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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16화 (116/194)

00116  5-2 마주 보다  =========================================================================

2장 마주 보다 - 1

론도 거리의 분위기가 들뜨기 시작했다.

근래 들어 가장 큰 규모의 다툼이었던 크림전쟁이 막을 내리고, 그 승전의 용사들이 귀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있을 성대한 개선식에 모두가 들뜬 마음으로 축제를 준비했다.

“아가씨, 이제 곧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신 대요.”

저택의 어린 하녀 마리는 어느덧 2년이란 시간이 지나 귀여운 티가 나는 소녀가 되어 있었다.

“……응.”

엘리제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전하께서 오시는구나.’

두근.

그를 생각하자 그녀의 가슴이 파르르 진동했다.

지난 10개월간.

그가 보고 싶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그리움은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커졌다.

‘언제쯤 도착하실까.’

이제 상트부르 항에서 배를 탔다고 하니 어느 정도 시일이 걸릴 것이다. 바다 사정에 따라 배의 항해 속도도 다를 것이고.

‘조심히 오셔야 할 텐데.’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드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나…… 전하를 어떻게 대해야지?’

총을 맞는 순간,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다. 그런데 그 뒤로 그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마음을 인정한 것은 그녀 스스로일 뿐, 그와의 관계는 아직 평행선이었던 것이다.

‘전하.’

우크라 산맥에서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난 너를 놓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내 것으로 만들 테니. 그러니 도망갈 생각하지 마.’

그 말을 떠올리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사과처럼 붉어졌다.

밤마다 추위를 막기 위해 그가 자신을 감싸 안았던 것도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이마에 닿았던, 그의 이마. 코앞에서 느껴지던 숨결.

“아가씨? 괜찮으세요?”

“……!”

마리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엘리제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다 못해, 이제 터질 것 같았다.

“아니야. 괜찮아.”

“정말 괜찮아요? 요즘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니에요?”

“응. 아니야.”

두근두근.

그와 닿았던 순간들을 떠올리자 민망하고 부끄러우며, 간질간질한 마음이 들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실제로 보면 나 어떻게 하지.

“아가씨.

“응?”

“저 스웨터랑 목도리 전하께 드릴 거죠?”

마리는 엘리제가 그를 위해 틈틈이 짠 스웨터랑 목도리를 가리켰다.

물론 말만 스웨터와 목도리지, 엉망으로 망해 제대로 된 형태는 아니었다.

“저런 걸 어떻게 드려. 그냥 버릴 거야.”

“그래요? 하지만 정성 들여 짜셨는데.”

마리는 왠지 저런 스웨터와 목도리라도 황태자가 기쁘게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엘리제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저런 볼썽 서러운 것을 어떻게 선물하겠는가.

“마리. 나중에 시내의 옷가게에 같이 갈래?”

“정말요?”

마리는 놀란 얼굴을 했다.

엘리제가 최근 2년 동안 옷가게에 가자고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린 하녀는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 예쁜 모습 보여드리려 그런 거죠?”

엘리제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그냥 옷도 다 낡고 해서…….”

뻔히 티 나는 거짓말이다.

애초에 수술복과 가운만 선호하는 그녀는 옷이 낡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주인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어린 하녀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네, 같이 가요. 제일 예쁜 옷으로 골라 드릴게요.”

***

그렇게 엘리제는 그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설레는 가슴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교수님, 이 환자분은 라온 자각가의 영식으로 췌장염으로 입원하였습니다. 현재…….”

“…….”

“교수님?”

“아, 아. 네. 죄송해요. 췌장염이라고요? 수액 치료와 통증 조절을 해주세요.”

엘리제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자신들을 놀라게 한 기적의 의사가 빈틈을 보여서가 아니다.

아무리 가슴이 설렌다 하여도 환자를 보는 일에 큰 빈틈을 보일 그녀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놀란 이유는 단 하나.

그녀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원래 아름다운지는 알고 있었지만.’

인형 같은 얼굴의 엘리제는 과거부터 론도 최고의 미녀로 꼽혔다.

거기다 시간이 지나며 18살의 생일을 앞둔 소녀가 되면서, 인형 같은 외모에 조금씩 여인의 향기가 깃들고 있었다.

마치 꽃이 만개하기 시작하는 듯한 아름다운 향기가 말이다.

인형 같은 외모에 차분한 성숙미가 더해지기 시작하자,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움이 되었다.

간단한 수술복에 가운만 입어도 그 외모를 가릴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수술복에 가운이 그녀의 외모를 가장 빛나게 하였다.

그녀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환자를 볼 때였으니까.

‘더구나 요즘은.’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그녀는 설레 보였다.

항상 강인하게 환자를 보던 그녀가 소녀처럼 설레 하니,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덕분에 황실십자병원의 애꿎은 젊은 남자 의료진들은 그녀를 보며 애꿎은 가슴만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비가 될 분만 아니어도, 당장 고백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가련한 남자 중 일인.

아니, 단순히 가련하다는 단어만으로는 지금까지의 가슴 아픔을 다 표현하기 어려운 남자, 그레이엄 남작은 씁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세요, 선생님?”

“아닙니다, 데임.”

그레이엄 드 팰론.

그는 지금까지의 연구 업적과 크림반도에서의 헌신을 인정받아 엘리제와 비슷한 시기에 황실십자병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직위는 정식 교수!

황실십자병원의 교수는 제국의 의사 중 가장 빛나는 위치라 할 수 있었다.

최고라 인정받는 의사들만이 황실십자 병원에 발을 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황실십자병원의 교수가 되는 것은 내 오랜 꿈이긴 했지만.’

