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2 5-5 미하일 =========================================================================
5장 미하일 - 3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지.’
린덴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작은 소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처음 내명부의 일을 시작했을 때가 떠올랐다.
저 소녀는 천재 의사인 것도 모자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내명부의 일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미, 믿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예전에 내명부의 일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 것입니까?’
그녀의 일 처리를 본 늙은 궁내부장은 경악했다.
엘리제는 겸손히 고개를 저었으나, 그녀의 일 처리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마치 이전부터 늘 해오던 일인 것처럼 능숙하고 정확한 솜씨!
이전 삶, 황태자비, 황후로서 산 세월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과연 등불을 든 여인이라고 탄성을 터뜨렸다.
의학적 업적, 전장에서 세운 탁월한 전공, 제국 최고의 수술 솜씨도 모자라 완벽한 퍼스트레이디의 자질까지!
시민들은 그녀야말로 하늘이 내린 제국의 진정한 안주인이라고 치켜세웠다.
메르키트 백작의 의도와 다르게 엘리제의 지지율이 다시 한 번 하늘을 찌를 듯 오른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완벽한 소녀를 짝으로 맞이할 린덴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완벽할 필요는 없다고.’
정확히는 그녀가 유능해 너무 바빠 불만이었다.
차라리 능력이 없었으면!
그러면 이렇게 바쁘지 않았을 테고, 조금 더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텐데!
저 소녀는 완벽한 능력만큼이나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일중독!
물론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에 의사 일을 열심히 하는 면이 있는 것은 안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봐줘도 그녀는 일중독이었다. 그것도 중증의!
‘마음에 안 들어. 정말로.’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맨날 일만 한다.
그게 그의 불만이었다.
‘가끔은 날 봐달라고. 아니, 안 봐도 되니 시간이라도 내달라고.’
그때, 그녀가 왕진 가방을 펼치더니 그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이번엔 어디가 아프신가요, 전하?”
“아…….”
린덴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바쁜 그녀가 이렇게 그를 보러온 이유.
그건 그가 아프다고 해서 어의로서 진료를 보기 위해서였다.
“가슴이 아프다.”
“가슴이요? 갑자기 왜……?”
엘리제의 눈에 걱정이 깃들었다.
그 걱정의 빛을 본 순간, 린덴은 살짝 죄책감이 들었다.
사실 안 아팠다.
하도 그녀를 못 봐,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꾀병을 부린 것이다.
‘엘리제, 네가 일만 하니까 그렇잖아.’
그래도 이제 와 꾀병이었다고 할 수도 없어 그는 뻔뻔하게 말했다.
‘뭐, 아예 완전히 거짓말인 것은 아니니까.’
가슴이 아프긴 했다.
바로 그녀 때문에.
이렇게 얼굴을 보니 낫긴 했지만, 못 보고 있을 때는 항상 조금씩 아렸다.
“어느 부위가 아픈가요?”
“정확히는 모르겠군. 이쪽인 것 같다.”
그러며 그는 왼 가슴을 가리켰다.
심장이 왼쪽에 있다고 했던가?
“어떤 식으로 아프신가요? 둔하게? 조이듯이? 아니면 콕콕 찌르듯이?”
그 물음에 그는 평소 감각을 떠올리며 답했다.
“아리듯이.”
그녀 때문에 맨날 아리니까.
“아리듯이요?”
“그래.”
“음…….”
그녀는 몇 가지 질문을 더 했다.
“특별히 더 통증이 심해지는 상황이 있나요?”
“있긴 있다.”
“어떤 상황인가요? 예를 들면 운동할 때라든지, 술을 마실 때라든지, 잠을 못 잘 때라든지.”
이번엔 린덴은 답을 하지 않았다.
가슴이 특별히 더 아플 때.
그건 그녀를 보지 못할 때였다.
“전하?”
“그건 넘어가지.”
“말씀해 주셔야 정확히 진단할 수 있어요.”
하지만 여전히 린덴이 입을 열지 않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흐음…….”
엘리제는 평소와 다르게 진단이 헷갈리는 듯했다.
당연했다.
꾀병인데, 무슨 진단을 정확히 내리겠는가?
정확히 내려도 문제다. 꾀병인 게 들통 날 테니까.
‘도대체 뭘까?’
그녀는 손가락으로 붉은 입술을 만지며 고민했다.
린덴은 그 모습을 보며 저 손가락을 치우고 자신이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잠시 진찰을 해볼게요.”
“얼마든지.”
엘리제는 먼저 그의 손목을 짚어 맥을 확인했다.
그러며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맥박 횟수도, 맥의 규칙성도, 맥압도 다 정상이신데…….’
한편, 린덴은 그녀의 손이 자신을 어루만지자, 와락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은 진료 중이니까.
엘리제가 청진을 위해 조금 더 그에게 다가왔다.
꼼꼼히 심장 소리를 들어본 그녀는 역시 이상이 없자 조심히 그에게 물었다.
“전하, 늑연골염을 확인하기 위해 제가 잠시 가슴을 만져 봐도 괜찮을까요?”
“……그래.”
늑연골염(Costochondritis).
흉벽에 염증이 생기는 것을 뜻하는 질환이지만, 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 순간, 그의 눈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신체 진찰 중 어느덧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녀의 얼굴. 그리고 붉은 입술이었다.
“…….”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가지고 싶었다.
저 붉은 입술을.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농락하고 달뜬 신음을 듣고 싶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엘리제는 그가 그런 삿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모른 채 열심히 진찰을 해 나갔다.
먼저 통증 부위를 만지며 압통이 유발되는지 물었다.
“만질 때 아프진 않으신가요?”
“…….”
대답이 없다.
괜찮은 거로 생각하며 그녀는 가슴 여기저기를 만졌다.
