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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34화 (134/194)

00134  5-6  달콤한 납치 (1)  =========================================================================

6장 달콤한 납치(1) - 1

그날 이후, 시간이 지났다.

엘리제의 일상은 큰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일. 일. 일.

늘 바빴다.

내명부에서 하는 일도 조금씩 늘리기 시작했는데, 이미 황후로 살며 질리도록 해본 일이라 어려울 것은 없었지만, 한층 더 바빠졌다.

‘조금 피곤하구나.’

아무리 그녀라도 피로를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휴식 없이 계속해서 일만 하니, 점차 피로가 쌓였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만 정리되면 조금 낫겠지.’

아무리 일중독인 그녀라도 평생 이렇게 일에 치여 살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황태자비, 황후가 될 예정이니까.

의사 겸업을 허가받았다 해도 앞으로도 병원 일에만 매달려 있을 수는 없었다.

‘다른 것보다 전하가 너무 속상해하시니.’

그녀는 황태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별의별 핑계로 자신을 불러댔다.

머리가 아프다, 몸이 으슬으슬하다, 배가 아프다, 다리가 아프다 등등.

어의로서 황태자가 아프다는데 안 가볼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가보면 맨날 꾀병이었다.

한 번은 정색하고 이런 식으로 꾀병을 부리면 곤란하다고 했더니, 속상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지 않은가?’

그 말에 엘리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확실히 자신은 너무 바빴다.

그와 약속한 데이트를 미룬 게 도대체 며칠인지.

‘그래도 하고 있는 일을 미룰 수는 없으니. 지금 벌인 일만 해결하면 어느 정도 시간이 나겠지.’

그녀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은 연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었다.

특히 천연두 예방 접종!

‘이제 머지않아 남부 지역에 천연두가 유행할 거야.’

천연두!

콜레라만큼, 아니, 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무서운 전염병이다.

지구에서는 19세기에만 추정치 3억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당시 전 세계 인구가 10억 정도였으니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알 수 있다.

그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머지않은 시기에 브리티아 섬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그 전에 백신 접종을 끝내놓아야 해.’

하지만 지구면 몰라도 이곳은 아직 예방 접종이 개발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가 진행하고 있는 것은 영국의 제너가 처음 고안한 종두법.

‘원시적인 예방 접종 방법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현대 지구라면 계란 등을 이용하거나, 세포 배양 방법을 사용했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다른 일들도 미룰 수가 없는 일이고.‘

의과대학 설립은 조금 늦게 추진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시작한 것을 취소할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진행을 넘길 수도 없었던 게, 현대 지구의 선진 의학 교육 커리큘럼을 아는 이는 그녀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설립될 의과대학의 이름은 ‘클로랜스 의대’였다.

그녀의 생각을 들은 엘 후작이 기쁜 마음으로 딸 바보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의과대학? 그래, 얼마든지 진행하렴. 이 아비가 돈은 다 대주마! 황실의 도움? 필요 없다.’

‘의과대학 설립에 맞춰 교과서도 집필해야 하는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현시대의 의사들에게 의학의 지표는 ‘선구자’ 그라함 백작의 저서였다. 가히 의학의 바이블이라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엘리제가 보기에는 틀린 내용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엘리제는 틈틈이 새로운 교과서를 집필하고 있었다. 현시대 과학과 기술력에 맞는 내용으로.

가볍게 시작한 집필이지만, 막상 써보니 이것도 어마어마한 대작업이었다. 가히 모든 질병 총론, 각론을 다 집대성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확실히 하는 일이 너무 많아.’

-천연두의 퇴치자.

-예방접종의 창시자.

-세계 최초의 의과대학의 창립자.

-현대 의학을 이끈 자.

등등.

지금 하고 있는 일들로 후세에 무수히 많은 이름을 얻게 될 그녀이지만, 지나치게 무리하고 있는 것은 맞았다.

최근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이 3시간도 안 되었으니까.

