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5 5-1 원죄 =========================================================================
1장 원죄 - 6
-작은오빠는 요즘 계속 바빠요. 일이 많은 것 같아요.
‘작은오라비, 크리스. 그놈은 저놈보다는 낫지.’
린덴은 멍하니 서 있는 렌을 바라봤다. 크리스는 저 동생에 하나도 관심 없어 도움 안 되는 렌보다는 훨씬 도움 되는 오라비였다.
-이제 전하께서 귀국하시면 부서를 옮긴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더 바쁜 것 같아요.
그 순간 린덴은 눈을 집중했다. ‘전하’라고. 자신의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곧 실망했다.
그때 한번 지나가듯 나오고, 자신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나에 대해 할 이야기가 그렇게 없는 건가.’
물론 친오라비에게 하는 편지에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적을 필요는 없다. 그도 안다. 그런데 그냥 마음에 안 들었다.
그렇게 편지의 내용을 몇 번이고 꼼꼼히 읽은 그는 렌에게 물었다.
“답장은 했나?”
“답장 말입니까? 안 했습니다.”
“……왜?”
“답장을…… 해야 합니까?”
그 대답이 린덴을 울컥하게 했다.
자신은 받고 싶어도 못 받는 편지를 이렇게 받으면서. 고마운지도 모르고 답장도 안 해?!
“렌.”
“네, 전하.”
“오늘 바쁜가?”
“아닙니다. 저녁이라 일과 끝나서 쉴 예정입니다.”
“잘됐군.”
“네?”
“오늘 나와 같이 술이나 먹지.”
그 말에 렌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술…… 말씀이십니까? 어째서?”
“어째서긴. 자네와 마신 지도 오래되지 않았나.”
렌의 치명적인 약점은 술이 약하단 것이었다.
제국 전체에서 꼽히는 강자인 주제에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져 정신을 못 차렸다.
그래서 린덴은 평소에는 그에게 술을 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그의 여동생 때문에 얄미울 때는 술을 한 잔 주고 싶었다.
“싫나?”
“그, 그건 아니지만…… 맥주 반 잔 정도만…….”
린덴은 강하게 말했다.
“맥주는 무슨. 위스키.”
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위스키. 그가 가장 무서워하는 술이었다.
‘그러니까. 평소에 잘하라고.’
린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마 렌은 왜 자신이 황태자에게 위스키를 받아야 하는지 평생 짐작도 못할 것이다.
렌과의 술자리는 길지 않았다.
죄라곤 동생에게 무심하다는 것 외에는 없는 렌에게 차마 독한 위스키를 강권하지 못해 맥주를 주었지만, 그마저도 몇 잔 못 마셔 골골 잠이 든 탓이었다.
“쿨…….”
“…….”
린덴은 낮은 숨소리를 내며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는 렌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나름 엘리제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잠시 바람이나 쐐야겠군.’
린덴은 코트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귀국 전 한 가지 해결해야 할 용무가 있긴 했었다.
밖으로 나오니 제국군 방한용 코트를 입었음에도 날씨는 추웠다. 숨을 쉴 때마다 나오는 하얀 입김을 보며 생각했다.
‘론도도 춥겠지?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그 생각의 주체는 당연히 엘리제였다.
왜 이렇게 몸이 약해 툭하면 감기에 걸리는지. 마음에 안 들었다.
‘어쨌든 지금 그놈이 있는 위치가…….’
다그닥. 다그닥.
말을 타고 거리를 달리니 심페폴 여기저기서 제국군들이 여유 있게 술을 즐기고 있는 것이 관찰되었다.
정국도 안정을 찾았고, 이제 며칠 뒤면 본국으로 귀국하니 크림반도의 마지막을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적당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범위에서 지휘관들도 용인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말을 타고 달렸을까.
시 외곽에 위치한 커다란 규모의 호텔이 나타났다. 건물은 호텔인데 제국군이 통째로 빌려 쓰고 있는 듯 경호를 서는 병사들이 보였다.
‘여기인가.’
맞는 것 같았다.
안에서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렸던 것이다.
“전하! 제 잔도 한 잔 받으십시오!”
“아! 그만! 이미 취했다고!”
