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112화 (112/194)

00112  5-1 원죄  =========================================================================

1장 원죄 - 3

‘어떻게 이런 수술을? 말도 안 돼?’

참관차 들어온 피터 교수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지금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황실십자병원의 차기 수석교수감으로 여겨지던 명의인 그가 평생을 추구하던, 아니, 그보다 더 드높은 경지의 수술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봉합실 주세요.”

어느새 위의 전방부 1/3을 잘라 내, 위아전절제술을 마무리한 엘리제가 실을 부탁했다.

그러고 소장을 끌어당겨 길을 내, 잘라낸 위와 연결하는 재건술을 시행했다.

‘Roux-en-Y 재건술!’

피터 교수는 다시 한 번 경악했다.

Roux-en-Y 재건술!

이전 의사 자격시험에 엘리제가 답으로 적어낸 수술법이었다.

당시 그녀가 적어낸 획기적인 답안은 학회에 거센 파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수술을 실제로 시행한 의사는 없었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너무 고난이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저 소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수술을 시행하고 있었다. 아무런 주저도 없이, 낯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태연하게!

‘믿을 수가 없구나. 믿을 수가 없어.’

피터 교수는 무려 의학에 30년의 세월을 바친 의학자.

이 순간, 그는 그레이엄 남작이 엘리제를 보고 처음 느꼈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어떻게 저렇게…….’

하지만 자신의 시간을 무상하게 만드는 소녀의 실력에 좌절하거나 질투를 하진 않았다.

비슷한 실력이어야 좌절하고 질투하는 것이다. 저 압도적인 실력 앞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그저 경외였다.

그리고 또 하나 느끼는 감정은 기대감.

앞으로 저 소녀와 함께하는 황실십자병원 생활에 얼마나 놀라운 일이 많을까 기대가 되었다.

‘저런 분이 황태자비가 되다니.’

그런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저런 희대의 천재는 병원에만 가둬서 수술만 시켜야 하는데!

“클로즈(Close)합니다.”

수술을 끝내는 선언이었다. 어느새 재건술을 끝내고, 지혈까지 마무리 한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어시스턴트들이 우렁차게 말했다.

젊은 의사가 공손히 말했다.

“마무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교수님.”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에 젖은 장갑을 벗었다.

“오늘 수술은 이걸로 끝인가요?”

그녀는 수술장에 난 창으로 밖을 보았다. 이미 시간이 늦어 어둑어둑한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다.

“네, 다 끝났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뒤의 처치를 부탁할게요.”

“네, 교수님!”

그녀가 수술복 위에 하얀 가운을 걸치고 수술장을 나가자 남은 인원들이 혀를 내둘렀다.

“방금 데임께서 수술하시는 것 봤어? 난 이 수술을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다는 것 처음 알았어.”

“그러게. 나도 깜짝 놀랐어. 어떻게 저런 손놀림이 가능한 것이지?”

모두가 경악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런데 누군가 말했다.

“이제 곧 황태자 전하와 약혼하고 결혼하시면 의사는 그만 두시겠지?”

그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원체 압도적인 실력에 깜빡깜빡 잊고 있지만, 그녀는 예비 황태자비였다.

황후가 되고 나서도 의사 일을 계속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쉽다. 계속 같이 일하면서 배우고 싶은데.”

“그러니까. 수술 하나하나가 예술인데.”

“황후가 되신 다음에도 의사 일을 할 수는 없겠지?”

“당연히 안 되겠지. 지금까지 역사상 황후가 다른 직업을 가진 것 봤어?”

“하지만 제국법에 황후가 다른 직업을 가지면 안 된다는 법이 있어?”

“몰라. 어쨌든 안 되지 않을까?”

모두가 아쉬운 얼굴로 그녀가 사라진 수술 문을 바라봤다.

***

엘리제는 가운을 걸친 채 자신에게 주어진 교수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4시 30분. 간만에 조금 시간이 남는다.

‘30분 정도 시간이 있으니…….’

펜을 들었다.

그녀는 워커홀릭답게 요즘 거의 온종일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퇴근 시간은 보통 저녁 10시쯤?

아버지가 너무 싫어해서 그 시간이 넘으면 집에 가서 남은 일을 처리했다.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녀지만, 그래도 꼭 빠지지 않고 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아직 크림반도에 있는 이들을 위한 편지 쓰기였다.

‘먼저 큰오라버니.’

그녀는 렌을 위해 편지를 썼다.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묻고, 혹시 궁금할까 봐 집안의 여러 일을 적었다.

봉투에 편지를 넣으며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여동생이 이렇게 편지를 써서 보내주는데 답장은 한 번도 안 하고.’

큰오라버니답달까?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단 한 번도 답장이 없었다.

‘다음엔 밀.’

밀. 3황자는 렌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오히려 먼저 그녀에게 끝없이 편지를 보냈다.

-답장해! 빨리 보고 싶다.

이런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덕분에 거의 펜팔 하는 수준으로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아 그녀의 방에는 그가 보낸 편지가 가득히 쌓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전하…….’

두근.

그를 떠올리자 그녀의 가슴이 뛰었다.

앞에 둘과는 달랐다. 단순히 편지지에 펜을 가져가는 것일 뿐인데, 가슴이 설레었다.

보고 싶었다.

‘전하.’

처음엔 생각했다.

오랫동안 떨어져서 못 보고 있으면,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생각났다.

그녀는 천천히 글씨를 적어 내려갔다. 앞의 두 명에게 적을 때와는 전혀 다른 정성으로.

-전하께 엘리제가.

여기 론도는 추운데, 크림반도는 안 추우신가요?

