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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24화 (124/194)

00124  5-3 상흔  =========================================================================

3장 상흔 - 3

“…….”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 누군가 조심히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손을 씁니까? 데임 클로랜스가 의사 일을 하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다른 이도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황제 폐하께서 개정안까지 내지 않았습니까? 황태자비가 되어도 의사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모두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문제는 알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다. 환자를 위한 인술을 펼치는 것을 누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제 와이프가 다음 주 데임 클로랜스께 위암 수술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는데…….”

“저도 아버지의 수술을 부탁드려야 하는데…….”

“제 아들의 종기 수술도…….”

“저도 다음에 진료를 받기로 예약을…….”

귀족들이 눈치를 보며 조심히 말을 꺼냈다.

그렇다.

엘리제는 명실상부한 제국, 아니, 세계 최고의 외과의사. 그녀만 바라보고 있는 환자가 수도 없었다.

그리고 병은 귀족파의 귀족들에게도 공평하게 찾아온다.

그들 가족 중 그녀가 아니면, 그냥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할 환자가 꽤 있었다.

이미 치료를 받고 있는 이도 있고, 곧 진료가 예약된 이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의사 일을 못하면 낭패를 보는 것은 오히려 그들이었으니까.

그 반응들에 메르키트의 눈썹이 꿈틀했다.

콰앙!

그는 거칠게 책상을 내려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 그게 무슨 안이한 소리들이오?! 지금 상황을 모르는 거요?”

“…….”

“만약 우리가 정쟁에 밀린다면, 그래서 저 린덴 드 로마노프가 황위에 오른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 같소? 그는 절대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오. ‘그날’의 일을 벌써 잊은 것이오?!”

그 물음에 모두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그날’.

모두의 머리에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황후인 레베카 드 로마노프와 1 황녀인 이블린이 백원(百願)의 궁에서 한 줌의 피로 변한 날.

그날 이후 백원의 궁은 혈탑(血塔)이란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어렸던 린덴은 눈앞에서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을 목격했고, 절대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하나의 염원(念願). 복수를 위해 황위에 오르려 하고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그건…… 우리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소.”

“상황이 그렇게 되었을 뿐인데…….”

당시 사건에 깊게 연루되지 않았던 귀족들이 변명하듯 말했다.

하지만 메르키트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걸 누가 모르오? 문제는 황태자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란 거요. 그가 황제가 되는 순간. 이 론도에는 피바람이 불 것이오.”

“…….”

“그리고 엄밀히 말해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그날의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자는 아무도 없소.”

“하지만 그래도…….”

그때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소 3명은 죽겠지.”

3황자 미하일 드 로마노프였다.

미하일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빙글 웃었다.

“바로 나와 내 어머니, 외숙 말이야.”

그의 어머니, 외숙.

바로 1황비인 마리엔과 차일드 가문의 가주인 암셀 후작을 뜻한다.

둘 모두 ‘그날’의 비극의 주역들. 만약 린덴이 황제가 된다면 그 둘은 무조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도 죽겠지.’

그 둘의 죽음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으니까. 그러니 그도 죽게 될 것이다.

‘답답하군.’

미하일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안다.

당시 자신의 어머니와 숙부는 큰 잘못을 했다. 어떤 핑계를 대도 용서받을 수 없는.

그러니 린덴의 복수는 정당하다.

하지만.

‘내 어머니란 말이야. 아무리 잘못했다 해도. 그리고 내 외숙이고. 제길.’

어떻게 아들로서 어머니가 죽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그녀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는 사실 황위에 관심 없다.

하지만 린덴이 황위에 오르면 어머니가 죽는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황위에 올라야 한다.

싸움의 대가가 자신의 목숨이라도. 그래도 싸워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아.’

속으로 깊게 한숨을 내쉰 그는 생각했다.

‘여행이나 가고 싶군.’

미하일은 자신의 허리춤에 차인 검을 바라봤다.

비천검(飛天劍).

하늘을 난다는 뜻의 검.

과거의 아픔에서 훨훨 벗어나라고 친우가 선물해 주었던 검이다.

그 이름 그대로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털고 여행을 떠나면 얼마나 좋을까?

이전처럼 항주의 소호에서 배를 띄어놓고 친우와 술이나 먹고 싶었다.

‘불가능한 일.’

그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백작이 방금 한 이야기는 어떻게 할지 다들 잘 생각해 보자고.”

“전하.”

“다음 회동은 크림전쟁의 승전식이 끝난 다음으로 하지.”

곧 있으면 크림전쟁의 승전식이었다.

3황자가 모임을 파하자, 다들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예를 표하고 사라지려 할 때, 미하일이 가만히 메르키트 백작을 불렀다.

“백작.”

“네, 전하?”

“백작은 잠시 나를 보지.”

“……?”

의아한 얼굴로 백작이 남자, 미하일이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백작. 그거 알지?”

“네?”

“내가 백작을 참 좋아하는 것.”

“아…… 네. 압니다.”

메르키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뿐 아니라 저 미하일은 사람이 좋아 누구든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 이야기를?

그뿐만 아니라 뭔가 분위기도 이상하다. 웃고 있는데 왠지 섬뜩한 느낌?

“내가 황위에 오르면 백작의 공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네,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백작.”

“네?”

