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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25화 (125/194)

00125  5-3 상흔  =========================================================================

3장 상흔 - 4

그녀를 떠올리자 놀랍게도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보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싫어하지…… 않아요…… 전하를…….’

그 말들을 떠올린 순간 다시 가슴에 벅참이 차올랐다.

간질간질하면서도, 터질 것 같은 느낌. 이게 도대체 무슨 감정일까?

‘보고 싶군.’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로.’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마치 금단 증상이 일어나는 것처럼 그녀가 생각났다.

보고 싶었다. 함께 있고 싶었다.

그리고 작은 손을 만지고 싶었다. 품 안에 가두고 싶었다. 그 이마에, 붉은 입술에 입술을 맞추고 싶었다.

결국, 그는 충동을 참지 못했다.

“란돌.”

“네, 전하.”

“비서관은?”

“전하께서 명하신 신무기 개발 건으로 개발청을 방문 중입니다. 기밀을 요하는 일이라서 직접 갔습니다.”

마침 잘됐다. 그 얄미운 크리스가 없을 때가 기회였다.

“잠시 나갔다 오마.”

“전하? 어디에 가십니까?”

“황실십자병원.”

그 말에 눈치 없는 시종이 물었다.

“병원엔 무슨 일로……?”

그는 짧게 답했다.

“시찰 간다.”

그래, 시찰.

그녀를 시찰하고 와야겠다.

***

한편 그때 엘리제는.

“쿨럭. 쿨럭.”

밤사이 추운 공기를 계속 마신 탓일까. 감기에 걸려 있었다.

하얀 마스크를 낀 채 연신 기침을 하는 그녀를 보며 그레이엄이 걱정스레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데임?”

“아, 네. 조금 감기에 걸려서요. 괜찮아요.”

하지만 얼굴이 빨간 게 가볍게 걸린 것이 아닌 것 같다.

열도 제법 나 보인다. 못해도 38도 이상?

그레이엄은 못마땅하게 말했다.

“왜 이렇게 자주 감기에 걸리는 것입니까?”

내 가슴이 아프게.

그레이엄은 그 말은 삼켰다.

옆에서 바라만 보는 것도 힘든데, 아픈 모습을 보는 것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제가 원래 몸이 약해요.”

“검사라도 받아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번 가을부터 제가 본 것만 해도 3번째입니다.”

그 걱정 어린 말에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이전 삶 때도 툭하면 감기에 걸렸었다. 원체 몸이 약한 탓이다.

‘조금 튼튼한 몸이면 더 좋긴 할 텐데.’

할 일은 많은데 자꾸 아프니 불편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그레이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조금 쉬기라도 하십시오. 다음 수술은 제가 대신할 테니.”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데임.”

하지만 엘리제는 굳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 정말로 괜찮아요. 큰 감기도 아닌 걸요.”

지구에서 의사로 일할 때도 감기에 걸린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의사도 사람이니 이런저런 잔병치레를 한다.

하지만 입원할 정도로 중병이 아닌 한, 아프다고 일을 쉬는 의사는 한 명도 없다.

심지어 인턴, 레지던트 시절에는 맹장염 같은 수술을 받고 곧바로 일하는 경우도 많다. 그녀도 아프다고 쉬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결국 한숨을 내쉰 그레이엄이 말했다.

“그러면 이리로 와보십시오. 열도 나는데, 제가 간단히 진료라도 해드리겠습니다. 계속 기침하니 가슴 청진도 해봐야 할 것 같고요.”

“아, 네. 감사해요.”

엘리제는 고마움을 표했다.

아무리 의사라도 자기 몸 진료는 정확히 못한다. 그가 봐주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녀는 진료를 위해 그레이엄의 앞에 앉았다.

“간단히 바이탈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네, 선생님.”

그녀는 맥박을 측정하기 위해 그레이엄에게 손목을 내밀었다.

하얀 팔목을, 마음속으로만 바라보던 소녀의 팔목을 잡으려는 순간 그레이엄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곧 얼굴을 굳히며 생각했다.

‘정신 차려, 그레이엄. 진료 중에 무슨 생각이야.’

