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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20화 (120/194)

00120  5-2 마주 보다  =========================================================================

2장 마주 보다 - 5

하지만 그 다짐은 쉽지 않았다.

대전 회의가 생각 외로 길어졌던 탓이다.

“전하, 그 개정안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비호감 외모의 중년 귀족 사내가 손을 들어 반대했다.

린덴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메르키트 백작.’

저 메기 같은 인상을 지닌 남자의 정체는 메르키트 백작.

상원의 위원장으로 차일드 가문의 암셀 후작에 이어 귀족파 서열 2위의 귀족이었다.

차일드 가문이 서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금권으로 귀족파의 뒤를 받힌다면, 상원 위원장인 메르키트 백작은 막대한 정치력으로 황제파와 직접 맞서는 역할을 하였다.

‘짜증 나는군.’

평소에도 골머리를 앓게 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심했다.

단순히 이번 개정안이 귀족파의 손익을 건들기 때문은 아니었다.

“우리 상원은 행정부에서 이 개정안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무리한 개정안입니다. 원점에서 다시 기안해야 합니다.”

귀족파의 여러 인물이 강하게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이 오늘따라 유독 강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

그는 시선을 돌려 그 원흉을 바라봤다.

저 멀리 정장을 입고 앉아 있는 꽃같이 화사한 외모의 젊은 남자.

3황자 미하일 드 로마노프. 그의 동생이자 정적이었다.

미하일은 가벼운 평소와 다르게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미하일.’

린덴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크림전쟁이 끝난 이상, 이제 곧 자신과 저 미하일의 싸움이 시작될 것이란 것을.

그리고 이 싸움의 패자는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와 미하일 모두 마음속으로 원하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일 뿐이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린덴은 안건을 다시 살폈다.

왜일까? 늘 꾸던 악몽이 떠오르며 갑자기 피로하단 마음이 들었다.

그냥.

그녀가 보고 싶다.

미친 듯이.

***

한편 그때, 엘리제는 하버 공작부인을 치료하고 궁을 나서고 있었다.

공작부인의 발열은 폐렴 초기 증상이었다. 이런저런 처치를 하고 나서, 상태가 안정되는 것을 확인 후 궁에서 나왔다.

‘좋아지셔야 할 텐데.’

엘리제는 황실십자병원으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부인은 파킨슨병이 진행되며 자꾸 여러 합병증이 발생하고 있었다. 웨일이 아닌, 궁에 머물고 있는 것도 이런저런 치료를 위해서였다.

“다음 일정이 어떻게 되죠?”

“마티스 자작가 영애의 탈장 수술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교수님.”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니, 테레사병원에서 일할 때보다 지금이 훨씬 바쁜 것 같았다.

어의로서 황제와 황족들의 건강을 챙기는 것 외에 황실십자병원의 의사로서 수술도 해야 하고, 교수로서 아카데미에서 강의도 해야 한다.

그것뿐인가? 황제의 재가를 받고 진행하는 보건 프로젝트들도 있고, 개인적으로 진행하는 연구 논문 작성도 있다.

그야말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상황.

그래도 바쁘고 피곤해도 그녀는 행복했다. 원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

‘전하.’

엘리제는 길을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보이는 하나의 궁을 바라보았다.

사자궁.

황태자인 린덴이 머무는 궁으로, 후에 그녀가 결혼 후 들어갈 곳이었다.

‘많이 바쁘시겠지?’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마음이 참 웃기다.

그와 마주했을 때는 그렇게 떨려 어쩔 줄 몰라 했으면서 안 보니 또 이렇게 보고 싶다.

‘금방 오신다셨으면서.’

그날의 짧은 만남 이후, 아무런 소식이 없다.

‘10개월 만에 오셨는데. 계속 못 뵈는구나.’

물론 알고 있다.

이제 막 복귀한 그가 얼마나 바쁠지.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다시 만나면 또 얼굴만 빨개져 아무 말 못할 거면서.

“교수님?”

간호사가 멍하니 서서 사자궁을 바라보는 엘리제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마티스 영애의 수술은 정확히 얼마나 남았죠?”

“한 시간 반 뒤에 시작이에요. 하버 공작부인의 치료 때문에 넉넉히 미뤄놨어요.”

그 말을 들은 엘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내가…… 한번 찾아가 볼까?’