사실 몇몇 일은 급할 게 하나도 없는 일들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급했다.

‘전하와 귀족파의 정권 싸움 때문일까?’

그녀는 씁쓸히 생각했다.

최근 들어 황제의 몸은 조금 더 안 좋아졌다.

곧 정권을 내려놓을 거란 소문이 정계에 파다했다.

그에 따라 귀족파와 황제파의 사이는 급속도로 냉각되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실제로 양 계파의 귀족들끼리 권총 결투를 하다 황실십자병원에 실려 오는 사례도 생기고 있었다.

물론 그녀야 귀족파 내부에서도 큰 인망을 얻고 있어서 정권 다툼에서 열외의 존재였지만, 몇몇 귀족파의 인물은 그런 그녀에게조차 적대감을 표시했다.

특히 대표적인 인물은 귀족파 서열 2위이자 상원 위원장인 메르키트 백작.

‘크흠! 잘 지내시오, 레이디 클로랜스?’

며칠 전 우연히 마주친 그는 불편한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었다.

특별히 그 시선을 마음에 두진 않았지만.

곧 귀족파와 황제파 사이에 본격적인 다툼이 시작될 것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중요한 일들이 마무리되면 조금 여유를 가지는 게 좋겠어.’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 민체스터를 진료할 시간이 가까웠다.

‘약이랑 청진기랑…….’

필요한 진료 물품을 왕진 가방에 챙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그녀는 의외의 인물을 마주쳤다.

“전하?”

그저 얼굴만 마주한 것일 뿐인데, 두근 가슴이 설렜다.

천상의 조각 같은 얼굴.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가 병원에 들어오고 있었다.

‘아…… 나를 보러 오셨구나.’

엘리제는 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폐하를 진료하러 가야 해서 시간을 낼 수가 없는데. 어쩌지.

린덴이 그녀가 들고 있는 가방을 보며 말했다.

“아바마마를 진료하러 가는 건가?”

“……네, 죄송해요.”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그녀는 사과했다.

매번 그를 서운하게 하는 것 같아 미안했다.

하지만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어차피 너를 만나러 온 것은 아니니.”

그 말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그러면 왜?

지고한 황태자인 그가 특별히 병원에 올 이유가 없을 텐데?

그때, 웃음기 섞인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전하는 저희를 뵈러 온 것입니다, 레이디 클로랜스.”

“자작님?”

전임 어의이자, 황실십자병원의 원장인 밴 자작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선생인 그레이엄 남작도 있었고, 아카데미 강의 과목이 겹치는 페이톤 교수도, 자신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보건 정책과의 관료도 있었다.

‘전하께서 저들을 보러 왔다고?’

엘리제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전하?”

하지만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엘리제, 너와 상관없는 일이다. 신경 쓰지 말고 볼일 보도록.”

정말?

모두 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들인데?

그러나 그들도 모두 손을 휙휙 저었다. 그녀보고 빨리 가라는 듯.

“신경 쓰지 마십시오, 자작님. 저희는 모두 전하와 따로 상의할 내용이 있어서 모인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표정이 묘했다.

왠지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등줄기를 스쳤으나, 별일 아니라고 딱 잡아떼는데 할 말이 없었다.

“……그러면 금방 다녀올게요.”

그녀가 병원에서 사라지자 린덴이 입을 열었다.

“모두 이렇게 모여 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전하.”

“그러면 이전에 미리 이야기했던 대로 며칠만 수고해 줬으면 좋겠군.”

“네, 알겠습니다.”

“중요한 건 그녀가 돌아왔을 때 일이 남아 있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반드시 며칠 동안 그녀 대신 일을 완벽히 처리해 놓도록.”

“네!”

이해할 수 없는 대화들.

린덴은 특히 밴에게 말했다.

“밴 자작, 그대는 특히 신경 써주도록. 그녀가 없을 때 아바마마의 옥체를 살펴야 하니.”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엘리제 자작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저도 나름 론도 최고의 명의라 불리던 몸이니.”