미하일이 가만히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

메르키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리제 말이야. 데임 클로랜스.”

“…….”

미하일이 웃으며, 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녀한테 털끝 하나라도 손댈 생각하지 말라고.”

“……!”

“난 백작을 참 아끼거든? 그러니 백작이 허튼 생각을 하면 참 슬플 거야.”

메르키트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검제.

서대륙 최강검이, 동방에서 가장 강한 무인 중 하나인 동방 오존(五尊)이라 불리던 미하일이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거역할 수 없는 위압감이 담긴 눈빛.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메르키트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데…… 어째서?”

메르키트는 조심히 물었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는 현재 3황자의 자리를 가장 위협하는 일종의 적이었다.

그녀 때문에 시민들의 지지가 황태자에게 넘어가고 있는데? 그래서 싸움도 못하고 질 판인데?

“왜긴?”

하지만 미하일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답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니까 그렇지.”

***

혈탑의 비극.

과거 황후인 레베카는 모욕적인 누명을 뒤집어쓰고, 백원의 궁에 유폐되었다.

물론 모두가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녀가 실제로 그런 추한 잘못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하지만 누구의 조작인지, 너무나 명확한 증거들이 나왔고 그녀는 그 누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폐하, 아닙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그런 잘못을 저지를 리가 없다는 것을?!’

레베카는 눈물로 사랑하는 남편에게 빌었고, 1황녀 이블린도 빌었다.

아직은 어렸던 2황자 린덴은 그저 울음만 터뜨렸다.

하지만 민체스터는 침묵했다.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들어주지 ‘못했다’.

그 추악한 죄의 증거를 들이민 것이 1황비 마리엔과 차일드 가문이었기 때문에.

물론 그도 알고 있었다.

레베카가. 어느덧 그가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게 된 황후가 그런 추악한 잘못을 저지를 리가 없다는 것을.

하지만 당시 갓 황제가 된 그는 무력했다.

지금이야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강력한 황권을 다졌지만, 과거에는 대륙 전체를 쥐고 흔드는 차일드 가문을 거스르기 어려웠다.

특히나 그가 다른 황자를 제치고 황위에 오른 것은 클로랜스 가문의 도움과 더불어 차일드 가문의 도움이 막대했으니까.

또 그들 손에 명확한 증거까지 쥐어져 있으니. 도저히 그들을 거스르며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결국, 그는 그렇게 말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황후는 유폐되었고, 그녀를 향해 비난이 쇄도했다.

‘출신이 천한 것은 역시 어쩔 수가 없어.’

‘더러운 황후를 폐위시켜라!’

애초에 평민 출신인 그녀를 황후에 올렸을 때도 반대가 막심했었다.

많은 귀족, 특히 1황비 마리엔을 지지하는 차일드 파의 귀족들이 황후의 폐위를 주장했다.

그런 상소가 올라올 때마다 레베카는, 그 흑발의 차분한 아름다움을 지녔던 그녀의 영혼은 점점 말라 비틀어져 갔다.

그리고 그렇게 지옥 같던 어느 날.

어렸던 린덴은 울면서 백원의 궁을 찾아갔다.

엄마를 보고 싶어서.

물론 가드의 제지로 만나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엉엉 울면서 엄마를 부르고 싶어서.

그리고 백원의 궁에 어린 린덴이 도착한 순간.

쿵!

검은 무언가가 그의 눈앞으로 떨어졌다. 그게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눈앞이 핏빛으로 변했다.

어머니 레베카와 누이 이블린이었다.

말라 비틀어가던 그들이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아…….’

자신의 눈앞에서 한 줌의 피로 변한 어머니와 누이를 본 어린 린덴의 세상이 정지했다. 그렇게 그의 세상이 무채색의 지옥으로 변했다.

‘그날’, 혈탑의 비극 이후 린덴은 항상 같은 꿈을 꾸었다.

어머니와 누이가 나오는.

그들이 핏물로 변하는 꿈을.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그저 엄마의 손을 잡고 우는 것밖에 못 하던 ‘바보 린덴’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항상 다른 사람을 향하던 미소가 사라졌다. 표정을 잃은 아이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의 염원.

복수.

오로지 그 하나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아이는 자신의 모든 삶을 바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렸던 린덴은 너덜너덜한 가슴에 칼을 담았다.

***

“……!”

린덴은 번뜩 눈을 떴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생각했다.

‘또 그 꿈이군.’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그는 ‘그날’ 이후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그들의 꿈을 꾸었으니까.

심지어 이제는 꿈을 꾼다고 해서 아프지도 않았다.

아프려고 해도 아플 가슴이 남아 있어야 고통도 느낄 수 있는 법이니까.

“잠깐 잠이 들었나 보군.”

어제 엘리제와 만나고 돌아온 후 그 얄미운 크리스가 던져준 서류를 처리하느라 너무 늦게 잤다.

한 두세 시간쯤 잤나?

피로한 상태에서 이른 시간에 일어나 다시 업무를 보다 깜빡 존 모양이다.

악몽 때문일까?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와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제.”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무채색의 지옥에서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온 소녀. 그리고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이 된 그녀.

어제 보고 왔음에도 그녀가 또 보고 싶었다. 간절히.

============================ 작품 후기 ============================

내일 10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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