하지만 곧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내, 내가 어떻게 찾아가…….’

아무리 약혼자로 예정된 사이라지만, 불쑥 어떻게 황태자를 찾아가겠는가.

아니, 사실 그가 황태자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같은 황자라도 친구인 미하일을 찾아가야 한다면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찾아가는 것은 이유 없이 부끄러웠다.

‘그래도…… 보고 싶은데.’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잠깐 찾아가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그러니까 바쁘시니 잠시 기운을 내시라고…… 난 어의니까 혹 바쁜데 몸이 이상하지는 않는지…….’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어의니까 황태자의 몸을 살펴야 한다고?

뭔가 말도 안 되는 핑계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잠시만 찾아뵙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실제로 크림반도에서 복귀한 후 검진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그, 그래. 어차피 한번은 전하의 몸 상태를 살피러 가야 하니까.’

그래, 이건 의사로서 검진을 위해 가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마음을 정한 엘리제는 자신의 교수실로 돌아와 거울을 살폈다.

‘조금만 머리를 다듬고.’

현재 그녀는 전혀 꾸미지 않은 상태였다.

화장은커녕 머리는 포니테일로 질끈 묶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니, 꾸민 것보다 더 예뻤지만, 그녀는 서둘러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다듬었다.

일단 머리를 풀었다. 끈을 풀자 부드러운 백금발이 가운을 입은 어깨 밑에서 찰랑거렸다.

그리고 민낯에 희미하게 기초화장을 하였다.

물론 검진하러 가는데 치장을 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일하던 얼굴 그대로 그를 만나러 가기는 싫었다.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그렇게 외과의사 엘리제는 설레는 소녀가 되어 교수실을 나왔다.

혹시나 그가 피로해할까 봐 피로를 풀어주는 찻잎과 간단한 다과도 챙겼다.

‘그런데 만나면 뭐라고 하지?’

며칠 전 마지막 순간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당시 그의 말.

‘내가 바라는 것은 차 따위가 아니라 너라고.’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의 입술에 거의 맞닿을 뻔한 그의 입술도 떠올랐다.

‘쓰,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엘리제. 그냥 검진하러 가는 거야. 크림반도에서 돌아온 전하의 몸이 괜찮은지. 그러니 잠깐만 뵙고 나올 거야.’

하지만 한번 떠오른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자꾸만 당시의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뒤에서 자신을 감쌌던 그의 몸짓, 자신을 만지던 그의 손길. 모두 선명히 떠올랐다.

‘이,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정신 차려.’

콩닥. 콩닥.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지금 이 가슴의 떨리는 느낌이 도대체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그녀가 사자궁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엘리제는 의외의 말을 들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지금 안 계십니다.”

“아…….”

이전에 그녀에게서 목숨을 구함받은 적 있던 란돌 경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언제쯤 오실 예정이신가요?”

“지금 대전 회의가 한창이실 테니 아마 꽤 걸릴 것입니다. 돌아가시면 전하께 데임의 방문 소식을 알려드릴까요?”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특별한 일로 온 것은 아니니…… 전하께는 따로 말씀해 주지 마세요.”

그러고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 물었다.

“전하께서 요즘 많이 바쁘시죠?”

“네,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셔서 잠도 잘 못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렇군요.”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힘없이 황실십자병원으로 돌아가려다, 문득 한가지 생각이 나 몸을 돌렸다.

“저, 란돌 경.”

“네, 데임?”

“이 차(茶)를 전하께 달여 드릴 수 있으시겠어요?”

그녀는 자신이 챙겨온 작은 단지를 건네주었다.

딸의 과로를 걱정한 엘 후작이 어렵사리 구한 동방 귀인들의 차로 피로를 풀어주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배합 방법과 물을 달이는 방법은…….”

이전 삶, 황태자는 차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아마 지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가 가장 좋아하던 맛이 우러나오도록 레시피를 일러준 후 병원으로 돌아왔다.

엘리제는 교수실로 돌아온 후, 의자에 앉았다.

‘수술 준비해야지.’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를 만나러 사자궁으로 향할 때만 해도 기운이 넘쳤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힘이 빠졌다.

엘리제는 고개를 강하게 젓고, 다시 머리를 한 갈래로 묶었다.

그리고 수술을 준비하러 병실로 내려갔다.

