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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33화 (133/194)

00133  5-5 미하일  =========================================================================

5장 미하일 - 4

그런데 그때였다.

문밖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전하, 비서관 크리스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오빠다!

엘리제는 화들짝 린덴의 품에서 벗어나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방 안에서 그와 이런 민망한 짓을 한 것을 오빠에게 절대 들킬 수 없었다.

한편, 린덴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비서관이니 그의 집무실에 찾아오는 것은 당연했지만, 괜히 마음에 안 들었다.

‘하여튼 얄미운 놈.’

일 처리 능력은 클로랜스 가문 혈통답게 어마어마하게 유능했지만, 지금 이 순간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크리스는 자신과 엘리제의 사이를 은근슬쩍 훼방하는 얄미운 놈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곧 문이 끼익 열리며 부드러운 인상의 잘생긴 미남이 들어왔다.

“오빠!”

“응, 리제. 여기는 웬일이니?”

엘리제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아…… 그게…… 진료하러 왔어요.”

그래, 진료하러 오긴 했다.

중간에 이렇게 되어버리긴 했지만.

자신이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민망한 마음이 들어 힐끗 린덴을 흘겨보았다.

‘하여튼 미워.’

물론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쨌든 진료는 끝났으니, 저는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오빠.”

그러고 엘리제는 황태자에게도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린덴은 그녀가 나가는 뒷모습을 아쉬운 눈으로 보다가 비서관 크리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진료라니. 몸이 많이 안 좋으십니까?”

“…….”

“전하께서 몸이 안 좋으시다니. 큰일이군요.”

린덴은 입을 다물었다.

어째 내용은 걱정인데, ‘정말 아픈 것 맞느냐?’로 들리는 것은 자신의 피해의식인가?

아니다.

자신을 보는 저 크리스의 눈빛엔 엘리제를 사랑으로 볼 때와 다르게 ‘동생 도둑놈!’이란 단어가 쓰여 있는 듯했다.

사실 그 추측은 크게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행정부의 악명높던 ‘리볼버’ 크리스는 공과 사가 확실한 성격이었으니까.

공적으로는 존경하는 주군인 황태자 전하이지만, 사적으로는 동생 도둑.

그것이 공과 사를 철저히 나누는 크리스가 황태자를 보는 시선이었다.

참고로, 최근 딸 바보 엘 후작이 황태자를 보는 시선도 조금 비슷했다.

“……그래, 어쨌든 무슨 일이지?”

“지난번 명하신 내용의 조사를 완수했습니다.”

짧은 대답.

그리고 그 답을 듣는 순간, 황태자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정말인가?”

“네, 전하.”

리볼버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서류를 내밀었다.

“귀족파 몰락의 시작이 될 열쇠입니다.”

***

황태자의 사자궁을 나선 엘리제는 이번엔 어전으로 향했다.

황제 민체스터의 진료를 볼 시간이었던 것이다.

‘하여튼 미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조금 전 그와의 입맞춤을 떠올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싫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꾀병으로 자신을 부르다니.

더구나 눈치를 보니 이번 한 번으로 끝낼 것 같지가 않다.

물론 그를 보는 게 싫은 것은 아니지만, 아니, 좋지만…….

‘몰라.’

그녀는 복잡한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가슴은 자꾸 콩닥콩닥 뛰는지. 가슴 한구석이 고장이라도 난 것 같다.

그런데 바삐 발걸음을 옮기던 중, 엘리제는 의외의 인물을 마주했다.

‘어?’

그들도 엘리제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가 차일드 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독사란 별명답게 날카로운 눈매.

하지만 어딘지 이전과 다르게 마른 듯한 몸.

귀족파의 수장인 암셀 드 차일드 후작이었다!

“오랜만이군, 데임. 아니, 이제는 레이디 클로랜스지. 여자작이 된 것을 축하하네.”

암셀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적대 가문의 딸에게 건네는 말이지만 퍽 친근한 목소리였다.

전쟁에서 그녀가 수양아들인 알버트를 목숨을 걸고 구해준 후, 가까워진 탓이었다.

“오랜만이네. 일하는 중이야?”

뒤에서 아버지를 수행하던 유리엔이 반갑게 그녀를 바라봤다.

엘리제도 웃으며 인사했다.

“네, 언니. 잘 지내셨어요?”

