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3 5-1 원죄 =========================================================================
1장 원죄 - 4
‘지금 폐하께서 앓고 계신 병이 도대체 뭘까? 다른 증상은 없고, 기력만 계속 없어 하시니.’
그녀도 황제의 병을 정확히 진단 못 하고 있었다.
‘의심이 가는 병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의심 가는 질환은 많았다.
몸 깊은 곳 숨어 있을 정체모를 암, 자가 면역 질환, 희귀한 내분비 병, 혈액병 등등…….
이 모든 질환이 다 황제와 같은 증상을 나타낼 수 있었다.
‘현재 지구라면 모조리 다 검사를 해보아서 진단해 냈을 텐데.’
그녀가 지구에 있었다면, 병을 진단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검사에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저런 병들은 현대의 진단 도구들 없이 밝혀낼 수가 없었다.
‘보전적인 처치밖에는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
그녀는 답답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명확한 진단을 모르니, 근본적인 치료를 할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보조적인 치료들뿐.
그것만으로도 황제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긴 했지만, 근본적인 치료를 못하니 상태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그래, 요즘 하고 있는 여러 일은 잘되고 있나?”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폐하.”
그녀가 공손히 답했다.
“부족하긴. 기적의 천사라 불리는 영애가 부족하면 다른 이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황제는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에 엘리제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기적의 천사라니, 과분합니다.”
기적의 천사는 크림전쟁 때 그녀의 활약을 본 이들이 지어준 또 하나의 별명이었다.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원래도 몸이 약한 것으로 아는데, 그러다 건강 상할까 걱정이 돼. 재상이 영애 걱정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지?”
“네, 폐하.”
그렇게 둘은 두런두런 대화하였다.
민체스터는 어의를 대한다기보다는, 조카딸을 대하듯 그녀를 편안하게 대했다.
엘리제는 한결같이 공손히 답하며, 황제가 본론을 꺼내길 기다렸다.
그녀가 지금 진행 중인 여러 일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다 황제가 문득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영애. 내가 바쁜데 계속 쓸데없는 말만 했군.”
“아닙니다, 폐하.”
“그래, 내가 왜 영애를 불렀는지 궁금하지? 주고 싶은 ‘선물’이 있어서 불렀네. 아마 크게 기뻐할 거야. 영애가 가장 바라던 것이니.”
그러며 황제는 웃었다.
“내가 이 ‘선물’을 영애에게 주기 위해 궁내부장과 얼마나 다퉜는지 모르네. 절대 안 된다는 것을 간신히 고쳤어.”
그 말에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선물을 말하는 것이지? 만약 보석 같은 거라면 필요 없는데.
하지만 황제는 바로 선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잠시 말을 돌렸다.
“그 전에 영애, 내가 묻고 싶은 것이 있네.”
“네, 폐하. 말씀하시옵소서.”
“영애는 나중에 황후가 되면, 어떤 황후가 되고 싶은가?”
“……!”
그 말에 엘리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황후.
그녀에게 그 단어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전 삶, 황후가 되어 파국을 맞았고, 그래서 이번 삶, 황후가 되지 않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녀는 황후가 될 것이다. 더는 그를 부정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대신.
엘리제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저는 황후가 되기에 부족한 여인입니다.”
“흐음……?”
황제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부족하면 도대체 누가 황후에 어울린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진심이었다.
‘죽어라, 악녀!’
이전 삶을 떠올렸다.
당시 그녀는 최악의 황후였다. 린덴과의 사랑이 엇갈려 삐뚤어졌다고 하지만, 당시의 죄악들은 부정할 수 없는 그녀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생각했다.
“부족하므로 노력하겠습니다.”
이전 삶을 절대 반복하지 않겠다고.
오히려 이전 삶과 정반대의 황후가 되겠다고.
“부족함을 잊지 않고, 항상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스스로 높아지려 하지 않고, 낮아지며 다른 사람들을 위한 황후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이 제국에 부끄럽지 않은 진정한 퍼스트레이디(First Lady)가 되고 싶습니다.”
퍼스트레이디.
첫 번째 여성. 가장 존귀한 여성을 뜻하는 단어이다.
그녀는 이전 삶, 제국의 퍼스트레이디였다.
