요.”
‘그런 시선은 익숙하니까.’
엘리제는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한국에서 서울대 의대에 최연소 교수가 됐을 때도 그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가 많았다.
‘어차피 그런 시선이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없어질 테니.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때 그녀가 그들에게 답으로 보여준 것은 뛰어난 실력이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뛰어난 실력을 보이니 그녀를 배척하던 이는 모두 사라졌고, 그녀를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그건 그녀가 적을 만들지 않는 공손한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긴 하다.
평소 호감 가는 태도에 뛰어난 실력이 조화를 이루니,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티 나게 나를 못마땅해하는 교수들이 몇 명 있긴 하지만…….’
최선을 다하다 보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라 생각했다.
엘리제의 그런 의연한 태도에 유리엔은 대단하단 얼굴을 했다.
저렇게 작고 여린 소녀가 어떻게 저렇게 강인한지 감탄이 나왔다.
“이제 슬슬 일어나 봐야겠다.”
“가시게요?”
“응, 오래 있었잖아. 가봐야지.”
엘리제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또 놀러 오실 거죠?”
유리엔은 그녀가 아쉬워하는 얼굴이 왠지 강아지 같다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나야 괜찮은데, 리제 네가 항상 바쁘잖아. 오늘도 간신히 쉬는 거면서.”
“다음 쉴 때 또 연락드릴게요.”
“그래, 그런데 다음에 시간이 나도 네가 날 만날 수 있을까?”
“네?”
유리엔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 곧 전하 오시잖아. 세기의 로맨티스트 황태자 전하 말이야.”
“……!”
그 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 그건…….”
엘리제가 공화국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황태자가 그녀를 구하러 간 것은 제국 전체에 널리 퍼졌다.
자신의 여자를 위해 죽음도 불사한 그의 행동에 제국의 모든 소녀가 감동했고, 졸지에 그는 평소의 딱딱한 이미지와 다르게 세기의 로맨티스트가 되어버렸다.
‘부럽네.’
유리엔은 속으로 잠시 씁쓸히 생각했다.
그녀는 남몰래 황태자를 연모하고 있다. 물론 이루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고, 속으로만 삭이고 있는 감정이지만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태연히 물었다.
“오래 못 봤잖아. 거의 10개월은 되지 않았나? 보고 싶지?”
“…….”
엘리제는 대답하지 않고 얼굴만 붉혔다.
‘전하.’
그녀는 무뚝뚝한 얼굴의 그를 떠올렸다.
유리엔이 말이 맞았다.
그가 보고 싶었다. 너무나.
오죽하면 꿈에서도 그를 그리워할까.
이제 그는 꿈에서 그녀에게 단두대의 칼날을 내리지 않았다.
그저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
황실십자병원은 황궁에 바로 붙어 있었다.
원래 설립 목적이 황족과 고위 귀족들을 진료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제와 황족을 진료하는 어의는 모두 황실십자병원의 병원장이나 수석교수직을 겸임했다.
마침 때맞춰 수석교수였던 게임 경이 개인 사정으로 사임해 그 자리를 엘리제가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신임 수석교수인 엘리제.
그녀는 황실십자병원의 수술실에서 한창 수술에 열중 중이었다.
“타이(Tie), 실 주세요.”
당연히 어의라고 황제와 몇 안 되는 황궁의 황족만 진료하는 것이 아니다.
황실십자병원의 교수로 일하며 고위 귀족들의 치료도 같이 병행한다.
이는 황족만 전담하는 동방의 어의와는 다른 모습으로, 오히려 현대 지구의 대통령 주치의와 비슷했다. 주로 명문 대학의 명망 높은 교수가 맡게 되는 대통령 주치의들도 본인의 진료를 같이 병행했으니까.
“여기 있습니다, 교수님.”
엘리제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춤을 췄다.
그리고 질끈 묶어지는 동맥.
그녀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메스가 움직이며 위 주변의 림프절들을 툭툭 쳐 내었다. 위를 잘라내기 전 시행하는 D2 절제였다.
엘리제가 지금 집도하고 있는 수술은 다름 아닌 위암 환자의 위절제술.
‘위암 환자에서 재발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림프절을 최대한 많이 쳐내야 해.’
암세포는 전이가 일어나기 전, 가장 먼저 근처의 림프절로 이동한다.
그러니 재발을 막기 위해선 림프절을 최대한 제거해야 하는데, 문제는 테크닉이었다.
위 근처 3㎝만 절제하는 D1과 다르게 D2 절제는 현대 지구의 미국의 의사들도 어려워하는 절제법이다.
하지만 위암 수술의 최고봉은 위암 유병률이 높은 한국과 일본의 의사. 그녀는 그중에서도 괴물이라 불리던 서젼(Surgeon)이었다.
황실십자병원의 교수들은 감히 시도할 생각도 못할 위치의 림프절들을 가벼운 손놀림으로 툭툭 쳐 내었다.
“지혈 포셉(철제 도구) 주세요.”
“네, 교수님!”
거침없는 수술 진행.
쾌속하게 림프절 D2 절제/를 끝내고 위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탈칵. 철컥. 찌익.
고요한 수술방에 그녀의 손이 자아내는 소리만 들렸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한편 수술방에 있던 모두가 경악해 그녀의 수술을 바라봤다.
이곳은 제국 최고의 의료 기관, 황실십자병원이다.
그런 만큼 최고의 의료진이 최고 수준의 수술을 한다. 따라서 어지간한 실력에는 놀라지도 않는다.
따라서 저 소문이 자자한 천재 소녀, 등불을 든 여인이 교수로 온다고 했을 때도 다들 코웃음 쳤었다.
잘해봤자 얼마나 잘하겠어.
당연한 의심이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해온 헌신과 업적들은 폄훼할 거리가 없었지만, 수술 실력도 그만큼 어마어마할 것이라 상상하긴 어려웠다. 일단 나이가 너무 어렸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다음 편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