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114화 (114/194)

00114  5-1 원죄  =========================================================================

1장 원죄 - 5

“뭐 어때? 우리끼리만 있는데. 너무 딱딱하게 구는 것 아니야?”

“그래도 예의를 차리세요. 전하는 엘, 당신의 친구가 아니라 다음 대의 황제가 되실 분이란 말이에요.”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온화한 인상이었지만, 묘한 카리스마가 흘렀다.

“마리엔, 난 괜찮아.”

“하지만 예법이…….”

“엘 말대로 우린 오랜 친구고. 엘마저 딱딱하게 굴면 난 많이 슬플 거야.”

그 말에 가벼운 인상의 남자가 화색을 띄웠다.

“그렇지, 민체스터?”

“그래그래.”

“하하. 내가 다른 데서도 이러는 것은 아니잖아. 이래 봬도 내가 제국 최고의 명문 클로랜스 후작가의 적자라고!”

그러며 최고의 명문 클로랜스 후작가의 적자는 지난밤 자신이 꼬신 체스터 자작가의 영애에 대한 이야기를 신나서 하였다.

역시 마찬가지로 대귀족 차일드 가문의 공녀, 마리엔은 못마땅하단 표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외면했고, 브리티아 제국의 황태자는 잔잔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러니까 다음 날…….”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청년, 엘이 우뚝 입을 다물었다.

“엘?”

민체스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이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박이다.”

“뭐?”

“완전 내 이상형이야.”

민체스터와 마리엔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엘의 눈은 창밖 거리에 꽂혀 있었다.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어 그가 누구를 보고 말하는 건지는 구별할 수가 없었다.

“이봐, 엘…….”

“잠깐! 나 잠깐만 갔다가 올게!”

그러고 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뛰쳐 내려갔다.

“…….”

민체스터와 마리엔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하여간…….”

민체스터는 쿡 웃음을 터뜨리며 차를 입가에 가져갔다. 너무나 엘다운 모습이었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대클로랜스 가의 후계자가 저런 꼴이라니. 참 큰일이라니까요.”

마리엔이 투덜거렸다.

“지금의 클로랜스 후작께서는 그토록 이나 훌륭하신데, 엘은 왜 저 모양일까요? 아버지의 도움으로 기사단에 들어가서도 훈련은 맨날 빼먹고 여자 뒤꽁무니만 쫓아다니고.”

“뭐, 나름 귀엽지 않아?”

“그렇게 말할 게 아니라니까요. 총기사단에서 엘을 쫓아내야 한다고 진작부터 말이 많다고요.”

“언젠가는 정신 차리고 잘하겠지.”

마리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는 너무 사람이 좋으시다니까요. 그래도 아무리 친구라도 이렇게 계속 감싸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러며 중얼거렸다.

“엘이 전하의 반의반만이라도 닮아야 할 텐데.”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그를 향한 짙은 감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

민체스터는 자신을 향한 그녀의 감정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민체스터, 엘, 마리엔 셋은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였다.

그리고 마리엔은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 글쎄,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듯이, 좋아하지 않는 데도 이유가 없는 법이다.

뭐, 굳이 꼽자면 그녀가 황실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국제 금융계의 재벌, 차일드가의 적녀라는 것? 그녀의 오라비가 암셀이라는 것?

어쨌든 민체스터는 마리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둘이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요란한 소리가 울리며 엘이 3층으로 다시 올라왔다.

“잘됐나?”

민체스터가 웃으며 물었다.

엘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응, 두 명인데. 그중 한 명이 진짜 예뻐. 오랜 친구라 그런지, 분위기는 둘 다 비슷한데. 백금발의 레이디가 진짜 예뻐. 둘 다 부르주아 가문의 영애들인데, 그 예쁜 백금발의 레이디는 간호사가 꿈이라 하더라고. 특이하지?”

민체스터는 그 말을 듣고 실소했다.

어느새 그런 이야기까지 들었데? 참, 엘의 능력이 대단하긴 하다.

곧 엘이 꼬신 두 명의 여인이 카페로 올라왔다.

민체스터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녀들을 돌아봤다.

그리고…….

“……!”

그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졌다.

엘의 말처럼 정말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강렬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테레사라고 합니다.”

백금발의 여인이 부드럽게 인사했다.

“미…… 밀러라고 하오.”

민체스터는 자신이 평소 사용하던 가명을 말했다.

“멋진 이름이시네요.”

테레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인이 방긋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 민체스터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그때, 뒤에 가만히 서 있던 여인이 자신을 소개했다.

“레베카라고 합니다.”