하지만 정말 존귀한 여인이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 높인다고 존귀해지는 것이 아니니까. 오히려 그때 그녀는 추했다.
대신 이번 삶에서는 진정한 퍼스트레이디가 되겠다. 그녀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존귀한 여인이 말이다.
‘잘할 수 있을지는 자신 없지만.’
그래도 엘리제는 의지를 다졌다. 노력할 것이다.
“하하, 역시 등불을 든 여인다운 말이군. 기특해. 아주 기특해.”
황제가 마뜩한 표정을 지었다.
기특한 딸을 보듯,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영애.”
“네, 폐하.”
“지금까지 미안했네.”
“폐하?”
놀란 엘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황제인 그가 갑작스레 사과라니?
“내가 영애의 뜻도 헤아리지 않고, 너무 막무가내로 결혼을 밀어붙였지.”
“…….”
황제의 얼굴이 씁쓸해졌다.
“사실 개인적인 이유가 있긴 있었네. 영애를 너무나도 가족으로 맞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니 이해해 주기 바라네.”
“……폐하.”
엘리제는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때, 황제가 그녀에게 불쑥 서류를 내밀었다.
“폐하?”
“선물이네. 읽어보게.”
의아한 마음으로 서류를 읽은 엘리제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폐, 폐하…… 이, 이것은……?”
“왜? 마음에 안 드나?”
빼곡한 글이 적혀 있는 서류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궁내법 개정안>
발의자 : 황제 민체스터 드 로마노프,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
개정 내용 : 제국력 285년 부로 황후의 위(位)에 오를 여인은 황제의 재가하에 다른 직업을 겸업할 수 있다.
단, 내명부 업무 수행에 문제가 없는 범위하에서 허용한다.
“……!”
이 말도 안 되는 법은 단 한 명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 누가 황후를 하며 겸업을 바라겠는가?
바로 의사의 길을 바라는 그녀를 위해 개정한 것이다!
“폐, 폐하……? 어째서……?”
“뭐, 사실. 짐이 처음 생각한 것은 아니었고. 린덴, 그놈이 하도 편지로 졸라대서. 그리고 나도 크림반도에서 영애가 해낸 일들을 보고 조금 생각이 바뀌었네.”
그러며 그는 징긋 미소를 지었다.
“내 개인적인 욕심으로 영애가 의사가 되는 것을 반대하긴 했지만. 사실 영애 같은 의사를 내명부에만 묶어두는 것도 조금 아까운 일 아니겠나. 앞으로 어떤 일들을 더 해낼 수 있을지 모르는데 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영애 본인이 그토록 바라기도 하고 말이야.”
“…….”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뭐라고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뚜욱.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그녀의 눈동자에서 흘러내렸다.
“폐, 폐하…….”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봇물이 터지듯 쏟아나왔다. 이 갑작스러운 일에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간 얼마나 속상해했는가?
결국,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기며,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지만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황태자를 받아들이기로 했음에도, 의사를 포기해야 하는 것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계속 무거웠다.
지금이야 의사 일을 하고 있어서 괜찮지만, 막상 결혼해 새장 속에 갇힌 새 신세가 되면 어떻게 할지 막막했었다.
그런데 이런 뜻밖의 선물이라니?
‘전하…….’
분명 린덴의 마음이리라.
그녀도 알고 있다.
황태자는 자신이 의사 일을 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누가 좋겠는가? 본인이 사랑하는 여인이 험한 일을 하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원하니까. 이런 무리한 일을 해준 것이다.
황궁에는 당연히 지엄한 법도가 있다.
이건 그 법도를 완전히 뭉개 버리는 일이다. 황후가 의사 일을 겸업하다니. 말이 되는가? 모르긴 몰라도 뒤에서 굉장한 잡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했다. 오로지 그녀를 위해서.
‘전하.’
그런 생각이 들며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오늘따라 그가 더 보고 싶었다.
“끄윽, 흐윽. 죄, 죄송합니다, 폐하. 추태를 보여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황제 앞이다. 엘리제는 허겁지겁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민체스터는 말없이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기쁜가?”
