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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23화 (123/194)

00123  5-3 상흔  =========================================================================

3장 상흔 - 2

민체스터는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다 짜증 났다.

한번 밉기 시작하면 한없이 미운 법인가 보다.

저렇게 우는 것도, 저렇게 울면서도 자신을 걱정하는 것도 다 싫은 것을 보면 말이다.

‘젠장.’

그는 비틀거리며 시내의 펍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지만, 잔뜩 취하지 않으면 못 버틸 것 같았다.

“무얼 드릴까요, 손님?”

“흑맥주.”

“네.”

민체스터는 커다란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한 잔 더.”

“소, 손님?”

“빨리.”

그렇게 민체스터는 한없이 술을 들이켰다.

마치 마시고 죽을 사람처럼.

“소, 손님. 이제 그만…….”

“괜찮아…… 한 잔…… 더…….”

펍의 주인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한눈에 봐도 귀족가의 공자로 보이는 저 청년은 이미 술에 떡실신한 상태다.

그런데 끝없이 술을 달라고 하니.

‘같이 온 일행은 없나? 혼자 온 건가?’

펍의 주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그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마시는 게 좋겠어요, 밀러.”

밀러.

민체스터가 가명으로 쓰는 이름이었다.

“……누구?”

민체스터는 흐릿한 눈을 들었다.

희미한 시선 속으로 흑발의 여인이 보였다.

“레…… 베카?”

차분한 인상의 미녀.

테레사의 친구인 레베카였다.

“그만 마시세요. 이런 모습, 당신답지 않아요.”

그 말에 민체스터는 피식 웃었다.

“나답지 않아? 나다운 게 뭔데?”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뺏겼는데 나다운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하아.”

한숨을 내쉰 레베카는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펍의 주인에게 말했다.

“한 잔 더 주세요.”

“네, 네.”

민체스터가 그 술잔을 받아가려는 순간, 레베카가 낚아챘다.

“……?”

“제가 마실 거예요.”

그러고 그녀는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차분한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에 민체스터의 눈이 커졌다.

“레…… 베카?”

테레사와 어울리며 레베카와도 많은 만남을 가졌지만, 그녀가 술을 저렇게 마시는 것은 처음 봤다.

“하아.”

탁. 술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말했다.

“한 잔 더 주세요.”

“……?!”

그리고 벌컥벌컥.

“레, 레베카?”

민체스터는 완전히 당황했다. 지금 뭐하는 거지?

어느덧 3잔을 한 번에 비워 버린 흑발의 여인은 붉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아파하세요?”

“그거야…….”

사랑했으니까.

민체스터는 말을 삼켰다.

그런데 레베카가 취기가 오른 얼굴로 말했다.

“왜 모르세요?”

“……뭘?”

“당신이 그렇게 아파하면, 저는 더 아프다는 것을.”

“……?!”

민체스터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말이지?

레베카. 흑발의 차분한 인상의 여인은 외모만큼이나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그걸 왜 모르세요?”

***

“……!”

민체스터는 번쩍 눈을 떠 꿈에서 깨어났다.

어느덧 전신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꿈이군.”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꿈. 철없던 젊은 시절의 꿈이다.

“참, 어렸지.”

정말 어린 시절이었다.

엘도, 자신도.

천방지축이었던 엘. 그리고 어른스러운 척했지만 속 좁은 아이였던 자신.

‘진정 어렸던 것은 엘이 아니라, 나였지.’

그의 표정이 후회로 물들었다.

‘내가 조금만 성숙했다면. 그랬다면, ‘그날’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까?’

“하아.”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깊고 깊은, 괴로움과 후회로 점철된 한숨이었다.

그는 명군이었다. 시민 모두가 그를 칭송한다.

하지만 그는 실패자였다.

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할 텐데.

“주여.”

민체스터는 방구석에 놓인 십자가를 바라봤다.

“이런 죄인인 저도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을 하는 그는 이전보다 부쩍 마르고, 기력 없어 보였다.

그렇게 깊고 깊은 밤.

창밖은 펑펑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그날의 그때처럼.