여인은 제국인으로서는 특이하게 흑발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눈길을 끄는 점은 그것뿐. 민체스터는 곧 다시 테레사라 자신을 소개한 여인에게 정신을 뺏겼다.

흑발의 여인도 자세히 살피면 상당한 미인이었으나, 워낙 조용한 분위기 때문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민체스터가 앞으로 자신과 레베카, 그녀가 어떤 운명으로 엮일지 짐작하지 못했던 것은.

자신과 레베카와 마리엔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짐작하지 못했던 것은.

***

“……!”

거기까지 꿈을 꾼 민체스터는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또 그 꿈이군.”

민체스터는 반복되는 ‘악몽’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날부터였다. 행복과 원죄의 씨앗이 동시에 싹트기 시작한 것은.

“레베카.”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는 볼 수 없는.

레베카 드 로마노프.

제국의 11대 황후이자 1황녀 이블린과 2황자 린덴의 어머니.

그리고 과거의 ‘그날’, 백원(百原)의 궁, ‘혈탑(血塔)의 비극’의 주인공.

그는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어 론도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서대륙 최고의 도시 론도. 그가 일평생을 바쳐 일구어낸 풍경이 보였다.

시민들은 말한다. 민체스터는 희대의 명군이라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의 통치 아래 브리티아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으니까.

‘다 의미 없지.’

그는 쓰린 표정을 지었다.

‘그날’ 이후 린덴은 가슴속에 칼을 담았다. 그리고 자신은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오로지 일에만 매진했다.

그래서 역사에 기록될 명군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해서 성공한 삶이었을까? 글쎄, 아닐 것이다.

자신은 ‘그날’ 이후 단 하루도 행복했던 적이 없으니까.

“미안하오.”

민체스터는 가족들이 그려진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가에 희미한 물기가 차올랐다. 그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이블린…… 너에게도…… 정말 미안하구나. 린덴, 너에게도…… 내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그랬으면…….”

그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미안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지금은 죽은 1황자 지펠에게도, 3황자 미하일에게도 미안했다.

린덴도, 미하일도, 그리고 지펠도.

그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으면서 선대의 잘못을 물려받았다.

이제 린덴과 미하일 사이에선 비극이 일어날 것이다. 죄가 있는 자신으로선 말릴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그들의 한(恨)을.

하지만 말리고 싶었다.

이제 더 이상 아무런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자식들 모두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아.”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제.”

민체스터는 작은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날’ 죽은 1황녀 이블린과 똑 닮은 분위기의 소녀. 그가 아끼는 소녀.

“네가 제발 잘해주었으면…….”

그는 그녀의 별명을 떠올렸다.

기적의 천사.

그 별명처럼 기적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

결국, 비극은 일어날 것이다.

다만 미래에 일어날 차가운 비극에 그녀가 자신의 아들들에게 조금의 따스함이라도 나누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해줘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

제국력 285년 새해의 겨울.

크림반도의 수도, 심페폴에는 황실십자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반도의 눈도 끝이군.’

한때 공화국군이 사령부로 사용하던 시청의 집무실에 앉아 린덴은 생각했다.

종전한 지 어느덧 4개월.

이미 대부분의 병력은 본국으로 귀국한 상태다. 이제 반도에 있는 제국의 병력은 고작 2만 남짓.

하지만 린덴은 아직도 이 지긋지긋한 크림반도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총사령관으로서, 제국의 황태자로서 전후 처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뭐가 이렇게 할 일이 많은 거야. 이런 일들까지 내가 직접 해야 하는 건가.’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일이 많은 것은 사실 당연했다. 반도의 새로운 정부와 앞으로 제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했으니까.

그건 알았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들었다. 다 때려치우고 당장 론도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가 이렇게 끊임없이 속으로 투덜거리는 이유.

그건 단 하나, 엘리제 때문이었다.

‘도대체 언제 볼 수 있는 거야.’

벌써 못 본 지 10개월이다.

너무 보고 싶어 금단증상이 일어날 지경이다.

‘엘리제.’

작지만 당당한 소녀. 그리고 사랑스러운 자신의 소녀.

그녀가 총에 맞았을 때가 생각났다. 차라리 자신이 죽었으면 죽었지,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그때 엘 후작보고 데려가지 말라고 해야 했나.’

그는 씁쓸히 생각했다.

이렇게 애타는 증상이 심할지는 몰랐다. 정말 상상도 못한 타는 듯한 갈망이었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줄어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심해졌다. 미칠 노릇이다.

서류를 보다가도 그녀 생각에 몇 번이나 멍하게 시간을 보내는지 모른다.

마약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 금단증상이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제 곧 가니. 기다려라.’