최대한 머리의 잡생각을 떨쳐내며 진료에 열중했다.

“분당 맥박 108회군요. 열이 꽤 납니다.”

“아, 네.”

“특별히 어떤 게 주로 불편하십니까? 목은 안 아픕니까?”

“목은 괜찮아요. 기침이 주로 나는데, 폐렴 같은 증상은 없어서 폐렴보다는 일반적인 상기도 감염일 것 같아요.”

엘리제는 추정 진단을 말했고, 그레이엄도 동의했다.

단순 감기로 보이긴 했다.

다만 기침이 심해서 폐렴을 확인 위해 청진을 해봐야 했다.

“네, 청진기로 폐 소리만 확인해 보고 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선생님.”

엘리제는 웃으며 말했다.

처음 그레이엄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는 자신을 엄청 귀찮아해서 쫓아내려 부랑자 병실에 버려두었는데.

어느덧 그와도 많이 가까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돌아 앉으십시오.”

청진기를 든 손이 얇은 진료복을 입은 그녀의 등 뒤에 올라갔다.

“숨 크게 들이쉬십시오. 그리고…….”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낮은 음성이 그들 사이를 울렸다.

“지금…… 뭐하는 짓들이지?”

불쾌감이 담겨 있는 목소리.

황태자 린덴이었다.

“전하? 여긴 어떻게?”

엘리제가 놀라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린덴은 답하지 않았다. 린덴의 눈이 그녀의 등 위에 올라가 있는 그레이엄의 손에 꽂혔다.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물었다.”

“……!”

엘리제는 당황했다.

갑자기 이곳엔 왜 온 것이지? 아니, 그것보다 왜 저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시지? 어젯밤에 헤어질 때만 해도 기분이 좋으셨는데?

하지만 같은 남자인 그레이엄은 그가 왜 불쾌해하는지 바로 눈치챘다.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공손히 말했다.

“데임께서 감기 기운이 있어 잠시 진료를 보던 중이었습니다, 전하.”

“…….”

그 말에 린덴은 입을 다물었다.

감기에 걸렸다고? 그녀가?

엘리제의 얼굴을 살피니 과연 눈가가 발그레했다. 마스크 안으로 콜록콜록 기침까지 하고 있고.

“엘리제. 이리로 와봐라.”

“아…… 괜찮아요, 전하. 그냥 살짝 걸린 거라…….”

“명령이다. 와.”

머뭇거리며 다가가니, 그가 갑작스레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강렬히 느껴지는 그의 느낌에 그녀의 얼굴이 다른 의미로 붉어졌다.

“저, 전하?”

그녀가 그레이엄을 의식하며 말을 더듬었다.

황태자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아프라고 했지?”

아까의 노여움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 담긴 목소리.

그건 짙은 걱정이었다.

“……죄송해요.”

“아프지 마라. 네 모든 것은 내 거니까. 네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내뱉는 숨결까지도. 모두 다 내 것이니 아프지 마. 명령이다. 무엇보다…….”

네가 아프면 내가 훨씬 아프니까.

린덴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걱정과 노골적인 애정에 엘리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네, 전하.”

그는 그렇게 그녀를 안고 있다 정말 그녀의 몸에서 고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안 되겠군. 좀 쉬어야겠어.”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리고 할 일이 많아서…….”

“할 일?”

“네, 이제 곧 수술도 3개 들어가야 하고, 끝나고 강의도 나가야 하고, 보안 정책 담당자와 미팅도 가져야 해요. 그리고…….”

말을 들을수록 린덴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이 일 중독 여자가! 도대체 할 일이 뭐가 이렇게 많단 말인가? 몸도 안 좋으면서.

“됐어. 다 취소해. 명령이다.”

“전하?”

엘리제가 놀라 절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 제가 해야 하는 수술이에요. 강의도 제 강의이고요. 다 제 일인데 아프다고 안 할 수는 없어요.”

책임감 강한 엘리제다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린덴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녀가 아픈데 그따위 것이 문제겠는가?

“됐어. 다 필요 없어.”

“전하?”

