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9 5-2 마주 보다 =========================================================================
2장 마주 보다 - 4
하지만 린덴에게는 불행히도 크리스는 아무런 일 없이 온 것이 아니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아바마마가?”
“네, 전하. 폐하께서 지금 바로 뵙자고 하시더군요.”
그 말에 린덴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해 보니 항구에 입항한 후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곧바로 그녀에게 달려와 버렸다.
원래는 황제인 민체스터에게 먼저 가 보고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는데. 너무 그녀가 보고 싶어 앞뒤 안 가리고 달려온 것이다.
‘어쩔 수 없군.’
속으로 한숨을 내쉰 린덴은 엘리제를 바라봤다.
“엘리제.”
“네, 네? 전하?”
엘리제는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방금 맞닿을 뻔했던 그의 입술이 떠올라 그녀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기다리고 있어라.”
“……!”
“곧 다시 올 테니.”
일반적인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러지 않았다.
그의 타오르는 듯한 시선은 이런 뜻을 담고 있었다.
‘금방 잡으러 올 테니. 도망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고 기다려’라는.
린덴은 또 생각했다.
‘직접 들어봐야겠어. 내 오해가 맞는 것인지.’
그는 살짝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자신의 오해가 맞는 것인지,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들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크리스가 또 훼방을 놓듯 말했다.
“전하, 빨리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래.”
그렇게 둘은 사라졌다.
홀로 남은 엘리제는 다리에 힘이 빠져 응접용 소파에 주저앉았다.
“하아…….”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방금 그의 손길이, 자신에게 다가오던 입술이 떠올랐다.
가슴이 계속 뛰었다.
***
하지만 금방 잡으러 온다는 말과 다르게 린덴은 한참이나 그녀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아바마마를 뵙습니다.”
“그래, 정말 수고가 많았다.”
민체스터가 옅게 웃으며 승전 후 복귀한 아들을 맞았다.
린덴은 안 본 사이, 부쩍 마른 아버지를 보고 일순 말을 잊었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기력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아바마마…….”
민체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엘리제, 그 아이가 처방한 약들을 먹고 많이 나아지기도 했고.”
“…….”
“태자, 너는 그래, 고생이 많았지? 브리티아 섬과 다르게 기후가 안 맞아 힘들진 않았더냐? 전쟁 시 입었던 상처들은 무리 없이 나았고?”
“저는 괜찮았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괜찮으니 정말 걱정 안 해도 되느니라.”
그렇게 둘은 황제와 원정군의 총사령관이라기보단 일반적인 아버지와 아들처럼 그간의 일들을 나누었다.
“그래, 네가 정말로 큰일을 해주었어. 피할 수 없어 일어난 전쟁이지만, 반드시 승리했어야 했는데, 네 덕에 큰 승리를 거두었구나.”
민체스터는 총사령관이었던 아들의 공을 치하했다.
하지만 린덴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제 공이 아닙니다.”
“그러면?”
“엘리제,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 전쟁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빠르게 공화국군에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녀의 공입니다.”
그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로 참전한 그녀이지만, 이번 전쟁 때 중요한 분기마다 어김없이 커다란 공을 세웠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몽쉘 왕국의 참전을 대비 못해 2군단이 전멸했을 거고, 코프스크 대회전 때 패배했을 것이며, 전염병의 창궐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이 순간, 제국이 승리의 축배를 들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녀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렇지. 이번 승전식 때 공로에 따라 상을 내리기 위해 전공을 따져 보았는데. 엘리제, 그 아이의 전공 순위가 어마어마하더구나.”
승전식의 하이라이트인 전공 포상.
가장 큰 전공을 세운 10명에게 황제인 그가 직접 황실십자훈장과 더불어 포상을 내리게 된다.
지금껏 여성이 그 영광된 명예의 자리에 선 적이 없었는데, 엘리제는 여성이자 제국 역사상 최연소로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
아니, 그냥 단순히 그 자리에 서는 것뿐이 아니라…….
‘전공 순위가.’
처음 그녀의 전공 순위를 확인한 황제는 놀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하지만 검토 결과 그 순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낮은 감이 있었다.
‘하여튼 대단해. 정말 대단해.’
민체스터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태자.”
“네, 아바마마.”
“약혼은 언제 할 것이냐?”
민체스터가 어딘지 짓궂은 어조로 말했다.
“이전 그 아이가 나에게 한 이야기가 있었지. 네가 만약 자신을 바라지 않으면, 약혼을 취소해 달라고.”
“…….”
그 말에 린덴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건 엘리제가 전쟁에 참전하기 전 내건 조건이었다.
만약 황태자가 자신을 원하지 않으면, 그가 원하는 여인과 이어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그가 원하지 않는 불행한 결혼을 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약혼 취소라고? 꿈도 꿀 생각하지 마.’
린덴은 속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은 이미 그녀 없이는 못 살게 되었는데, 웬 파혼이란 말인가.
방금 봤는데도, 지금도 또 보고 싶어 가슴이 타건만.
‘빨리 약혼을 해야겠군.’
생각해 보니 예비 황태자비로 여겨지고 있긴 하지만, 그녀와 자신은 공식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 정식 약혼식을 안 치렀으니까.
‘약혼자라.’
그는 그 단어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약혼식을 치르든 안 치르든 그녀를 놔줄 생각은 없었지만, 공식적인 관계가 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녀의 손가락에 자신이 준 반지를 끼우고 싶었다.
이 여자가 바로 내 여자라고. 내 거라고. 말이다.
‘아니, 약혼 관계만으론 부족하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약혼자란 이름으로 그녀와 자신이 얽히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그가 마음속 원하는 것은 고작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가 깊숙이 원하는 것. 그건 그녀와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
그래서 그는 물었다.