론도가 하얗게 변했다.

***

간밤에 수북이 내린 눈으로 론도가 하얗게 변했다.

희대의 명군, 뇌제 민체스터의 통치 아래 번영을 누리고 있는 론도의 시민들은 밝은 얼굴로 아침을 맞았다.

그리고 어젯밤 엘리제와 린덴이 서로를 마주 봤던 화이트가(街)의 도로.

이른 아침부터 한때의 마차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간밤에 잘 주무셨소, 백작?”

“그냥 그렇소이다. 요즘 꿈자리가 늘 뒤숭숭하구려.”

메기 같은 인상의 귀족 남자가 퉁명스레 인사를 받았다.

메르키트 백작.

제국 상원의 위원장이자 귀족파 서열 2위의 대귀족이었다.

“눈 때문에 늦지 않았나 모르겠구려.”

클로랜스 저택 앞에 모여들고 있는 마차들은 모두 황태자의 적, 3황자의 귀족파 일원들의 것이었다.

물론 그들이 이곳에 모인 것은 클로랜스 가문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바로 클로랜스 저택의 바로 건너편인 차일드 가문에서 회동하기 위함이었다.

“어쨌든 빨리 들어갑시다.”

서대륙의 돈줄을 쥐고 있는 가문답지 않게 검소한 차일드 저택에 들어가며 상원 위원장 메르키트 백작은 고개를 돌렸다.

‘클로랜스.’

귀족파의 대적인 황제파의 수장 가문.

그리고 최근 그들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인물이 사는 곳.

오늘 귀족파의 귀족들이 차일드 가문에 모이는 이유는 바로 그 ‘위협이 되는 인물’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였다.

“이걸 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

“그러게 말이오.”

“모이긴 모였지만, 답이 나올지.”

차일드 가문의 회의실에 모여들며 귀족파의 귀족들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논하고자 하는 인물의 곤란성 때문이다.

최근 그들 귀족파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인물.

그 인물은 차기 황제인 황태자도, 재상인 엘 후작도, 크림전쟁 후 군부의 실력자로 떠오르는 렌 남작도 아니었다.

바로 엘리제 드 클로랜스.

등불을 든 여인(Lady with the Lamp)이었다.

론도 시민, 아니, 제국 전체에서 그 누구보다도 압도적인 인기와 지지를 얻고 있는 제국의 예비 퍼스트레이디.

바로 그녀가 그들 귀족파를 가장 크게 위협하고 있었다.

***

고풍스럽지만 약간은 낡은 회의실의 원탁 테이블에 귀족파의 핵심 인물들이 모여 앉았다.

그들이 모두 모인 후, 끼익 문이 열리며 도도하고 당당한 인상의 미녀가 들어왔다.

국제 금융 재벌 차일드 가문의 차기 당주(當主), 유리엔 드 차일드였다.

그 뒤를 따라 날카로운 인상의 장년인, 귀족파의 수장, 차일드 가문의 암셀 후작이 들어왔는데 지팡이를 짚은 모습이 수척해 보였다.

“모두 모였습니까?”

“네, 후작님.”

과거 엘리제와 대면했을 때와 다르게 많이 마른 모습. 눈빛만은 여전히 형형했지만, 어딘지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곧 전하께서 오실 테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며 한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전하를 뵙습니다!”

모두가 남자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3황자 미하일 드 로마노프였다.

꽃처럼 화사한 그의 얼굴은 이전 엘리제를 대할 때와 달리 한없이 딱딱했다.

걸음걸음에 정장 허리춤에 매달린, 검제(劍帝)의 상징인 비천검(飛天劍)이 흔들렸다.

“모두 앉으시죠.”

“네, 전하.”

미하일은 가장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 그 좌우에 귀족파 서열 1위 암셀 후작과 서열 2위 메르키트 백작이 자리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모임을 갖게 된 이유는 최근 시민들 사이에서 압도적인 지지율을 얻고 있는 엘리제 드 클로랜스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미하일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가 뭐라고 하려는 순간, 한 중년 귀족이 손을 들어 발언했다.