“자네. 그레이엄이라고 했나?”

가만히 그들을 보던 그레이엄이 고개를 숙였다.

“네, 전하.”

“이 병원에는 다른 의사는 없나?”

“……!”

“내 것이 될 그녀다. 그런데 이렇게나 많은 일을 해야 하는가? 자네들은 뭐하는 거지?”

다소 무례하긴 했지만, 그 말이야말로 그레이엄이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저 일 중독 소녀는 본인 스스로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해서 탈이었다.

물론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수술이나 일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픈데.

“데임께서 하시기로 예정된 3건의 수술. 다 제가 집도하겠습니다.”

“선생님?!”

“괜찮습니다. 데임. 이래 뵈어도 나름 저도 젊은 천재라 불리던 의사였습니다. 아니면 저를 못 믿는 것입니까?”

“…….”

엘리제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고, 린덴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뺀질뺀질해 보이는 게 생긴 것부터 마음에 안 드는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은 나름 마음에 들었다.

“그래, 그 수술은 다 네가 처리하도록. 아니.”

“……?”

“앞으로 그녀가 할 수술 중 간단한 것은 다 자네가 했으면 좋겠군.”

그레이엄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의 지엄한 명.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전하!”

엘리제가 당황해 그를 불렀지만, 린덴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아카데미 강의?”

그는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의 뒤에는 황실십자병원의 원장이자 전(前) 황궁 어의인 밴 자작이 황태자의 행차에 헐레벌떡 마중 나와 있었다.

밴 자작은 무언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 강의는 다른 교수를 보내겠습니다.”

“자작님? 그 강좌는 제 이름으로 되어 있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데임만큼은 아니어도 그 분야의 정통한 교수로 보낼 테니. 확실히 데임께서는 조금 쉬실 필요가 있습니다.”

황태자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무슨 미팅이 있다고 했나? 밴 자작.”

“네, 전하. 오후에 행정부의 보건 정책과와 데임께서 미팅을 가질 예정입니다.”

“취소시켜.”

엘리제는 깜짝 놀라 황태자를 올려다보았다.

“전하!”

하지만 황태자는 독선적인 독재자처럼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잠자코 가만히 있어! 하는 눈빛.

결국, 그녀는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 황태자를 누가 말리겠는가?

‘교수실로 돌아가서 잠시 쉬다 밀린 논문이나 마무리 지어야겠구나.’

그러나 황태자는 그녀를 이대로 놔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엘리제. 너는 나를 따라온다.”

“네? 어디로?”

“따라와라.”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이끌었다.

그렇게 엘리제는 린덴에게 납치당했다.

***

린덴이 그녀를 데려간 곳은 다름 아닌 그의 집무실이었다.

그의 성격을 나타내듯 마치 자로 잰 듯 깔끔한 방.

심지어 수북한 서류조차도 질서를 이루고 있었다. 너저분한 엘리제의 교수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

“전하? 이곳엔 어째서?”

엘리제는 그가 왜 자신을 이곳에 데려왔는지 의아해했다.

지난 삶, 부부로 지낼 때도 그의 집무실에 와본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눈이 묻은 코트를 란돌에게 넘기며 짧게 말했다.

“이곳에서 쉬어라.”

“네?”

“내 옆에서 쉬어.”

그러며 린덴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놔두면 또 어딘가에서 일하려고 할 것 아닌가? 그러니 네가 쉬는 것을 내가 옆에서 두 눈으로 지켜봐야겠다.”

“하지만…….”

엘리제는 머뭇거렸다.

황태자의 집무실에서 쉬라니? 그게 말이 되는가?

물론 쉬자면 못 쉴 것은 없다. 저 옆에 침대만큼 포근해 보이는 소파에 누우면 될 테니까.

하지만 이곳이 황태자의 집무실이란 것과 그와 단둘이 한 방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머뭇거리게 했다.

싫으냐고?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마음을 고백한 게 불과 어제이다. 그런데 곧바로 단둘이 한 방에 있어야 한다니.

무언가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면서, 조금 민망했다.

============================ 작품 후기 ============================

내일 11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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