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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35화 (135/194)

00135  5-6  달콤한 납치 (1)  =========================================================================

6장 달콤한 납치(1) - 2

“나는 있네. 큰 잘못을 했어.”

“…….”

“그래서 벌을 받았었지. 악몽 같은 벌이었네. 그 뒤로 그 악몽을 잊기 위해 일평생을 일만 하고 살았지만 잊히지가 않는군.”

엘리제는 아픈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자비로운 주님이라도, 이런 나를 용서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 말은 들은 엘리제는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답했다.

“용서하실 겁니다.”

“응?”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왜일까? 저런 황제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나 자책한단 말인가?

물론 그녀도 알고 있다.

민체스터가 ‘그날’, 혈탑의 비극을 지금껏 자책하며 괴로워하고 있음을.

하지만…….

그게 어찌 그만의 잘못이겠는가?

“저도 잘못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

“네, 오늘만 해도 아침에 아버지께 투정을 부렸고, 환자에게 속으로 불평을 했고, 어제는 황태자 전하를 서운하게 했어요. 며칠 전에는 새어머니의 생신을 잊어 기분을 상하게도 했고요.”

그 말에 민체스터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런가? 하지만 그런 잘못들은…… 사소한 것 아닌가?”

“네, 사소한 잘못들입니다. 하지만 사소한 잘못만 저지른 것은 아니에요. 저도 뼈에 사무치도록 후회할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

민체스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제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이전 삶, 정말 많은 죄를 저질렀다. 그런 자신에 비하면 민체스터의 죄가 뭐가 중하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폐하.”

“…….”

“죄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게 크든, 작든 말이에요. 물론…… 죄를 저지르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 괴로워하세요.

그녀는 그런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하.”

민체스터는 입술 사이로 웃음을 흘렸다.

걱정 어린 그녀의 눈빛을 보니 왠지 기분이 따뜻해졌다.

“고맙군. 고마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영애를 린덴의 짝으로 정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

“폐하…….”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민체스터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걱정이군. 내가 곧 있을 좋은 날까지 기력을 잃지 않아야 하는데.”

“……?”

엘리제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갑자기 웬 좋은 날? 얼마 뒤 예정된 탄신연회를 말하는 건가?

그 표정을 본 민체스터는 곧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영애는 아직 못 들었나 보군.”

“무엇을 말씀이신지?”

하지만 민체스터는 대답 대신 혀를 찼다.

“이런 린덴, 이 녀석. 혼을 내줘야겠군. 아직까지.”

도대체 무슨 말이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좋은 날? 그런데 황태자를 왜 혼낸단 말인가?

민체스터는 이렇게만 말했다.

“곧 린덴이 직접 알려줄 것이야. 만약 시간이 지났는데도 별말 없으면 나한테 이야기하게. 그 녀석을 따끔하게 혼내줄 테니.”

“아…… 네.”

엘리제는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민체스터는 잠시 잔잔히 그녀를 바라보다 말했다.

“영애.”

“네, 폐하.”

“내가 잠시 하루, 이틀만 여행을 다녀와도 될까?”

“네?”

엘리제는 당황해 그를 바라봤다.

여행이라고?

“어디로 행차하실 생각이십니까?”

“아, 뭐. 대단한 곳을 가려는 것은 아니고. 늘 이맘때쯤 가던 곳인데, 최근 몇 년간 못 가서. 브리티아 섬 중부 지방이네.”

중부라.

론도에서 기차를 타고 가면 금방 갈 수 있는 거리이긴 하다.

바람을 쐬러 가려는 것일까?

“가급적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그래도 잠시 하루 이틀 정도는 다녀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몸에 무리가 갈 일정은 최대한 피하셔야 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저나 밴 자작이 동행해야 합니다.”

민체스터의 상태가 급하게 안 좋은 것은 아니기에 그 정도 일정은 다녀와도 괜찮았다. 무리하지 않도록 조심만 한다면 말이다.

“그래, 고맙네. 잠시 다녀오지.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제가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야. 나도 영애와 같이 오순도순 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바쁜 영애를 뺏으면 린덴 그 아이가 화낼 것 같군. 밴과 여기 길버트 백작과 다녀오겠네.”