그레이엄의 표정은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엘리제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그녀를 옆에서 볼 수 있으니 기뻤지만, 동시에 가슴이 아팠다.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도 티도 낼 수 없다는 것은 너무 큰 고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프더라도, 못 보는 것보다는 아픈 것이 나았기에, 그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론트 남작가에서 데임께 수술을 부탁하였습니다.”

“저에게요?”

론트 남작가는 귀족파에 속하는 가문이다.

즉, 클로랜스 가문의 적대 가문.

물론 그녀는 치료하는 데 있어, 그런 정치적 이념 따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상대측이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

“로즈데일병원에서 치료가 불가하다고 이야기했다고 하더군요.”

“아…….”

엘리제는 사정을 이해했다.

그녀의 수술을 목격한 이가 많아지며, 점점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불가능한 질병도 데임 클로랜스에게 가면 살 수 있다!’라고.

물론 엘리제도 인간인 만큼 엄연히 한계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다른 병원에서 불치의 판정을 받은 이에게 그녀는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귀족파든, 뭐든 할 것 없이 최후의 순간 그녀에게 치료를 부탁하러 오는 것이다.

물론 엘리제는 정치적 이념 따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은 의사이니까.

“네, 알겠어요. 정확히 어느 부위 수술이죠?”

“위 분문부 암입니다.”

위 분문부는 식도와 맞닿아 있어서 수술이 쉽지가 않았다.

위 전체를 잘라내고, 식도 일부도 잘라내야 한다. 그리고 소장과 잘라낸 식도를 연결해야 하니, 고난이도에 속하는 수술이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정을 잡을게요. 가능한 날이…….”

그녀는 달력을 보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워낙 빽빽이 일정이 차있어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어의이니 황제의 진료도 봐야 하고, 몰려오는 환자들 수술도 해야 하고, 수석교수이니 아카데미에 나가 강의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가 황제의 재가를 받아 진행하는 보건 프로젝트들과 연구 논문들.

몸이 3개라도 부족한 일정이다.

‘수술 일정이 너무 빽빽이 차 있는데.’

커다란 달력에는 날짜마다 예정된 수술이 적혀 있었는데, 어찌나 빼곡한지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어쩌지. 너무 미루면 안 되는데.’

그런데 빼곡한 수술 일정 사이, 비어 있는 날이 눈에 띄었다.

‘아, 이날은…….’

바로 린덴이 론도에 도착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크림에서 떠나기 전, 그는 이런 편지를 보냈다.

-마중 나오도록. 안 나오면 혼날 줄 알아라.

엘리제는 그 편지를 보고 입술을 삐죽했다.

‘그렇지 않아도 마중 가려고 했다고요.’

황태자가 복귀한다고 거창한 입항식은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

이미 대부분의 병력이 복귀한 상태고, 곧 대규모 승전 연회와 개선식을 치를 예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가 예비 황태자비로서 꼭 그를 마중 나갈 필요는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그래도 그와 무려 10개월 만에 만나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마중 나가려 했었다.

그날을 위해 수술도 모두 비워 놓았다.

그뿐이 아니다. 시내의 옷가게에서 드레스도 새로 장만했다. 그에게 예뻐 보이기 위해.

‘어쩔 수 없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급적이면 그날은 비워놓고 싶었지만 그래도 환자의 치료, 그것도 늦어지면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는 암 환자의 수술을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미룰 수는 없다.

‘그리고 아침 첫 수술로 하면 늦지 않게 마중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도착 예정 시간은 대략 늦은 오후 경.

보통 예정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는 경우가 많으니, 일찍 수술을 시작해 점심 전에 끝내면 서둘러 치장을 하고 배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엘리제는 말했다.

“이날로 수술 일정 잡아주세요, 선생님.”

“이날 말입니까?”

그레이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엘리제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담고 있는 그는 그녀가 왜 그날을 비워 놓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수술을 일찍 시작하면 늦지는 않을 것 같으니 그렇게 잡아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녀는 론트 남작도 만났다.

“론트 남작입니다, 데임.”

“네, 반가워요. 남작님의 수술을 집도할 엘리제 드 클로랜스입니다.”

중년 남자는 굉장히 불편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론트 남작.

3황자의 측근인 귀족파의 대표 인물 중 하나로, 거침없는 언사로 유명했다.

정계에서 그녀의 아버지인 엘 후작과도 여러 차례 다툼이 있었는데 그의 딸에게 목숨이 걸린 수술을 받게 되다니.

“정말…… 제 수술을 해주는 것입니까?”

남작은 믿기 어려운 눈으로 물었다.

엘리제는 그가 왜 그런 물음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황제파의 가장 핵심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당연하다. 황제파의 수장 클로랜스 후작가의 적녀이자, 황태자의 예비 약혼녀였으니까.

물론 의사인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안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작의 불안감을 가라앉혀 주기 위해 말했다.

“남작님.”

“네?”

“남작님은 오늘 저에게 어떤 이유로 오셨나요?”

“그야…… 치료받으러…….”

“저도 그렇습니다.”

엘리제는 살짝 웃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다른 사람을 안정시켜 주는 미소였다.

“저는 지금 예비 황태자비로 이 병원에 있는 게 아닙니다. 저는 의사로서 이 병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로지 환자만 바라봅니다.”

“……!”

“저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러니 남작님도 이 병원에서만큼은 다른 것 신경 쓰지 마시고 오로지 치료받는 것에만 집중하세요.”

<바로 다음 편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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