“뭐, 그냥 그랬어.”

유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그늘이 진 얼굴에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쓴웃음을 지을 뿐 답하지 않았다.

그들, 귀족파가 잘 못 지낸 데에는 엘리제도 큰 몫 했으니까.

갈수록 떨어지는 3황자의 지지율 때문에 귀족파는 잠 못 드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황궁엔 무슨 일이세요?”

“아, 그게.”

대답은 암셀 후작이 하였다.

“동생을 보러 왔었네.”

“아…….”

암셀 후작의 동생.

1황비 마리엔을 뜻한다.

“얼마 전, 동생이 감기에 걸렸을 때 치료해 주었다고 들었네. 고맙네.”

“아…… 네, 각하.”

엘리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마리엔 드 차일드, 아니, 마리엔 드 로마노프.

과거 혈탑의 비극을 일으킨 주역이자 광증에 빠진 여인.

그리고 미하일의 어머니.

‘하아.’

이전의 삶을 떠올린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엔은 황후 레베카를 모략에 빠뜨렸다. 그리고 황후 레베카와 1황비 이블린은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혈탑에서 목숨을 버렸다.

이제…… 린덴은 어머니와 누이의 복수를 할 것이다. 오로지 그 하나의 염원만을 위해 황제에 오르려는 그였으니까.

‘하지만…….’

곧 일어날 그 비극을 그리자, 가슴이 찢어지듯 아파져 왔다.

방금 린덴의 집무실에서 두근거렸던 감정이 환상이었던 것처럼.

과거, 그 비극 후 미하일이 죽었다. 유리엔도 죽었다. 귀족파의 많은 인물이 죽었다. 론도가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혈사를 일으킨 린덴의 마음은 부서졌다.

분명 정당한 복수였지만, 모두에게 상처밖에 남지 않은 복수였다.

‘그때부터였어. 전하가 변한 것은.’

복수를 이룬 후, 황위에 오른 린덴은 눈부신 통치력을 보이며 브리티아 제국을 번영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망가진 뒤였다.

‘나와 본격적으로 엇갈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지.’

이전부터 자신에게 무뚝뚝했지만, 그래도 나름의 예의를 차리던 그였다.

하지만 그 비극을 일으킨 후에는 마음이 부서진 탓일까? 철저한 차가움으로만 일관했다.

그래서 엇갈림 끝에 좌절한 자신은 저지르지 말아 할 죄악을 저질렀고, 그는 거침없이 단두대의 칼날을 내렸다.

‘물론 이번 삶은 조금 다르겠지만.’

다시 그 비극이 일어난다더라도, 이전처럼 그가 자신에게 차가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상처받을 것이다.

어쩌면 그때처럼 무너져 내릴지도 몰랐다.

그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무저갱에 빠진 듯 무겁게 했다.

“폐하께 가는 것인가?”

그때, 암셀 후작이 물었다.

“아, 네.”

“폐하의 건강은 괜찮으신가?”

엘리제는 암셀 후작의 눈을 바라봤다.

황제의 건강이 안 좋은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동태를 살피려는 물음일까?

하지만 눈치를 보니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한 물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외부인에게 황제의 건강 사항을 알리는 것은 금기여서 일반적인 대답만 했다.

“네, 강녕하십니다.”

“다행이군. 건강 잘 챙겨주게. 물론 제국 최고의 의사라는 등불을 든 여인이니, 어련히 잘하겠지만.”

그러며 그는 옅게 웃었다.

“나이가 드니, 몸이 좋지가 않아. 원래 있던 폐병도 안 좋고. 이러다 언제 세상을 뜰지 모르겠어.”

“아버지!”

유리엔이 뒤에서 무슨 말이냐는 듯 외쳤다.

“아직 한창이시면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하지만 암셀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본인 스스로가 몸의 안 좋음을 알고 있는 탓이다.

그리고 엘리제도 ‘괜찮으실 거라고’ 덕담하지 못했다.

곧 그의 건강이 어떻게 될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이구나.’

황제 민체스터의 쓰러짐이 비극의 전주곡이었다면, 암셀의 병사는 비극의 절정이었다.

귀족파를 통제하던 그가 갑작스레 사망하며 싸움은 통제 불가로 치달았고 수많은 피가 흘렀던 것이다.