그러며 민체스터는 잠시 장미 정원에 핀 꽃들을 바라보았다.

“영애.”

“네, 폐하.”

“이전 짐이 한 부탁을 기억하지?”

엘리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에게 큰 선물을 주며 한 부탁.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나중에 린덴과 미하일, 그 아이를 부탁하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 고맙네.”

민체스터는 웃으며 말했다.

“이거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데, 시간 가는지 모르고 떠들었군. 종종 나와 이렇게 산책을 해주겠나, 영애.”

“네, 폐하.”

황제는 무엇을 보려는 것인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제 그만 돌아가지.”

***

엘리제는 어전을 나와 황실십자병원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특별히 한 일은 없었지만 황제와 나눈 대화 때문일까? 이상하게 마음이 무겁고 기운이 없었다.

‘나중에 린덴과 미하일, 그 아이를 부탁하네.’

그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자신 또한 간절히 원하고 있는 바다.

린덴과 미하일 모두 자신의 소중한 이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곧 벌어질 혈사에서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지난 삶처럼 그냥 외면?

사랑하는 린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아니야. 그건 절대 답이 아니야.’

하지만 그러면?

그러면 어떻게?

“하아.”

마치 난치병을 마주한 의사처럼 갑갑한 심정이 들어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엘리제는 눈을 크게 떴다.

황태자 린덴이 서 있었던 것이다. 커다란 백마를 이끌고.

“전하?”

“왔군. 진료는 끝났나?”

“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한 일이다.

그저 그의 얼굴을 보기만 했을 뿐인데, 조금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병원에서의 일은 잘 보셨어요?”

“그래. 잘 해결됐다.”

반면, 엘리제와 다르게 린덴은 뭔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 불만 가득한 얼굴에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하?”

“왜 그런 표정이지?”

“네?”

“왜 그렇게 울상이냔 말이야.”

“아.”

엘리제는 그제야 자신이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

고개를 젓는 엘리제를 보며 눈썹을 꿈틀한 린덴은 다가오더니 그녀를 안아주었다.

“……!”

엘리제는 흠칫 놀랐으나 가만히 그의 품을 느꼈다.

따뜻했다.

린덴은 특별히 뭐라고 더 묻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그녀를 안아만 주었다.

그 말 없는 행동이, 그 따뜻함이 그녀의 마음에 위로를 주었다.

“……고마워요.”

“뭐가?”

“그냥…… 그냥 전부 다요.”

엘리제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단단한 품 안에 파묻혀 아무런 생각 없이 계속 있고 싶었다.

“…….”

린덴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좋은 느낌.

그의 체온은 무뚝뚝한 얼굴처럼 늘 차가웠다. 하지만 왜 이렇게 닿을 때마다 따뜻한 느낌이 드는 걸까?

“점심은 먹었는가?”

“아니요. 아직.”

린덴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시간이 지금 몇 시인데?”

“일이 바빠서.”

“내가 잘 챙겨 먹으라고 했지? 지난번 약속하지 않았는가? 절대 거르지 않겠다고. 도대체 왜 맨날 거르는 거야?”

“죄송해요.”

엘리제는 배시시 웃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웃음이 나왔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좋았다.

“하아.”

린덴은 한숨을 토했다.

“안 되겠군. 혼을 내줘야겠어.”

“네?”

“이리로 올라와라.”

린덴은 백마 위에 올라탄 후 그녀를 끌어 올렸다.

얼떨결에 그의 앞에 앉은 엘리제는 당황해 그를 바라봤다.

“전하? 어딜 가시려고요?”

“널 혼내려.”

“네?”

엘리제는 커다란 푸른 눈을 깜빡거렸다. 이게 무슨 말이지?

린덴은 피식 웃었다.

“농담이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맛있는 것을 사주마.”

“아…….”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또 바쁜가?”

“아니에요. 그런데 저 맛있는 것 먹고 싶은데.”

바쁘긴 했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하지만 기분이 가라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다.

‘잠시 나갔다 오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와 이대로 헤어지기도 아쉬웠고.