“네, 폐하.”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게 의학의 길은 화가에게 그림과 같고, 음악가에게 음악과 같다. 아니, 심하게 말하면 노름꾼의 도박이나 마약 중독자에 마약과도 같았다.
즉, 결코 떨어뜨릴 수 없는 것이었다.
민체스터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고집 때문에 저 여린 소녀를 지금까지 마음 아프게 했다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그렇다고 황궁의 일에 소홀하면 안 되네. 개정안을 보면 알겠지만 황궁의 일에 소홀하지 않은 범위에서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엘리제는 빨개진 눈으로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런 것 따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몸이 가루가 되어 부서지더라도 해낼 것이다.
“영애.”
“네, 폐하.”
“선물은 마음에 드는가?”
“네, 그렇사옵니다.”
엘리제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든다 뿐이겠는가? 그녀에게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통째로 주는 것보다 백배는 더 큰 가치가 있는 선물이었다.
“선물이 마음에 들면 짐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는가?”
“부탁…… 말입니까?”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大)브리티아 제국의 황제인 그가 자신에게 무슨 부탁을?
“뭐, 어려운 부탁은 아니네. 나쁜 부탁도 아니고.”
왠지 이전 자신이 전쟁에 참전할 때 황제에게 했던 거짓말과 비슷한 말투였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선물을 주었는데, 무슨 부탁을 못 들어주겠는가?
“말씀하십시오. 능력이 된다면,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그러며 황제는 어딘가 쓸쓸한 말투로 말했다.
“앞으로 잘해주게.”
“네?”
“그냥.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말이야. 린덴을. 그리고 미하일을 잘 부탁하네.”
“……!”
엘리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황제는 지금 자신의 사후를 염려하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폐하.”
“알아. 내가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겠지. 영애의 치료를 받으니 몸도 이전보다 많이 좋아졌고 말이야. 하지만…… 세상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것 아닌가.”
황제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전 세계에 영향을 떨치는 제국을 경영하는 거인(巨人)이 아니라, 힘없이 작아 보였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하는 부탁은 아니야. 그냥. 잘 부탁하네.”
“……네, 폐하.”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왜일까. 가슴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그래, 고맙네. 난 조금 졸려서 잠시 자고 일어나야겠군. 내일 또 보도록 하게.”
“네, 폐하. 평안히 쉬시옵소서.”
그러고 엘리제는 조심이 뒷걸음질 쳐 황제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홀로 남은 민체스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는 책상의 서랍을 열어 액자를 꺼내었다.
대제국의 황제와 어울리지 않는 그 빛바랜 액자에는 4명의 인물을 그린 초상화가 담겨져 있었다.
젊은 시절의 민체스터와 어린 린덴, 그리고 검은 머리의 이름 모를 여인과 어린 소녀였다.
초상화 속 10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는 흑발에 금안이었는데, 분위기가 차분해 방금 나간 엘리제와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녀를 안고 있는 흑발에 푸른 눈을 가진 조용한 인상의 여인.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소?”
민체스터는 그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황후.”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보고 싶구려.”
눈을 감은 민체스터는 꿈을 꾸었다.
대략 30년 전.
아직 이십 대의 젊은 청년. 황태자였던 시절.
원죄(原罪)가 시작되던 날이었다.
***
론도의 피카딜리 거리.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피카딜리 거리는 론도 최고의 번화가였다.
수많은 공연과 카페, 술집에는 항상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그 피카딜리의 가장 고급스러운 카페 3층.
2명의 남자와 1명의 여자가 두런두런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약간 가벼운 인상의 사내가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민체스터. 그러니까 들어봐. 내가 지난밤 체스터 자작가의 영애와 말이야.”
“엘!”
하지만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아리따운 소녀가 날카롭게 그의 말을 끊었다.
엘이라 불린 청년은 찔끔하여 소녀를 바라봤다.
“왜? 마리엔?”
“황태자 전하께 민체스터가 뭐예요! 도대체 예의범절이라곤!”
씩씩거리며 말하는 소녀는 굉장히 아름다웠다. 화려한 금발에, 호수 같은 푸른 눈.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당시 론도 최고의 미녀라 불리던 차일드 후작가의 공녀, 마리엔 드 차일드였으니까.
============================ 작품 후기 ============================
내일 28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