“안 됩니다!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면 또 언제 이렇게 마시겠습니까?! 오늘은 마시고 죽으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가서도 맨날 마실 거잖아! 살려줘!”
그리고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들.
익숙한 목소리였다.
린덴은 고개를 젓고는 호텔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
홀에서 왁자지껄 파티를 벌이던 인원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그들의 정체는 3황자와 검기사단.
린덴의 적들이었다.
“이곳엔……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갑작스레 나타난 황태자에게 검기사단의 부단장이 어색한 얼굴로 물었다.
부단장, 로버트는 로열가드의 수장 길버트와 총기사단의 렌과 더불어 제국의 손꼽히는 강자였다.
“아.”
린덴은 얼굴이 빨개져 있는 미하일을 바라봤다.
“딸꾹, 형님?”
미하일은 형님이 왜 왔는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나 최근엔 영창 갈 일 한 것 없는데?”
어지간히 영창에서 고생했는지, 만나자마자 영창 이야기였다.
린덴은 피식 웃었다.
“영창 보내려고 온 것 아니다.”
“그러면?”
“술이나 한잔하려고.”
“뭐?”
미하일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린덴은 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였다.
“술이나 한잔하지. 동생.”
***
검기사단의 기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있어, 조용히 술을 마실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일단 호텔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근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성벽 위로 올라가 술을 꺼냈다.
바람이 불어 매우 추웠지만, 덕분에 미하일은 술기운을 깰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이유 없이 나랑 술 마실 형님이 아니잖아?”
“특별한 이유는 없다.”
“정말?”
“그래.”
그러며 린덴은 챙겨온 잔에 술을 따랐다.
“보드카네?”
“추우니까. 로마노프령(領)산이다.”
서대륙 북단의 로마노프 령 사람들은 워낙 날씨가 매서워 추위를 잊기 위해 독주인 보드카를 즐겨 마셨다.
그렇게 둘은 안주도 없이 보드카를 쭈욱 들이켰다.
“크으. 보드카는 소주랑 맛이 비슷하다니까.”
“소주?”
“있어. 동방 술.”
그러며 3황자는 잠시 추억에 잠기는 듯,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항주에서 친구들, 검룡(劍龍) 운학과 은화(銀花) 남궁소예와 술을 마시던 것이 떠올랐다. 정말 진탕 마셨었는데.
‘그립군.’
소주, 백주, 황주, 분주 등등. 세상에 있는 술을 모조리 마실 기세로 마셨었다.
하지만 곧 그의 입가가 씁쓸해졌다. 그립기에 슬펐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기억이니까.
그 모습을 보며 린덴이 툭 물었다.
“동방은 즐거웠었나?”
“좋았지.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그렇군. 나도 한번 가보면 좋겠군.”
린덴은 외국이라곤 전쟁으로 앙젤리와 이곳 크림반도에 온 것 외에는 가본 적이 없다.
“다시 가보고 싶나?”
“가보고 싶지. 친구들 다 잘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미하일은 잠시 허공을 바라봤다.
어깨에 놓인 짐만 아니었으면 당장 떠났을 것이다.
“그렇군.”
둘은 그리고 말없이 술을 마셨다.
왜인지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 무거운 분위기가 싫었던 건지 미하일이 일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갈 거야. 나중에.”
“그래?”
“응, 리제랑 같이.”
“뭐?”
갑자기 린덴의 분위기가 사나워졌다.
“엘리제랑? 기분 나쁜 농담은 하지도 마라.”
“농담 아닌데? 이미 약속했다고. 같이 여행 가기로. 청(淸)뿐 아니라, 려(麗)도. 그리고 신대륙의 오대호까지. 다 같이 가보기로 했어.”
“거짓말하지 마.”
“진짜야. 못 믿겠으면 편지로 물어보던지.”
린덴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편지가 와야 편지로 물어볼 것 아닌가.
그리고 미하일 저놈의 얼굴을 보니, 거짓말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 저놈이랑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다고?’
이 여자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추운 날씨임에도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론도에 도착하기만 해봐라. 옆에 꽁꽁 묶어놔 자신만 바라보게 할 것이다. 다른 곳으로는 눈도 돌리지 못하게.
