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7 5-2 마주 보다 =========================================================================
2장 마주 보다 - 2
“데, 데임…….”
그녀의 말에 남작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정쟁을 벌이며 클로랜스 후작가에 못되게 군 것이 몇 번인가.
그런데 저런 따뜻한 태도라니.
그리고 태도만 따뜻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 담겨 있는 것은 의사로서의 강한 자신감이었다.
남작은 그녀에게 진찰을 받으며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살 수…… 있을지도 몰라.’
모든 의사가 그를 포기했다. 그래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녀에게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이 순간 생각했다.
등불을 든 여인.
그녀 같은 의사와 함께라면 자신도 살 수 있을지 모른다고.
***
한편 브리티아 섬 동쪽의 북해(北海).
한 떼의 증기선이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제국 2함대였다.
‘이제 곧이군.’
총사령관 린덴은 갑판에서 서쪽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론도, 그녀가 있는 곳을.
‘왜 이렇게 느린 것이지.’
세계 최고의 추진 동력을 갖춘 증기선이건만, 린덴은 투덜거렸다.
느렸다. 너무.
마음만 같아선 하늘을 날아서라도 론도에 도착하고 싶었다.
이제 도착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았지만, 가까워질수록 더욱 마음이 타들어 갔다.
보고 싶었다. 빨리.
‘이제 보면 놔주지 않을 거다. 각오해.’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엘리제. 강단 있는 초식동물.
절대 그녀를 놔주지 않을 것이다. 도망가려 해도 소용없었다.
맹수가 되어 철저히 사냥할 것이다.
“언제쯤 도착할 예정이지?”
“그…….”
북해와 발토해를 담당하는 제국 2함대의 제독은 도대체 몇 번이지 모를 질문을 또 듣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는 하루에 7번쯤 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제독은 늘 하던 똑같은 대답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속력을 내고 있습니다. 아마 예정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일찍 도착할 수는 없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론도에 도착했으면 좋겠군.’
보고 싶었다.
정말로.
***
드디어 대망의 도착 예정 날이 다가왔다.
이른 새벽, 엘리제는 들뜬 얼굴로 저택을 나섰다.
“아가씨, 오늘은 꼭 빨리 돌아오셔야 해요!”
“응, 꼭 그럴게.”
마리가 신신당부했다.
“단장하실 것이 많단 말이에요. 꼭 꼭 빨리 와야 해요.”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드레스 정말 괜찮을까? 너무 몸매 선이 드러나는 것 같은데…….”
“요즘 최신 유행이에요! 아가씨는 뭘 입어도 예쁘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 피부 괜찮아? 어제 잠을 설쳐서…….”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그를 만난다는 생각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
혹시 피부가 거칠어졌으면 어쩌지?
“예뻐요. 예뻐. 돌아오시면 제가 다 단장해 드릴 테니 빨리 오시기나 하세요.”
“응.”
그러고 그녀는 마차에 올라타 황실십자병원으로 향했다.
엘리제는 눈을 감았다.
‘전하를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지?’
이제 그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예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말이리라.
과거의 파국은 트라우마가 되어 그녀를 30년이나 넘게 괴롭혔으니까.
‘그래도.’
두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은 그를 마주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깨달았으니까. 과거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가 소중하다는 것을. 이제 자신도 그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러니 조금씩 조금씩 노력해 갈 것이다.
‘전하.’
다만 걱정되는 것은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후 첫 만남이었다.
뭐라고 인사를 해야지? 무슨 표정을 지어야지? 무슨 말을 해야지? 어색하면 어떻게 하지?
물론 그녀도 안다.
이런 고민이 시답지 않다는 것을.
그래도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사소한 것도 신경 쓰이는 것을.
그가 마음에 들어온 탓일 거다.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고마워요, 경.”
엘리제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호위역을 해주고 있는 벤톨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그녀는 생각했다.
‘일단 병원에 왔으니 수술에 집중하자. 그에 대한 생각은 나중에.’
자꾸 떠오르는 그에 대한 생각을 고개를 저어 밀어내었다.
‘집중해. 엘리제.’
그녀에게는 수많은 수술 중 하나일지 몰라도, 수술을 받는 란트 남작에게는 자신의 생명이 걸린 일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개인적으로 중요한 날이라도, 잡념으로 수술에 지장이 가게 할 수는 없었다.
‘전하에 대한 생각은 수술이 끝나고 나서 하자.’
그녀는 자신의 교수실에서 드레스를 벗고,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하얀 가운을 걸쳤다.
그렇게 외과의사로 변한 작은 소녀는 수술실로 내려갔다.
“오셨습니까, 교수님.”
미리 나와서 기다리던 어시스턴트들이 그녀를 맞았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준비는 다 되어 있나요?”
“네, 교수님.”
“환자는 어디 있죠?”
“수술실 옆에 누워 있습니다.”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수술을 기다리는 란트 남작에게 다가갔다.
“데임.”
불안한 목소리였다.
엘리제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불안해하지 마세요. 한숨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나 있을 것이니.”
“저…… 살 수 있겠습니까?”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살 수 있어요.”
짧고 간단한 말.
그녀는 마주 잡은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그 작지만 강인한 손을 느끼며 란트는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생각했다.
‘아아. 내가 정말로 살아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정치적 이념을 떠나서, 이 소녀에게만큼은 절대 그 은혜를 잊지 않으리라.
그렇게 귀족파와 황제파의 대립이 점차 고조되는 그때.