“아바마마.”
“왜 그러느냐?”
“황실의 예법상 황태자가 약혼식 없이 바로 결혼할 수는 없습니까?”
“…….”
황제는 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못하던 농담을 배워왔나 바라봤다.
물론 린덴은 농담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농담 따위 할 줄 몰랐다.
‘그녀가 내 아내라.’
부부.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단어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내가 되고, 자신은 그녀의 남편이 된다. 진정으로 오롯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 맑은 눈빛도, 하얀 피부도, 숨결까지도. 모두.
‘궁내부장에게 예법을 살펴보라 해야겠군. 예외 조항은 없는지.’
그렇게 린덴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
그 뒤로도 그는 며칠 동안이나 엘리제를 만나지 못했다. 일이 끝없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승전식 준비, 대신 회의, 정책 검토, 타국의 외교관 알현 등등.
하나하나가 가벼운 것이 없었고, 툭하면 걸어오는 귀족파의 시비에 일 처리를 빨리 끝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간신히 하나를 끝내 한숨을 돌리려 해도, 신임 비서관인 크리스가 또 일을 물어왔다.
“다음 의회에서 논의될 세법 개정안입니다. 귀족파의 핵심 인물인 메르키트 백작이 제안한 입법안입니다.”
“…….”
린덴은 서류에 사인하다가 가만히 크리스를 올려다보았다.
렌도 그렇지만, 이 크리스도 은근히 엘리제를 닮았다. 형제니 당연한가? 모두 특징적인 백금발인 것도 그렇고.
“전하?”
“……아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대는 참 유능한 비서인 것 같군.”
린덴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그래, 이 크리스는 누가 엘리제의 오빠 아니랄까 봐 참 유능했다.
부드러운 인상과 다르게 한 치의 빈틈도 없었고, 왜 행정부에서 ‘리볼버’란 별명으로 불렸는지 며칠 만에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너무 유능하잖아. 너무. 이렇게까지 유능할 필요는 없다고.’
린덴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모름지기 비서의 일이란 무엇이겠는가?
상관이 업무를 빠뜨리지 않고,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비서의 역할이었다.
그런 면에서 크리스는 완벽했다.
어찌나 꼼꼼하고 업무 처리가 빠른지, 린덴에게 쉬지 않고 해야 할 일을 던져 주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다음 일을, 다음 일이 끝나면 그다음 일을.
‘덕분에 나도 업무 효율이 확실히 늘긴 했지만.’
문제는 쉴 틈이 없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엘리제, 그녀를 보러 갈 틈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왜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못 보는 거지?’
황실십자병원과 그의 궁은 멀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일하는 황실십자병원과 황궁이 붙어 있었으니까.
‘왜 론도에 와서도 보고 싶어 해야 한단 말이야.’
그런 그의 불만도 모르고 크리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또 건네주었다.
“이건 그 입법안을 검토하고 살피실 서류입니다. 웨일의 만스 시에서 건의한 내용으로…….”
“…….”
무언가 크리스에 대한 점수가 급속도로 깎이고 있었다. 왠지 렌이 조금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비서관으로서의 능력은 더할 나위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던 다음 날이었다.
점점 불만이 쌓여 폭발하기 직전.
대전 회의를 가던 중, 린덴은 발걸음을 우뚝 멈추어 섰다.
그의 시선이 정원 너머 어딘가에 꽂혔다.
“전하? 회의 시작에 늦을 수도 있습니다.”
크리스가 재촉했으나, 린덴은 이렇게 답했다.
“늦어도 돼.”
“네? 대신들이…….”
“대신들? 기다리라고 해. 비서관, 너도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도록.”
“전하?”
하지만 린덴은 듣지 않고, 척척 전혀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전하?!”
“기다려. 금방 다녀올 테니.”
그가 향한 곳은 정원 너머.
그곳에 엘리제가 있었다!
왕진 가방을 손에 쥐고, 간호사 한 명과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제.’
크리스의 말처럼 바로 가지 않으면 대전 회의에 늦겠지만, 지금 그게 문제인가? 며칠 만에 그녀를 봤는데.
‘대전 회의 따위, 조금 늦어도 돼.’
대신들과 정국을 논하는 대전 회의가 순식간에 ‘따위’로 전락하였다.
그의 발걸음이 초조하게 뛰듯 빨라졌다.
하지만 바삐 걸음을 옮겼어도 정원 너머에 도착했을 땐 그녀는 이미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린덴은 인상을 구기고 주변에서 경비를 서던 가드에게 물었다.
“여기로 데임 클로랜스가 오지 않았었나?”
“네, 그렇습니다, 전하!”
“어디로 갔지?”
“하버 공작부인께서 고열이 난다 하여 진료를 보러 가신 다고 들었습니다.”
하버 공작부인.
웨일의 대귀족 하버 공작의 부인으로, 황실의 먼 친척이었다.
파킨슨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전 2년 전, 탄신연회 때 엘리제가 목숨을 구한 적이 있었다.
‘젠장.’
그런 용무라면 가서 잡을 수도 없다.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어려운 거지?’
그녀가 보고 싶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손길을 어루만지며, 작은 몸과 체향을 느끼고 싶다.
이렇게 가슴은 타오르는데, 옆에 두고도 못 보니 미칠 것 같았다.
‘이대로는 안 돼.’
그는 굳은 얼굴로 생각했다.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고 만다.’
그 얄미운 크리스가 방해하더라도, 아무리 일이 바빠도 상관없었다.
오늘만큼은 그녀를 잡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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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2월 4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