그때, 미하일이 빙글빙글 그를 약 올렸다.
“그러고 보니 형한테는 편지 거의 안 오지? 나는 이틀 전에도 편지 왔었는데.”
“……총사령관의 명령이니 입 다물어라.”
화났다. 진짜 화났다.
형님의 분노에 미하일은 입을 다물었다.
린덴은 커다란 잔에 보드카를 콸콸 따르며 말했다.
“마셔.”
“아, 왜?! 너무 많잖아! 이건 폭력이야! 주폭!”
“총사령관으로서 검기사단의 단장에게 주는 격려주다.”
“거짓말하지 마! 이거 개인적인 악감정으로 주는 거지?!”
“아니면 영창 가든지.”
“무슨 놈의 영창이야! 내가 이번 전쟁 때 영창을 몇 번이나 간 줄 알아?!”
“다 잘못했으니 간 거지. 이유 없이 보낸 적은 없다.”
둘은 한참을 티격태격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정신없이 아옹다옹했을까. 둘은 뚝 입을 다물었다. 너무 유치하다고 느낀 것이다.
대신 미하일이 배를 잡고 시원하게 웃었다.
“쿡쿡. 형님이랑 이런 대화는 진짜 오랜만이네. 간만에 재미있어. 재미있어.”
“난 재미없다.”
린덴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형님.”
“왜?”
“내가 리제 꼬시면 어떻게 할 거야?”
린덴은 동생을 가만히 바라봤다.
“목숨 걸고 꼬셔라.”
“……!”
미하일은 대답 없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목숨 걸어라라.
‘일단 그건 론도에 돌아가서.’
지금은 형님과 술을 마실 때이다.
“한 잔 더 줘. 그 폭력적으로 큰 잔 말고, 정상적인 잔으로.”
쪼르륵.
린덴은 다시 보드카를 따라주었다.
그렇게 다시 둘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그리고 가져온 술이 다 떨어져 갈 무렵.
린덴이 지나가듯 물었다.
“미하일.”
“왜, 형님?”
“포기할 수는 없겠나?”
미하일도 지나가듯 답했다. 술을 한 잔 털어 넣으며.
“어떻게 그러겠어. 그래도 내 어머니인데.”
“그렇군.”
“형님은?”
“나도 그렇지.”
“그래.”
성벽에 선 둘은 가만히 밖을 내려다보았다. 어둠이 깔린 평원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예전에 지펠 형님이 동방 명(明) 시대 때 쓴 소설 읽고, 도원결의(桃園結義) 따라 한 것 기억나?”
“아아, 그 소설이 세 개의 나라가 싸우는 이야기였나? 명작이었지.”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원결의는 아니었지. 복숭아나무가 아니라, 장미 정원에서 했던 맹세였으니까.”
“그래도 맹세를 하긴 했잖아. 대충 따라서.”
미하일은 쿡쿡 웃었다.
“그때 형님이 장비였나? 지펠 형님이 유비였고.”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왜 장비였던 것이지? 아무리 봐도 지펠, 그놈이 장비에 제일 가까운데.”
“그러게. 형님은 장비는 아니지. 그때 형님 성격은 오히려 유장에 가까웠는데.”
“뭣이?”
유장.
그 소설에 나오는 착하고 무능한 군주였다.
“왜? 유장 나름 착하잖아. 물론 지금은 유장은커녕 조조에 가깝지만.”
“내가 조조라고?”
“나름 칭찬이라고.”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미하일은 다시 쿡쿡 웃었다.
그러고 보드카 병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술 다 떨어졌다.”
“그런가.”
“응.”
병을 보니 어느덧 비어 있었다.
마치 모래시계의 모래가 떨어진 것처럼. 그래서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 된 것처럼.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쉬어라.”
“응, 형님도.”
인사를 나눈 둘은 각자의 길을 향해 사라졌다. 방금까지 같이 술을 나눈 게 거짓말이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크림반도의 이야기가 막을 내렸다.
그리고 엘리제의 이전 삶, 역사에 기록되었던 론도의 비극이 막을 올렸다.
<주말(토, 일요일) 연재는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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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월요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