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9 5-4 첫키스 =========================================================================
4장 첫키스 - 4
소녀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자, 민체스터가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 클로랜스 후작가의 영애이자 예비 황태자비의 신분으로 전쟁에 참전. 초대 의무사령관으로 임명.”
그러고 그녀의 공을 읊었다.
“전쟁 초기 몽셀 왕국의 준동을 간파하여 2군단의 고립을 막고, 의무사령관으로 의료 개혁을 시행하여 부상자들의 사망률을 20배 이상 감소시킴. 또 코프스크 대회전시 적의 계략을 간파하여 대승을 이끎. 그리고 공화국의 전염병 전파 작전 시 의무사령관으로 대응하여 전염병을 차단하는 공을 세움.”
다른 수훈자들에 비하여 공적의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나하나가 모두 어마어마했다.
그녀가 세운 공 중 하나라도 없었으면 공화국에 이런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코프스크 대회전이나, 전염병 같은 경우는 패전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상기 공으로 황실십자훈장을 내리노라.”
“감사합니다.”
엘리제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수만 군중 앞에 섰음에도 떨림 없는 의젓한 태도. 역시 엘리제다웠다.
민체스터는 흐뭇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받을 추가적인 포상을 말했다.
“또한, 상기 공으로 엘리제 드 클로랜스에게 계승 자작의 위(位)와 크로머 지역을 봉토로 내리노라.”
자작(viscount).
아니, 여자작(viscountess).
이로써 엘리제는 성 앞에 레이디를 붙일 수 있는 작위의 주인이 되었다.
단순한 귀족가의 아가씨를 뜻하는, 이름 앞에 레이디를 붙이는 ‘레이디 엘리제’나 준작위인 ‘데임 클로랜스’가 아닌, 오롯이 한 작위의 여주인을 뜻하는 ‘레이디 클로랜스’가 된 것이다.
더구나 봉토.
봉건제가 몰락한 후, 황실이 귀족에게 영지를 내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특히 크로머 지역은 황실 직영지로 있던 동부 해안가의 풍광 좋은 휴양지로 굉장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땅으로, 그녀의 공이 워낙 컸기 때문에 상급으로 내린 것이다.
“공에 비해 과분한 상에 감사합니다.”
엘리제는 당황하지 않고, 감사를 표했다.
모르고 있었다면 생각지도 못한 작위 수여와 봉토에 놀랐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사전에 이야기를 들었던 상태였다.
그리고 그 포상 수여가 끝나자 다시 우레와 같은 박수가 대경기장을 흔들었다.
“우와아!”
“등불을 든 여인 만세!”
“황태자비 만세!”
“레이디 클로랜스! 레이디 클로랜스!”
군웅들은 그녀의 새로운 호칭인 ‘레이디 클로랜스’를 열광했다.
상이 과하다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공화국에 이런 대승은 불가능했다. 이겼어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어쩌면 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녀는 ‘등불을 든 여인’이다.
바로 자신들과 함께 울고 웃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민들은 마치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기뻐하며 환호를 했다.
그 환호에 엘리제는 단상에서 몸을 돌려 군웅들을 바라보았다.
‘…….’
무언가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이전 삶, 바로 이곳에서 욕을 들으며 단두대에 처형당했다.
그런데 똑같은 자리에서 이런 환호라니.
알 수 없는 감동이 치밀어 올랐다.
기뻤다.
‘앞으로도 잘하자.’
이제 자신은 퍼스트레이디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일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와는 다를 것이다.
그녀 스스로가 다른 걸음을 걸을 테니까.
잘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할 수는 없어도 그래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
그런 마음을 담아 엘리제는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와아! 레이디 클로랜스 만세!”
“만세! 황태자비 만세!”
그렇게 귀가 얼얼한 함성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너무나 커다래 경기장이 무너져 내릴까 걱정이 될 정도의 함성이었다.
그 함성은 그녀가 단상에서 내려간 다음에도 멈추지 않아, 잠시 포상식을 멈춰야 하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크흠, 다음은 맥가일 원수.”
이어 부총사령관인 맥가일 원수의 차례.
군부의 전설적인 인물인 그는 이런저런 훈장까지 합쳐 벌써 14번째의 훈장 수여였다. 정복 여기저기가 훈장으로 가득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리고 마지막은 린덴.
총사령관이었던 만큼, 공도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군웅들의 환호가 이상했다.
“황태자 만세!”
“총사령관 만세!”
이런 외침도 있었지만.
