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8 5-2 마주 보다 =========================================================================
2장 마주 보다 - 3
“……!”
“네가 싫어한다 해도 상관없어. 각오해.”
아아, 전하.
엘리제는 현기증이 났다.
자신을 향한 그의 갈망에 전신이 묶여 버리는 것 같았다. 아찔한 속박감.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아…… 그는 아직 나의 마음을 모르는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표현한 적이 없으니까.
‘나도 전달해야 해. 마음을.’
하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가슴이 떨려, 그의 얼굴을 마주 보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마음을 전달한단 말인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달해야 했다.
어떻게?
결국,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전하…….”
개미가 기어가는 듯 작은 목소리였다.
“왜 그러지?”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차를 한잔 대접해도 될까요?”
“차?”
린덴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얼굴을 낮추자 자연히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불에 밀접했다.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차가 아니라, 바로 너인데?”
“……!”
그녀의 가슴이 파르르 흔들렸다.
나를 바란다니?
더구나 귓가에서 느껴지는 그의 입김도 그녀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전하…….”
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제 교수실에 조, 좋은 차가 있어요. 차를…….”
비는 듯한 음성에 린덴은 입을 다물었다.
차라.
지금은 그녀를 느끼고 싶지, 차를 마시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그저 너를 느끼고 싶은 게 아니라.’
그녀를 송두리째 가지고 싶었다. 그야말로 미칠 듯한 갈망.
그는 힐끗 시선을 돌렸다.
마침 수술을 마치고 나온 의료진들이 경악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는 네 방에서 마시는 건가?”
“네, 네. 전하.”
“그 방엔 아무도 없나?”
엘리제는 그걸 왜 물어보는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아…… 네. 저만 사용하는 방입니다.”
“그렇군.”
린덴은 미소 지었다.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거지. 차에 관심은 없었지만, 그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초식동물은 맹수를 자신의 방에 초대했다.
***
엘리제는 린덴을 자신의 교수실로 데려왔다.
왜인지 그와 단둘이 있는 게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어 문을 살짝 열어두었으나.
달칵.
린덴이 문을 닫아버렸다.
“……왜 문을?”
“방해받기 싫으니까.
“뭘요?”
물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강렬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꿀꺽.
그녀는 침을 삼켰다.
‘나, 나 뭔가 실수한 건가?’
그런 생각이 슬며시 들었으나, 애써 외면했다.
오랜만에 봐서일까.
그는 이전과 달랐다.
아니, 자신을 향한 갈망은 동일했으나, 조금 더 거침이 없었다.
그건 그녀가 모르는 그의 심경 변화 때문이었다.
이전 그녀가 총에 맞아 죽어갈 때 그는 다짐했다.
만약 그녀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때는 절대 그녀를 손에서 놓지 않겠다고.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꽁꽁 묶어두겠다고.
“여기 앉으세요. 차, 차를 끓여드릴게요.”
엘리제는 일부러 그의 시선을 피하며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
린덴은 잠시 앉아 그녀의 방을 살폈다.
‘생각보다 지저분하군.’
그녀의 인형 같은 외모를 생각하면 차분히 정리된 전경이나, 아늑한 핑크빛 교수실이 상상되었으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그냥 일 중독 교수의 너저분한 사무실이랄까. 여기도 서류. 저기도 서류.
‘하긴 글씨도 삐뚤삐뚤 못 쓰니까.’
엘리제가 부끄러운 듯 말했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세요. 민망해요.”
그녀는 그의 집무실을 떠올렸다.
자로 잰 듯이 정리된 그의 방과 비교하면 자신의 방은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전하는 지저분한 것 싫어하시는데.’
왜 미리 방을 정리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후회되었다.
“미리 정리하지 않고 초대해서 죄송해요. 다음에는 정리를 하고…….”
그런데 린덴이 의외의 말을 하였다.
“난 이 방이 좋은데.”
“네?”
“네 향기가 느껴지니까.”
“……!”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빠, 빨리 차 끓여드릴게요.”
그녀는 도망치듯 그에게서 멀어졌다.
도저히 그의 시선을 받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조그만 교수실에서 도망가 봤자 어딜 가겠는가.
그의 눈은 집요하게 그녀의 뒤를 쫓아왔고, 그 눈빛을 느낄 때마다 그녀의 심장이 뛰었다.
떨리는 손으로 찻잎을 물에 올리고 불을 끓였다.
‘제발 진정해, 심장아.’
그녀는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좋은 차를 우리려면, 마음을 가다듬고 집중해야 하는데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계속 그만 신경 쓰였다.
그런데 그때, 린덴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뭐지?”
놀라 고개를 돌리니 그가 열린 캐비닛 속에서 한 물건을 보고 있었다.
‘아!’
그녀는 화들짝 놀라 달려갔다.
자신이 그에게 주기 위해 짠 목도리 실패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가 가리기 전, 그가 먼저 그 목도리 비슷한 실패작을 낚아챘다.
린덴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네가 짠 것인가? 누굴 주려고 짠 것이지?”
그녀의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대답할 수 없다.
이런 못난 물건을 그를 위해 만들었다고는. 부끄러웠다.
“…….”
그런데 그 침묵을 린덴은 오해해 받아들였다.
그의 기세가 흉포해졌다.
“말해. 누구야.”
“…….”
탁.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그 뜨거운 감각에 그녀는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녀는 움츠러들며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빨리 말하라고. 누굴 주려고 짠 거지? 설마 미하일, 그놈인가?”
“아, 아니에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여기서 미하일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등 뒤 캐비닛 안에 수북이 쌓여 있는 편지지에 그의 시선이 닿았다.