얼마 전까지 동방의 대국 청에 영사로 나가 있던, 외교계의 거물 류스 자작이었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라면 예비 황태자비 아닙니까?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녀가 우리에게 왜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메기, 메르키트 백작은 질문한 류스 자작을 바라봤다.

“자작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데임 클로랜스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것 같구려.”

“들어는 봤습니다. 워낙 유명하니까…….”

그녀.

데임 클로랜스는 현 제국의 가장 유명한 명사(名士)였다.

청에 파견 나갔던 류스 자작조차도 그 이름을 들어봤을 만큼, 명성이 높았다.

“2년 전, 예비 황태자비의 신분으로 빈민 구제 병원에서 빈민을 위해 일했고. 2차 론도 대역병에서 론도를 구했고, 크림전쟁에 참전, 부상병들의 사망률을 20배나 낮췄으며, 등불을 든 여인으로 병사들에게 봉사. 또 전쟁을 승전으로 이끄는 공을 수차례나 세웠고, 현재는 황실십자병원의 의사로 수많은 사람을 살리고 있지요.”

류스 자작은 청에서 전해 들은 그녀의 대표적인 업적들을 거론했다.

불과 2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그것도 어린 소녀가 이루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업적들이었다.

“황제파인 클로랜스 가의 영애이지만, 같은 제국인으로서 존경할 만한 인물이라 생각했습니다만…… 그녀가 왜 우리에게 위협이……?”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데임 클로랜스는 정치적 이념을 떠나 존경할 인물이었지, 적대할 인물은 아니라 생각한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의 업적 중 적대할 만한 것이 어디 있는가? 숭고하단 말이 어울리는 업적들이었다.

귀족파 서열 2위, 메르키트 백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문제요. 그녀는 남들은 사교계에서 생각 없이 하하 호호할 어린 나이에, 그것도 황태자비가 될 지고한 신분으로 믿을 수 없는 일들을 연거푸 해냈소. 그래서 현재 론도, 아니, 제국 전체에서 시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여인이 되었다오. 지금 길거리에서 그녀 욕을 한마디라도 하면 분노한 시민들에게 곧바로 돌팔매를 맞을 것이오. 그만큼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가 된단 말인가?

그녀가 해낸 일들을 보면, 그런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메르키트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그녀의 남편이 될, 황태자의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소. 문제는 바로 그것이오.”

“……!”

류스 자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말은…….”

“그렇소. 원래 시민들의 황태자에 대한 지지율은 우리 3황자 전하에 비해 훨씬 낮았소. 그런데 그게 최근 역전되고 있는 것이오.”

류스 자작은 침음을 흘렸다.

생각지도 못한,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원래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의 지지율은 3황자에 비해 훨씬 낮았다.

시민들에게 친근한 검제에 비해 훨씬 딱딱한 이미지였던 탓이다. 시민 중 자신들에게 친근한 3황자가 황제가 되길 내심 바라고 있던 자가 많았었다.

“우리 귀족파가 황태자에 비해 가장 큰 우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바로 3황자 전하를 향한 시민들의 지지였소. 계승권에서는 밀리지만, 시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3황자 전하라는 명분이 있었던 것이오. 그런데 그 지지가 황태자를 향해 돌아서고 있소. 바로 그 등불을 든 여인 때문에.”

모두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사실 그들 귀족파가 3황자를 황제로 추대할 수 있는 가장 큰 명분은 시민들의 지지였다.

-계승 서열이 밀리더라도, 시민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바로 검제 3황자 전하이시다!

이런 명분으로 3황자를 황제로 추대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지지가 황태자를 향해 돌아선다면, 명분 자체가 사라진다.

그러면 정쟁 자체를 벌일 수가 없었다.

정통성에서도, 실력에도, 명분에도 밀리는 데 무슨 싸움을 하겠는가? 군사적으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뒤집을 도리가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이 상황을 손써야 하오. 그게 지금 우리가 오늘 모인 목적이오.”

메르키트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 작품 후기 ============================

화요일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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