“그래, 맛있는 것. 그리고 단 디저트도 좋겠지?”

“네, 딸기 케이크나 초콜릿 쉐이크요.”

“그래, 네가 좋아하는 망고 푸딩이랑 바나나 타르트도 사주지. 프랑소엔 마카롱도.”

린덴은 몸을 숙여 말고삐를 잡았다.

자연스레 그와 엘리제의 몸이 밀착되며 그녀가 그에게 안긴 자세가 되었다.

왠지 그의 품에 안겨 크림반도 심페폴에서 탈출할 때가 떠올라 엘리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간다.”

탁.

그의 손이 움직이자 말은 황궁을 달리기 시작했고 납치가 시작되었다.

범인은 백마 탄 왕자님.

달콤한 납치였다.

***

엘리제가 이상한 점을 느낀 것은 몇 시간 뒤였다.

처음 린덴은 그녀를 피카딜리의 멋들어진 레스토랑에 데려갔다.

현대 지구였으면 미슐랭 별을 3개는 받았을 법한 그 레스토랑은 미리 연락을 받았던 것인지, 황태자와 예비 황태자비를 극진히 대접했고 엘리제는 간만에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근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카린 베이커리의 디저트까지.

짧지만 행복한 기분 전환이었고, 엘리제는 이제 병원에 돌아가서 열심히 일해야지! 하고 마차에 올라탔는데…… 뭔가 이상했다.

피곤한 마음에 깜빡 졸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론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저, 전하?”

놀라 찾았는데, 그는 자신의 바로 옆에서 조각 같은 얼굴로 신문을 보고 있었다.

“일어났나? 피곤한 것 같은데, 조금 더 자도록 해라.”

“…….”

“앉아서 자면 관절에 안 좋으니, 자, 여기에 머리를 베고 누워.”

그러며 그는 자신의 허벅지를 가리켰다.

그녀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어쨌든 그가 옆에 있으니 놀란 가슴은 가라앉았지만.

“전하, 마차가 길을 잘못 든 것 같아요.”

“길?”

“네, 황궁은 이쪽이 아닌데…… 아니, 아예 론도를 벗어난 것 같은…….”

그녀는 창밖을 바라봤다.

론도도, 그렇다고 근교 도시도 아니었다.

웬 한적한 시골길?

들판에 난 꽃들이 예쁘게 그들을 보고 있었다.

“아, 제대로 가고 있다.”

“네?”

“황궁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 아니거든.”

“네, 네? 그러면 어디로?”

린덴은 신문을 접으며 피식 웃었다. 위험해 보이는 웃음.

“납치범한테 그런 걸 물어보면 어떻게 하느냐?”

“……네? 납치범…… 요? 누구를 납치……?”

그는 그녀를 바라봤다.

왠지 불길해 보이는 그 금안에 그녀가 움찔할 때, 그가 다가왔다.

“전…… 하?”

뒤로 물러났으나 좁은 마차 안에서 어디를 가겠는가?

그가 그대로 입술을 덮었고, 그녀는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전기가 흐르듯 머리가 하얘져 신음을 뱉었다.

“아…… 저…… 전하?”

린덴은 살짝 입을 뗀 후, 옅게 눈물이 맺힌 그녀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말했다.

“누구긴? 너를 납치 중이다.”

“……?!”

엘리제는 상황이 이해가 안 돼 눈만 깜빡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나를 납치해?

하지만 그녀는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내가 계속 말 안 들으면 혼내준다고 했지?”

린덴이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었던 것이다.

혀가 붉은 입술을 벌렸고, 거침없이 안을 헤집으며 농락했다.

“저, 전하…….”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몸을 움켜쥐며 그는 낮게 말했다.

“혼내주려 납치하는 거니, 잠자코 따라와.”

“……!”

린덴은 생각했다.

사실 이 납치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에게 할 굉장히 중요한 용무.

하지만 그 용무를 보기 전에 먼저 혼부터 내줘야겠다.

‘바쁘게 지내며 지금까지 나를 속 상하게 했지.’

그러니 같이 시간을 보내며 잔뜩 혼내줄 것이다.

잔뜩.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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