다행인 점은 곧 며칠 후면 심페폴을 떠난다는 점이었다. 지긋지긋한 전후 처리가 드디어 마무리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곧바로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크림반도와 론도는 너무 멀었다.

‘젠장, 론도는 왜 하필 서대륙 끝 브리티아 섬에 있는 거야.’

론도로 가려면 기차를 타고 로마노프령(領)의 상트부르항에 가야 한다.

그리고 또 증기선을 타고 발토해와 북해를 건너야 한다.

물론 대양을 건너야 하는 신대륙이나 동방의 청, 힌디에 비하면 가까운 거리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잘 지내고 있겠지?’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

큰오라버니인 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황실 어의와 황실십자병원의 교수가 되었다고 하니까.

씩씩하게 잘 지내서 다행이긴 한데, 그게 또 심술이 났다.

‘난 이렇게 널 생각하며 잘 못 지내고 있는데, 너는 그냥 잘 지내고 있단 말이지?’

그도 안다.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심술이란 것을.

그래도 어떻게 하겠나. 못 봐서 그런가, 계속 심술이 나는 것을.

‘이번에 가면 절대 놓아주지 않겠어.’

그는 굳게 생각했다.

이제는 절대 그녀가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보지 않겠다.

옆에 꽁꽁 묶어둘 것이다. 벗어나려 해도 소용없다.

그런데 그때, 방문에 노크 소리가 났다.

“렌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전하?”

“들어와라.”

그의 친우이자 가장 신뢰하는…… 아니, 이제는 엘리제 때문에 점수가 조금 깎인 렌 남작이 들어왔다.

저이는 일만 잘하지, 동생에 대해서는 하나도 아는 것이 없다. 그게 린덴의 불만이었다.

“보고 때문에 왔습니다. 총기사단 휘하 2연대 모두 복귀 준비를 끝냈습니다.”

“그래.”

그러며 렌은 이러저런 보고를 추가로 하였다.

“이상입니다. 그러면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런데 린덴의 반응이 이상했다.

돌아가라,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조금 머뭇거리며 친우의 눈치를 살폈다.

렌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왔지?”

“네?”

차가운 인상의 아름다운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편지.”

“……네?”

“네 동생한테 편지 오지 않았냐고.”

“오긴 왔습니다만. 그건 왜?”

“…….”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속에서 열불이 났다.

‘도대체 왜 나한테는 안 보내는 것이지?’

동생한테 하나도 관심 없는 저놈한테는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보내면서!

심지어 눈치를 보니 미하일, 그놈도 매번 편지를 받는 것 같다.

그런데 도대체 왜 자신한테만 안 보낸단 말이냐?

물론 엘리제가 그에게 아예 편지를 안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 정말 가뭄에 콩 나듯 편지를 보냈다.

그것도 격식을 한껏 차린 어투로 말이다.

-대브리티아 제국의 황태자 전하께. 클로랜스 가문의 여식, 엘리제 드 클로랜스가…….

이런 식으로 말이다.

린덴은 그 편지의 어투도 마음에 안 들었다.

저 무관심한 큰 오라비나 미하일, 그놈에게는 편하고 친근하게 편지를 쓰면서, 왜 자신에게는 항상 저런 기계 같은 말투로 보내는 것이지?

친근감이라고는 일 푼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져와.”

“네?”

“총사령관으로서 이상한 내용의 편지가 군 내부에 반입되지 않는지 확인해야겠다. 그러니 가져와 봐.”

이게 말인가, 똥인가.

“……알겠습니다.”

하나도 논리적이지 않은 요구였지만, 애초에 동생의 편지에 별 관심이 없는 무뚝뚝한 오빠는 주군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편지를 받아본 린덴은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정작 편지의 주인인 큰 오라비는 30초 만에 대충 훑어봤지만, 그는 무슨 외교 협정 조약 문서 검토하듯 꼼꼼히 한 글자, 한 글자를 살폈다. 눈에 박아 넣는 것 같았다.

-큰오라버니에게.

그녀의 글씨는 예쁜 얼굴과 다르게 삐뚤삐뚤 못났다. 하지만 그 글씨조차도 그에게는 귀여웠다.

-론도는 많이 추워요. 크림반도도 많이 춥죠? 감기 조심하시고요.

아버지, 어머니는 모두 건강하세요. 저도 건강하고요.

‘건강하다니 다행이군.’

그는 ‘저도 건강하고요’란 문장에 특히 집중해서 봤다.

항상 약한 그녀가 감기라도 안 걸리는지 걱정이다.

============================ 작품 후기 ============================

내일 29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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