“휘잇! 세기의 로맨티스트 만세!”
“남자 만세!”
“로! 맨! 티! 스! 트!”
이런 환호가 주를 이루었다.
“…….”
그 함성을 들으며 엘리제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사막의 전갈에게 잡혀갔을 때 연인을 구하러 홀로 적진에 난입한 것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총사령관으로서는 낙제인 행동이었지만,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한 일이었다.
제국을 물려받을 지고한 신분으로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목숨을 걸다니. 어찌 감동하지 않겠는가?
듣자 하니 당시의 일을 극으로 꾸미려는 작가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환호성 중에는 이런 외침도 섞여 있었다.
“등불을 든 여인을 꼭 행복하게 해라!”
“울리면 가만 안 둔다!”
“부럽다!”
뭔가 황실 모독죄에 가까운 발언들이 섞여 있었던 것 같지만…… 즐거운 축제일. 다들 대충 넘어갔다.
그렇게 첫 번째 하이라이트인 전공 포상식이 끝났고, 곧바로 두 번째 하이라이트, 참전 영웅들의 마차 거리 행진이 이어졌다.
“레이디 클로랜스.”
지붕이 뚫린 마차 위에서 황태자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원래는 선두의 마차에는 부총사령관인 맥가일과 함께 타야 하는 것이었지만, 특별히 예비 황태자비인 그녀가 동승하기로 했다.
“조심히 올라오도록.”
“네, 전하.”
린덴은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 올렸다.
그의 손이 허리를 감싸자,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손이 닿은 곳이 뜨거웠다.
더구나 마차에 올라와서 보니 의례용 가두 마차인지라 공간이 좁았다.
어쩔 수 없이 그와 계속해서 몸이 맞닿아 신경이 쓰였다.
“감기 나은 지가 얼마 안 됐는데. 힘들지는 않나?”
“네, 괜찮아요.”
그녀는 최대한 그를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이대로 선 채 론도 대광장까지 간 후, 황궁으로 들어갈 거다. 꽤 걸릴 거야. 중간에 앉을 수도 없으니 힘들면 나한테 기대도록.”
낮지만 따뜻한 음성.
혹시나 자신의 그녀가 무리할까 걱정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리고 곧 마차가 출발하였다.
그들이 탄 선두의 마차 뒤로 여러 전훈자들이 탄 마차가 줄을 이었고, 마지막으로 로열 나이츠인 총기사단의 정예가 말을 타고 따랐다.
“와아! 브리티아 만세!”
“로마노프 만세!”
대경기장에 있던 시민들이 열렬한 박수로 그들의 행진을 환송했다.
마차는 대경기장을 나와 론도 시내로 접어들었다.
거리 행진 코스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시민들이 준비하고 있던 꽃을 던지며 그들을 맞았다.
“와아!”
여러 전쟁 영웅이 있었지만, 시민들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단연 선두의 황태자와 예비 황태자비 엘리제였다.
공적도 공적이었지만, 그녀가 잡혀갔을 당시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이야기는 수많은 시민의 가슴을 울렸다.
황태자는 그녀를 위해 홀로 적진에 뛰어들었고, 그녀는 마지막 순간, 그를 위해 총알에 몸을 던졌다. 어찌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겠는가?
그런 둘이 개선식 행진 선두에 서 있으니 이목이 쏠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여인들의 환호는 상상을 초월했다.
“황태자 전하 만세!”
“황태자비 만세!”
“잘 어울린다!”
“행복하세요!”
엘리제는 선두에 서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환호를 받을 거로 생각은 했지만, 예상했던 거와 조금 종류가 달랐다.
마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개선식 행진이 아니라 약혼 기념 행진으로 보일 정도의 외침이었다.
‘전하께서는?’
엘리제는 힐끗 린덴을 바라봤다.
그는 조각 같은 얼굴에 속을 알 수 없는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원래부터 남 앞에 나서는 이런 행사를 좋아하지 않으니, 불편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전하.’
이전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그의 얼굴은 참 잘 생겼다. 마치 천상의 조각 같다고 할까? 그가 마음속으로 들어와서인지, 최근에는 더욱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전하. 린덴.’
그녀는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렇게 그의 옆에 서서 거리 행진을 하고 있다니.
왠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그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왜 자꾸 보는 것이지?”
그 물음에 그녀가 희미하게 얼굴을 붉혔다.
너무 티 나게 쳐다봤나 보다.
“그냥…… 요.”