거기까지 쓴 엘리제는 펜을 멈추었다.

‘안 추우신가요?’라니. 뭔가 없어 보이는 표현이잖아. 뭔가 더 고풍스럽고 예쁘게 표현할 수는 없을까?

그녀는 편지지를 구겨 버리고 다시 쓰기 시작했다.

-전하께 엘리제가.

이곳은 눈이 많이 왔는데, 그곳도 많이 왔나요?

아니야. 이것도 아니야.

더 없어 보이잖아.

“난 왜 이렇게 문장력이 없을까.”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글씨체도 못나게 삐뚤삐뚤. 다른 귀족가의 영애들 보면 글씨도 예쁘고, 문장도 굉장히 고풍스럽게 쓰던데.

“이런 편지를 전하께 보낼 수는 없어.”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없는 문장력이 갑자기 생기겠는가? 아무리 써도 조악한 문장만 나왔다.

‘나 그래도 논문은 잘 쓰는데.’

엘리제는 울상을 지었다.

차라리 도표와 통계로 이루어진 의학 논문을 한 편 완성해서 보내는 게 쉬울 것 같았다.

‘매번 이래서 전하께만 편지 못 보냈는데.’

지난번 그에게서 온 편지가 떠올랐다.

-잘 지내나? 몸은 건강한가? 곧 보자.

황태자다운 짧은 문장. 그래도 워낙 필체가 강렬하고 품격 있어 자신과 다르게 남성적이고 멋진 느낌이 들었다.

문제는 마지막에 덧붙인 추신.

Ps. 그런데 왜 매번 나에게만 편지를 안 하는 것이지?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라고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 관심도 없는 큰 오라비 렌과 친구인 밀에게 보내는 편지와 그에게 보내는 편지가 어떻게 같겠는가?

그가 자신의 글씨를, 문장을 하나하나 볼 것이란 생각이 드니 정성 들여 쓰고 싶었고, 예쁘고, 좋은 문장으로 보내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 덕분에 매번 쓰레기통에 편지지만 쌓이고, 정작 편지는 못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편지 말고, 선물이라도 보낼까.’

그렇지 않아도 그가 크림반도에서 추울까 스웨터를 짠 적이 있다.

하지만 하늘이 내린 수술 솜씨를 가진 그녀이지만, 자수 솜씨는 꽝이었다.

어떻게 완성하긴 완성했는데 도무지 사람이 입을 옷이 아니었다.

‘하아. 이번엔 꼭 우아하게 써서…….’

그런데 엘리제가 한참을 편지지와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그리고 들어온 인물을 본 엘리제는 눈을 크게 떴다.

황제를 최측근에서 모시는 시종장 밴트 경이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시죠?”

“폐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데임.”

“……?”

“폐하께서 데임을 잠시 뵙자고 하셔서요.”

“……?”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황궁 어의가 된 그녀는 최근 매일 황제와 진료를 위한 면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또?

“아,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며 밴트 시종장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줄 ‘선물’도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고 보니 황제는 그녀에게 ‘선물’을 준다고 했었다.

“기대하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영애가 일평생을 통틀어 가장 바라던 것이니 분명 기뻐할 거라고.”

그 말에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선물인 거지?

***

황실십자병원과 황제가 머무는 궁은 지척이었다. 유사시에 의사들이 곧바로 달려갈 수 있기 위한 건물 배치였다.

저녁이 가까운 시간이건만, 황제 민체스터는 집무실에서 업무에 열중이었다.

생각해 보면 민체스터는 자는 시간과 대신들을 만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집무실에 있었다.

마치 서류 보는 기계인 것처럼 항상 일만 했다. 그녀는 그가 개인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미식을 탐하지도, 술을 마시지도, 여인을 찾지도, 오락을 즐기는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권력을 누리지도 않았다.

그저 정말 일만 했다. 어쩔 때 보면 그는 황제가 아니라, 제국이란 거대 기계의 나사부품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황제란 나사부품 말이다.

‘폐하.’

엘리제는 심란한 눈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황제는 그녀를 아꼈다. 그래서 가족으로 맞으려 했고, 그녀의 가장 큰 소원인 의사의 길을 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 당시엔 그게 얼마나 끔찍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황후가 되면 의사 일을 못 하는 게 아쉽지만.’

아쉽다?

아니, 사실 그런 단어로 표현할 말은 아니었다.

이제 황태자를 향한 마음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의사 일을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새가 날개를 잃으면 이런 아픔일까? 마음이 도려내지는 것처럼 아팠다.

다만 피할 수 없기에 억지로 생각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사실 최근 무리하는 것은 그래서였을지도 몰랐다. 앞으로는 못한다고 생각하니 마지막 불꽃이라도 태우려는 마음으로.

‘하지만…….’

그녀는 최근 반년 만에 훌쩍 살이 빠진 황제를 바라봤다.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 민체스터는 몸이 쇠약해지며 기력이 크게 떨어졌다.

저렇게 약해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안 좋았다. 여러 사정이야 어쨌든 이전 삶에서도, 이번 삶에서도 자신을 많이 아끼는 그였기에.

밴트 시종장이 기척을 알렸다.

“폐하, 데임 클로랜스가 왔습니다.”

“오, 왔는가?”

황제는 서류에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어의가 아니라, 마치 딸이 온 듯 반기는 모습이었다.

엘리제는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바쁜데 내가 불렀군.”

“아닙니다, 폐하. 몸은 괜찮으십니까?”

“영애가 처방한 약을 먹고서 많이 괜찮아졌어. 고맙네. 혈당 수치도 많이 좋아지고.”

황제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피로가 느껴지는 얼굴에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27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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