그 말에 린덴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다들 고맙군. 이번 일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내 섭섭지 않게 사례를 하지.”

“감사합니다! 하시려는 일 좋게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

모두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단, 한 명. 그레이엄만 똥 씹은 표정이었다.

“그래, 그러면 난 이만 가보지. 그녀가 아바마마를 진료하고 나올 때까지 준비를 마쳐야 하니.”

그가 지금 하려는 일.

그건 ‘납치’였다.

한 가지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그는 그녀를 납치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물론 며칠간 단둘이 함께 보낼 여행은 덤이었다.

‘계속 날 서운하게 했지.’

린덴은 자신을 서운하게 한 벌로 여행 때 그녀를 혼내주기로 결심했다.

맛 좋은 밥을 잔뜩 먹이고, 달달한 디저트를 실컷 먹이고, 좋은 호텔에 강제로 쿨쿨 재우고, 예쁜 거리를 한없이 걸으며, 그렇게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를 혼내줄 것이다.

***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먹구름(?)은 상상도 못한 채 엘리제는 황제의 진료에 열중하고 있었다.

“체중이 조금 더 빠지셨습니다, 폐하.”

“그런가? 그래서 그런지 입맛이 도통 없군.”

“그래도 식사를 잘하셔야 합니다. 제가 입맛을 돋우는 음식을 내도록 궁내부에 이야기해 놓겠습니다.”

민체스터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어의가 아니라, 며늘아기를 보는 듯한 눈빛에 엘리제는 왠지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능력이 부족하여.”

최대한 노력하고 있지만 민체스터의 건강은 조금씩 조금씩 안 좋아지고 있었다.

물론 그건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도 의학의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특히나 이렇게 기술력이 부족한 시대에는.

민체스터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다 알고 있어. 영애 덕분에 몸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는 것을. 네가 아니었으면 난 진즉 주님 곁으로 떠났을지도 모르지.”

어의가 된 후 매일 면담을 하면서 그녀와 민체스터는 많이 가까워졌다.

그는 엘리제를 어의, 데임, 레이디, 자작 같은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그저 어릴 때부터 부르던 영애라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죄 많은 나를 부르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폐하…….”

엘리제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불렀다.

민체스터는 그저 빙긋 웃었다.

“영애, 우리 잠시 산책이나 하지 않겠나?”

“폐하?”

“그냥 집무실에 계속 있다 보니 갑갑해서 말이야. 적당한 운동은 몸에도 좋다고 그대도 말하지 않았던가?”

“……알겠습니다.”

그렇게 엘리제는 민체스터와 장미 정원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그런 둘을 시종장인 밴트 경과 로열 가드의 수장인 길버트 백작이 따랐다.

‘길버트 백작.’

엘리제는 목석같은 얼굴로 자신들의 뒤를 따르는 길버트 백작을 바라봤다.

황궁 경호대인 로열 가드의 수장인 그는 금욕적인 인상의 중년 남자로, 검제 미하일을 제외하고 제국에서 가장 강한 세 명의 기사 중 한 명이었다.

참고로 나머지 두 명은 큰오라버니인 렌과 검기사단의 부단장인 로버트였다.

“꽃이 예쁘게 폈군. 영애도 꽃을 좋아하는가?”

“네, 좋아합니다.”

“그래? 일만 좋아하는지 알았더니 꽃도 좋아하는구나?”

민체스터가 웃으며 농담을 했고 엘리제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바쁘게 지내는 것도 좋지만 가끔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좋아.”

“…….”

“안 그러면 나처럼 후회할 수도 있으니.”

엘리제는 민체스터를 바라봤다.

병환 때문일까? 황제는, 브리티아의 발전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그는 왠지 작아 보였다.

“영애.”

“네, 폐하.”

“영애는 지금까지 살면서 크게 후회할 일을 한 적이 있느냐?”

민체스터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그 질문이 딱히 자신의 대답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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