그러고 엘리제는 고개를 돌려 다시 시민들을 바라봤다. 그런 그녀를 보며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특별히 더 입을 열지는 않았다.
대신.
탁.
“……!”
엘리제는 일순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왼손이 옆에 있던 자신의 오른손을 잡았던 것이다.
놀랐으나, 손을 빼진 않았다.
분명 그의 손은 차가웠건만 맞닿은 느낌은 따뜻했다.
이상했다. 그저 손을 잡은 것이 건만 가슴 속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전하.’
그녀는 속으로 그를 불렀다.
그렇게 시민들의 환호 속에서 마차는 거리를 돌았다.
행진 시간은 길었다.
거리 자체가 길기도 했지만, 충분히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속도를 천천히 조절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힘들진 않나?”
“아…… 괜찮아요.”
사실 조금 힘들었다.
아까 승전 기념식 때부터 너무 오래 서 있었던 것이다.
물론 병원에서 수술할 때는 이것보다 더 오래 서 있을 때도 잦았지만, 몸이 회복된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현기증이 돌기 시작했다.
살짝 파리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되겠군. 아직 대광장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정말 괜찮아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 대답에 린덴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늘 말을 안 들으니. 어쩔 수가 없군.”
“네?”
“이리로 와라.”
그가 한쪽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자신 쪽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자연스레 그의 품에 기대게 된 그녀가 당황해 그를 올려다보았다.
“전하?”
“괜찮으니 조금 기대고 있어. 무리하지 말고.”
“하, 하지만…….”
“명령이다.”
그는 늘 그렇듯 폭군처럼 말했다.
심지어 한마디의 협박을 덧붙이면서.
“말 안 들으면, 이 자리에서 입 맞춘다.”
“……!”
그녀의 얼굴이 하얘졌다.
지금 뭐라고? 이 자리에서?
그는 그녀의 붉은 입술을 직시하며 말했다.
“지금도 간신히 참고 있으니, 가만히 있어.”
그 말에 그녀는 얌전히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정말로 그런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라면 혹시 모른다.
‘이래도 되는 건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시민들은 황태자와 예비 황태자비의 다정한 모습에 오히려 더 큰 환호를 지르며 열광했다.
“와아! 황태자 만세! 황태자비 만세!”
심지어 이런 외침도 있었다.
“뽀뽀해라! 키스해라!”
그리고 그 외침은 점점 군웅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키스! 키스!”
“키스해라!”
마치 결혼식장에서 뽀뽀를 바라는 하객들 같은 마음으로 군웅들은 외쳤다.
그 외침들을 듣고 엘리제는 얼굴을 붉히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침 그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고, 그렇게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저 바라볼 뿐인데, 방금 들은 외침들 때문인지 엘리제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엘리제.”
“……네, 전하.”
린덴은 무언가 말을 하려고 주저하다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가 다시 조용해졌다.
그녀의 가슴이 괜히 뛰었다.
“…….”
그렇게 말없이 가만히 기대고 있자 문득 엘리제는 그의 품이 포근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감사해요, 전하.”
“뭐가 감사하지?”
“그냥…… 전부 다요. 모두.”
그에게 감사한 것은 무수히 많았다.
크게는 전쟁 때 자신을 구하러 와준 것부터, 작게는 이런저런 사소한 배려까지.
하지만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저를 사랑해 줘서 감사해요.’
그냥 그런 마음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그에게 안겨 있는 이 느낌이 너무나 따뜻하다고.
“와아!”
그리고 그때, 막 마차가 대광장으로 접어들었다.
밀집한 군웅들이 우렁찬 환호로 그들을 맞았다.
귀가 마비될 정도로 거센 함성.
그리고 그 함성 속에서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도 그녀를 바라봤다.
품 안에 안긴 탓에 서로의 거리는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전하.’
귀가 안 들릴 정도의 함성 때문일까?
그녀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
그 고백에 린덴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처음이다. 그녀가 이렇게 먼저 직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은.
“와아아! 만세!”
수많은 외침이 광장을 뒤덮었지만, 이 순간 그의 눈에는 오로지 그녀만 보였다. 그녀도 그만 보였다.
그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그 말…… 정말인가……?”
“……네.”
엘리제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입술이 그에게 가까워졌다.
“……!”
그리고 그의 얼굴이 조금 더…… 조금 더 다가왔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기 직전.
린덴이 나지막이 말했다. 깊은 갈망을 담고.
“나도…… 나도 사랑한다.”
그리고 그 순간.
아.
엘리제는 신음을 토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겹쳐졌다.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