론도의 이른 아침, 병원의 한구석에서 한 줄기의 따뜻함이 불기 시작했다.
***
수술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애초에 위 분문부 암은, 위암 중에서 가장 치료가 어려운 암이다.
기존의 림프절 절제도 철저히 해야 했고, 위 일부가 아니라 위 전체를 잘라야 했으며, 심지어 식도의 하부도 잘라내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고난이도인데 란트 남작은 해부학적 변형도 있었다.
덕분에 엘리제는 진땀을 흘리며 수술을 해야 했다.
“하아.”
결국, 고비를 넘기고 난 후,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무래도 신경 쓰일 것 같아, 일부러 수술장에 놓인 회중시계를 치워 버렸다.
워낙 집중하고 수술해 바깥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무리까지 잘하자.’
그래도 다행인 점은 진땀을 흘리긴 했지만, 체감상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진 않은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제 어려운 부분은 다 지났으니, 침착히 진행하면 늦지 않게 그를 마중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중. 최선을 다하자.’
엘리제는 마지막까지 심혈을 기울여 수술했다.
한편, 그런 그녀를 어시스트하는 의사들은 그녀의 손놀림을 보며 계속해서 경악하고 있었다.
‘역시 데임 클로랜스. 억지를 부려 어시스트에 들어온 보람이 있구나.’
황실십자병원의 의사들은 제국 최고의 의사로 모두 이름 높은 대가였다.
따라서 다들 의학에 대한 열정이 깊었고, 더 뛰어난 의술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데임 클로랜스, 이 기적 같은 소녀의 수술은 하늘이 준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다들 조금이라도 더 그녀의 수술을 자세히 보고자 어시스트를 자청했고, 참관하러 들어오는 교수도 많았다.
‘정말 대단해. 저 부위에서 저런 테크닉을.’
그렇게 의사들의 경악 속에서 수술이 진행되었고.
“클로즈(Close) 합니다.”
드디어 엘리제는 수술을 끝내는 선언을 하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면 죄송한데, 마무리를 부탁할게요.”
“네, 교수님.”
엘리제는 장갑을 벗으며 수술장을 나왔다.
‘시간이.’
나오자마자 시계를 보니, 아뿔싸.
벌써 12시였다.
‘아직 늦은 건 아니겠지?’
그녀는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배가 예정 시간에 정확히 도착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특히 이렇게 먼 바다를 건너는 함선들이. 서두르면 늦지 않을 거야.’
그녀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빨리 저택에 돌아가서 치장하고.’
수술하면서 팔에 피가 튀어 있었고, 진땀을 흘린 탓인지, 이마에는 땀도 맺혀 있었다.
‘너무 엉망이잖아.’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10개월 만에 만나는 그.
최대한 예쁜 모습을 보이고 싶은데. 아무래도 저택에 돌아가면 치장하기 전에 먼저 씻어야겠다.
‘일단 팔에 묻은 피 먼저.’
이 상태로 저택에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수술장 한편에 마련된 수도관으로 향했다.
물을 틀어 팔을 닦으며 초조히 생각했다.
‘빨리. 빨리 닦고 가자.’
이런 모습이 아닌, 최대한 예쁘게 치장해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녀는 그렇게 외과의사가 아니라, 여자로서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도저히. 도저히 생각지도 못했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엘리제.”
낮은 저음.
손을 씻던 엘리제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설…… 마……?
“엘리제.”
“……!”
낮은 저음이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차가웠지만, 타오르는 듯한 열망이 담겨 있는 음성.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다리에서 힘이 탁 풀려 버렸다.
그였다!
린덴. 그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
‘전하…….’
그녀의 눈동자에 피잉 눈물이 돌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가슴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그가 벌써 이곳에?
이런 의문은 떠올리지도 못했다. 감정이 너무 요동쳐 다른 사고가 마비된 탓이다.
보고 싶었다. 정말로. 정말 많이.
그런 그가 자신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뒤돌아서지 못했다.
뒤돌아서 그를 마주하면 이 요동치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할 것 같았기에.
‘전하…….’
그렇게 그녀는 뻣뻣이 굳어 속으로 그의 이름만 불렀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뒤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단단한 무언가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
그의 팔이었다.
뒤로 다가온 그가 양손으로 그녀를 강하게 껴안았다.
온몸으로 와 닿는 그의 단단한 느낌에, 그리고 그의 체향에 엘리제는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아아…… 전하.’
정말 그였다. 그토록 바라던.
그때 린덴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마중 나오지 않았지?”
하지만 엘리제는 대답하지 못했다.
가슴이 너무 격동해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한마디라도 하면 눈물이 흘러버릴 것 같았다.
린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환자 때문에 그랬겠지.”
그는 자신에게 안긴 소녀를 바라봤다.
이렇게 두 손으로 그녀를 안고 있다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그는 더욱 힘을 주어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조금 더 그녀를 느끼고 싶었다.
자신의 심장.
나의 모든 것.
그는 낮게 말했다.
“보고 싶었다.”
“……!”
그 낮지만, 따스한 말을 듣는 순간.
결국, 그녀는 한줄기 눈물을 흘러내렸다.
‘저도요. 저도 보고 싶었어요.’
머리가 하얘져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의 손에 닿은 어깨가, 배가. 그리고 그의 몸에 닿은 등이 타오를 듯 뜨거웠다.
가슴이 요동치고 진탕했다.
이대로 무너져 버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잡았어.”
그는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맹수가 되어 말했다.
“그러니 이제는 절대 놔주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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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2월 2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