그가 불편하지 않게 최대한 조심히. 그리고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그를 자극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괜찮으신가요, 전하?”
“…….”
“……전하?”
이윽고 이상함을 느낀 엘리제는 고개를 들었고 깜짝 놀랐다.
그가 타오르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전…… 하?”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입술이 곧바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읍?!”
깜짝 놀란 그녀가 소리를 질렀으나 소용없었다.
“저……!”
몸을 바동거렸으나 강한 팔이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마치 그녀의 몸이 자신의 것이라는 듯 강렬한 껴안았다.
그리고 입술이 열리며 농밀한 접촉이 이어졌다.
‘아…….’
엘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갑자기…… 왜……?’
일순 이런 생각이 들었으나, 길게 잇진 못했다.
머리가 하얗게 변한 것이다.
“아…… 아…….”
그녀가 흘리는 소리를 들으며 린덴은 길게 입맞춤을 이어갔다.
“저, 전하…… 제발…….”
그녀가 애원하듯 말하며 매달렸으나 그는 못 들은 척했다.
놔주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녀를 느끼고 싶었다.
“하아.”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난 후,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저, 전하…….”
그녀가 당황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단정한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여전히 그의 품속에 갇혀 있는 상태로.
“어째서……?”
그 물음에 린덴은 입술을 비틀었다.
왜긴.
서로 사랑하는 사이끼리 입맞춤을 나누는 데 특별한 이유가 필요한가?
“싫은가?”
그 물음에 엘리제의 얼굴이 사과처럼 달아올랐다.
방금의 붉힘과는 조금 다른 의미의 부끄러움이었다.
“그, 그건…….”
“싫은가?”
린덴은 집요하게 물었다.
결국, 엘리제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건…… 아니요.”
그 대답을 하며 귓볼 끝까지 달아오른 엘리제. 너무 붉어 얼굴이 터질 것 같다.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거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정말 놔주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렇게 안고 있고 싶었다.
“말해봐라.”
“……네? 뭘?”
“지난번 개선식 때 날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다시 한 번 더 말해봐라.”
엘리제의 안색이 파래졌다. 그 말을 다시 하라고? 지금?
붉었다 파랬다, 다양하게 바뀌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린덴이 짓궂게 말했다.
“안 그러면 다시 키스한다.”
“……!”
결국, 엘리제는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작게. 개미가 기어가듯.
“……좋아해요.”
“뭐? 안 들린다.”
“조…… 좋아한다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린덴의 마음에 다시금 환희가 차올랐다.
처음 듣는 것도 아니건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느낌.
그 기쁨을 계속 느끼고 싶어 다시 말했다.
“안 들리는데?”
결국, 엘리제는 빽 외쳤다.
“좋아한다고요!”
린덴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힘을 주어, 으스러지도록 그녀를 껴안으며 다시 입을 맞추었다.
“읍!”
엘리제가 눈을 크게 뜨며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거짓말쟁이! 키스 안 한다고 했으면서! 란 뜻인 것 같았다.
하지만 린덴은 좋아한다 말 안 하면 키스한다고 했지, 좋아한다고 말하면 키스 안 한다고는 안 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좋아한다고 말했어도 키스할 생각이었다.
“아…….”
반항하던 것도 잠시, 촉촉하게 젖어드는 키스에 엘리제의 몸이 몽롱하게 늘어졌다.
이 남자는 분명 자신이 첫 키스일 텐데, 왜 이렇게 강렬한 걸까? 그리고 자신은 왜 이렇게 키스를 당할 때마다 무방비로 축 늘어지는 것일까.
‘이전 삶에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녀는 멍하니 생각했다.
린덴이 입을 맞춘 상태로 중얼거렸다.
“엘리제.”
“……아.”
“엘리제, 내 것, 내 엘리제.”
그 갈망에, 그 사랑에, 거침없이 자신을 헤집는 그의 느낌에 엘리제의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아무런 말도, 아무런 몸짓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를 느꼈다.
“하…….”
길고 긴, 그렇지만 한없이 아쉬운 키스를 끝내며 린덴은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엘리제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한 얼굴이었다. 눈가에는 언뜻 눈물도 맺혀 있었다.
“엘리제?”
“……!”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화악 빨개지는 얼굴.
저 하얀 얼굴은 어찌 저렇게 쉽게 붉어지는지 귀엽기 그지없었다.
‘더 괴롭힐까.’
그런 마음이 들었으나, 더 괴롭히면 정말 그녀가 울 것 같아서 참았다.
“……가, 가슴 아픈 것은요?”
그래도 엘리제.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상태에서도, 의사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환자의 상태를 물었다.
“괜찮다.”
“네?”
“이제 괜찮아졌다.”
그제야 그가 꾀병을 부린 것을 깨달은 엘리제는 화를 내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뭐, 뭐예요! 걱정했는데. 거짓말을…….”
린덴은 미소를 지으며 바동거리는 그녀를 다시 안으로 끌어당겼다.
부드럽게.
하지만 못 벗어나게.
“거짓말한 것 아니다.”
“정말요?”
“그래, 정말 아팠어.”
그러며 그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너 때문에 아팠다.”
엘리제는 당황해 입을 다물었다.
나 때문에 아팠다고? 이게 무슨 말인가?
황태자는 말을 이었다.
“정말 너 때문에 아팠어. 보고 싶어서.”
“……!”
“그런데 지금은 괜찮지만, 네가 가면 또 아플 것 같군. 그러면 또 불러도 되겠지?”
“하지만…….”
“넌 어의잖아. 그러니 황태자인 내가 아픈 것을 책임져야지.”
“……!”
그게 왜 그렇게 된단 말인가!
엘리제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황태자는 독선적이고 뻔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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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