***

대전 회의는 깊은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사자궁으로 돌아온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치는군.’

회중시계를 보니 저녁 9시 30분이었다.

저녁은커녕 휴식도 없이 비생산적인 논쟁을 벌이니 몸이 추욱 늘어졌다.

“대전 회의가 길어졌군요.”

시종 란돌이 말했다.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들과의 회의가 늘 그렇지.”

“그러게 말입니다. 하여튼 한심한 작자들입니다.”

이전 암행 때, 총상을 입어 엘리제에게 비장절제술을 받았던 란돌은 장기간 요양을 한 후 얼마 전 궁으로 복귀했다.

왕년에 로열 나이츠, 총기사단의 단원이었던 그는 시종이라기보단 기사에 가까운 몸을 가지고 있었다. 말투도 시종치고는 가벼웠다.

“식사를 준비시킬까요?”

“아니, 됐다. 그냥 조금 쉬고 싶군.”

“그러면 위스키라도?”

위스키라.

한잔하고 싶긴 했지만, 그는 책상을 바라봤다. 회의에 갔다 온 사이, 서류가 또 쌓여 있었다.

분명 그 얄미운 크리스가 가져온 것일 거다.

“아니, 처리해야 할 서류가 있어서. 술은 어려울 것 같군.”

그러자 란돌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러면 차(茶)는 어떠십니까?”

“차?”

“네, 마침 피로를 풀어주는 차가 들어왔는데.”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그가 평소에도 늘 즐기는 음료다.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느낌이 좋아 그렇지 않아도 차분히 한잔 마시고 싶긴 했다.

저 덜렁거리는 란돌이 끓이는 차는 영 깊은 맛이 안 나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그녀가 그렇게 차를 잘 달인다고 했지?’

아버지인 민체스터에게 몇 번이고 칭찬을 들었었다. 엘리제, 그녀가 끓이는 차는 그야말로 론도 최고라고.

‘한번 끓여 달라 해야겠군.’

그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한 번뿐이겠는가?

나중에 같이 살게 되면 매일 그녀의 차를 마실 수 있을 것이다.

‘빨리 약혼. 아니, 결혼해야겠어.’

생각이 꼬리를 물며 자연스레 그녀가 떠올랐다.

차뿐 아니라, 그녀와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이 서류를 던져 버리고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은데.

‘엘리제.’

그때, 란돌이 돌아와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뜨거우니 조심히 드십시오.”

“흠?”

린덴은 차를 보며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굉장히 그윽한 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저 란돌은 황궁 시종이지만 다도에는 영 재능이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향이 나지? 다른 시종이 끓인 건가?

살짝 맛을 본 다음에는 더 놀랐다.

이전 란돌이 달인 것과는 전혀 다르게 깊은 맛이 느껴졌던 것이다. 풍미도 제법 자신의 취향에 맞았다.

“누가 이 차를 끓인 거지?”

“네?”

“네가 이런 차를 달였을 리는 없고. 이 밤에 누구에게 부탁한 것이지?”

“제가 끓인 것입니다.”

“그대가?”

그 믿을 수 없다는 표정에 란돌은 억울하단 얼굴을 했다.

“네, 새로운 레시피대로 달여 보았습니다.”

“새로운 레시피? 누가 알려준 거지?”

“데임 클로랜스께서 알려주셨습니다.”

그 의외에 말에 황태자는 눈을 번쩍 떴다.

데임 클로랜스? 엘리제, 그녀가?

란돌에게 차 달이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왜?

“그녀가 왜 너에게 차 달이는 법을 알려준 거지?”

“오늘 오후에 잠깐 오셨었는데. 전하께서 요즘 과로하신지 물어본 다음, 찻잎을 주면서 레시피를 알려주고 갔습니다.”

“……!”

린덴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가 자신을 찾아왔다고?

“그 말 정말인가?”

“네?”

“그녀가 정말 나를 찾아왔느냐고.”

다급한 물음에 란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 오셨다 가셨습니다. 특별히 중요한 용무로 온 것은 아니니, 따로 전하께 알리지는 말라 하시더군요.”

그 말에 린덴은 저 눈치 없는 시종에게 화라도 내고 싶었다.

그녀가 찾아왔으면 당장에 알려야지! 모를 뻔하지 않았는가!

그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지금 이따위 서류나 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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