“이건……?”
“……!”
그녀의 얼굴이 하얘졌다.
린덴이 보고 있는 것은 그에게 쓰다가 못난 문장에 완성하지 못한 편지들이었다!
‘안 돼! 저 편지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 닫을게요!”
그녀는 급히 캐비닛 문을 닫았다.
보이고 싶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을 린덴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을 잡아 문을 닫는 걸 저지하고는 수북이 쌓인 편지지를 꺼내 펼쳐 보았다.
그리고.
“……!”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아아……! 어떻게 해.’
그녀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너…….”
린덴은 흔들리는 눈으로 편지들을 봤다.
-전하께.
엘리제예요. 춥지는 않으신가요?
-전하께.
눈이 많이 내리네요. 크림반도는 어떤가요?
-전하께.
론도는 비가 왔어요. 혹시 몸은 아프지 않은가요?
-전하께.
-전하께.
-전하께.
삐뚤삐뚤 못난 글씨.
대부분 편지는 길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그를 향한 편지였다.
“나에게…… 편지를 거의 쓰지 않은 것 아니었나?”
엘리제는 민망함에 고개를 숙였다.
“안…… 쓰지 않았어요.”
“그러면……?”
“제가 글을 잘 못 쓰니…… 조금이라도 더 잘 써서…… 보내고 싶어서…… 전하에게 보내는 거니까…….”
쥐죽은 듯한 목소리였지만, 린덴에게는 천둥보다 더 크게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지금 제대로 듣고 있는 것이 맞는 건가?
나에게 보내는 거니 조금이라도 잘 쓰고 싶었다고? 왜?
설마…… 이 말의 의미는?
린덴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엘…… 리제?”
엘리제의 얼굴은 완전히 홍당무처럼 변해 있었다.
“차, 차 끓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급히 그에게서 도망치려 했으나, 맹수는 놔주지 않았다.
탁.
“……!”
자신의 팔목을 강하게 움켜쥐는 느낌에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그녀를 자신에게로 강제로 끌어당겨 앞에 밀착시켰다.
“내가 말했지.”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
“내가 바라는 것은 차 따위가 아니라 너라고.”
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 손은 뺨에서 귀로, 목덜미를 훑었다.
‘아.’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전기에 맞은 것 같다. 그의 손이 닿는 곳이 너무 뜨거웠다.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엘리제.”
“…….”
“엘리제.”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와 그녀의 얼굴이 더욱 가까워졌다. 숨결이, 체향이 서로에게 닿았다.
자신을 갈망하는 그의 눈동자에 엘리제의 몸은 뻣뻣이 굳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그에게 꽁꽁 묶여 버렸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붉은 입술에 닿았다. 스치듯 만지는 손가락.
“내가…… 지금……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
“하지만 상관없어.”
그가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정말로.
그와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고작 손가락 하나도 안 될 정도의 거리.
“네가 오해하게 한 것이니. 이대로 계속 오해할 테니까.”
“……전…… 하.”
“도망갈 생각 하지 말도록.”
안 놔줄 테니까. 영원히.
그러고 그의 얼굴이 더…… 조금 더 내려왔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붉은 입술에 닿기 직전까지 다가왔다.
엘리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 나 어떻게 하지.’
머리가 하얘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울렸다.
똑. 똑.
조금은 큰 노크 소리.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둘은 깜짝 놀랐다. 특히 엘리제는 마치 도망가듯 그에게서 화들짝 떨어졌다.
“드, 들어오세요!”
린덴은 확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뭐야? 하필 이런 순간에.
‘그래도.’
그는 여전히 홍당무 같은 엘리제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쩌면 단순히 오해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잘 써서…… 보내고 싶어서…… 전하에게…… 보내는 거니까…….’
이 말의 의미는 하나였다.
그녀도 어쩌면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떠오르는 우크라 산맥에서의 기억.
‘저도 싫다고요! 전하가 다치는 것! 전하가 괴로워하는 것! 전하가 죽을지도 모르는 것! 싫다고요! 저도 아프다고요!’
그녀가 자신을 향해 눈물 흘리던 것도 떠올랐다.
어쩌면, 어쩌면……?
“엘리제…….”
그는 시선을 피하고 있는 그녀를 불렀다.
그저 오해하고 짐작만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 그녀에게 제대로 듣고 싶었다.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
“들어가겠습니다.”
훼방꾼이 들어왔다.
그 훼방꾼의 얼굴을 본 엘리제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오빠!”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 작은 오빠 크리스였다!
엘리제는 마치 곤란에 처해 있다가 백마 탄 왕자라도 만난 것처럼 그에게로 달려갔다.
크리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동생을 가볍게 안아주었다.
“우리 리제. 밥은 먹었어?”
“아직요. 오빠는요?”
“나도 아직 안 먹었지. 오늘 일 늦게 안 끝나지? 저녁에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갈까?”
“네. 네.”
그 지나치게 다정한 모습에 린덴은 눈썹을 꿈틀했다.
다른 놈이었으면 요절을 냈겠지만, 저 이는 그녀의 친오라비인 크리스였다. 그나마 렌보다는 조금 더 낫다고 평가되는.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아, 그게…….”
크리스는 그 물음에 그녀를 안은 팔을 놓고,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전하를 뵙습니다. 신임 비서관인 크리스 드 클로랜스입니다.”
“……그래, 여기는 무슨 일이지? 난 자네 동생에게 용건이 있다만.”
별 용무 없으면 빨리 돌아가지? 란 말투로 황태자가 말했다.
============================ 작품 후기 ============================
내일 2월 3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