만약 암셀이 그렇게만 쓰러지지 않았어도, 그토록 많은 피가 흐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희생을 줄일 방법이 없을까.’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그녀는 당시 암셀의 급환이 무엇인지 모른다. 다만 평소의 지병과는 전혀 다른 질병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폐하를 잘 부탁하네. 나름 한때 친우였던 적도 있으니.”

그 말에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와 그가 친우였다고?

“아, 모르고 있었나? 페하와 나, 그리고 엘 후작, 마리엔 모두 친한 친구였어. 물론 폐하는 날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

“어쨌든 이만 가보겠네. 다음에 한번 저택에 놀러 오게. 청에서 좋은 차가 들어왔으니.”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암셀 후작은 유리엔의 부축을 받으며 황궁에서 사라졌다.

엘리제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한편, 사자궁의 집무실에서 크리스와 린덴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황태자는 크리스가 건네준 서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 완벽해.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대단하군.”

“운이 좋았습니다.”

크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겸양했지만 린덴은 크게 감탄했다.

얄밉긴 하지만 능력 하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제…… 사용하실 생각이십니까?”

“기회를 봐서.”

린덴은 답했다.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않았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황태자는 다른 사안을 물었다.

“재정부에 지시한 사항은?”

“비밀리에 진행 중입니다.”

“그래.”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열 가드의 길버트 백작은?”

“동의하였습니다.”

“신무기는?”

“개틀링 말씀이십니까? 개발 완료 단계입니다. 기밀은 철저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군.”

그 대답을 들은 후, 린덴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크리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전하, 외람되지만 한 가지만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무언가?”

“귀족파의 인원들을 모두 숙청하실 생각이십니까?”

“……!”

린덴은 흠칫 크리스를 바라봤다.

리볼버는 평소와 같이 부드러운 눈매에 옅은 미소를 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 모든 계획이 그들의 숙청을 가리키고 있으니까요.”

린덴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와 크리스의 눈이 허공에서 말없이 교차했다.

황태자가 답을 하지 않자, 크리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혹시나 주제넘은 질문이었다면 죄송합니다.”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아니야. 자네라면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있지. 한배를 탄 몸이니까.”

크리스. 리볼버라 불리는 행정가이자 클로랜스 가문의 직계.

자신의 비서관으로 굳이 그를 임명한 것은 유능한 것과 더불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이였기 때문이다.

‘물론 엘리제랑 관련해서 이렇게 얄미울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친우인 렌과 더불어 자신의 그림자로 일하고 있는 존재.

그러니 충분히 저런 질문을 할 자격이 있었다.

“이만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편히 쉬십시오.”

크리스가 집무실을 나간 후, 린덴은 목을 젖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왠지 갑자기 피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숙청이라.’

그래, 맞았다.

자신은 그들을 모두 숙청할 생각이다.

‘아니, 내가 하려는 것은 숙청이 아니야.’

‘그날’이 떠올랐다.

자신의 눈앞에서 핏물로 변해 죽어가던 어머니와 누이.

그래, 그가 하려는 것은 숙청이 아니라 복수였다.

바로 어머니와 누이를 그렇게 만든 자들을 향한.

오로지 그것 하나만을 위해 일평생을 살아왔고, 이제 곧 그 결실을 거둘 때가 온다.

‘때가 오면.’

지금은 귀족파든 자신이든 서로 칼을 갈며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곧 때가 오면, 그때는 서로가 칼을 꺼내 들 것이고 저들 귀족파는 그가 만든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걸로 이 복수는 끝이지.’

그는 생각했다.

평생을 염원하던 그날이 오는 것을.

어머니와 누이를 그렇게 만들 자들을 단두대에 처단하는 상상을.

하지만 언제부터일까?

그런 상상을 해도 후련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냥 무언가 마음 한구석이 마비된 듯한 느낌.

이미 그런 감정을 느낄 가슴이 마모된 탓일지도 모른다.

“하아.”

그는 짧게 숨을 토해냈다.

갑자기 차가 마시고 싶었다.

엘리제가 직접 끓여주는.

그녀가 달인 차를 마신 후, 그녀를 꼭 껴안고 느끼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가만히 있고 싶었다.

<주말은 쉽니다!!>

============================ 작품 후기 ============================

다음주 월요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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