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3 6-1 결투 =========================================================================
1장 결투 - 1
황제가 괜찮다는 듯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
“영애.”
“네, 폐하.”
“그때 내가 했던 부탁은 기억하고 있지?”
“……!”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가 자신에게 큰 선물, 의사 겸업을 허락해 주며 했던 부탁.
‘나중에 린덴과 미하일, 그 아이들을 부탁하네.’
그녀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내가 너무 큰 부담을 지우는 것 아닌지 모르겠군. 미안하네.”
“아닙니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부탁은 자신이 가장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하지만 방법을 알 수가 없어.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린덴과 함께해서 행복한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리고 황제의 건강이 악화됨에 따라, 귀족파와 황제파 간의 긴장도 격화되어 갔다.
황위 계승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특히 황제가 정무에 손을 떼며, 황태자 린덴에게 권력이 조금씩 이양되는 기미를 보이자, 귀족파들의 초조함은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절대 안 되오!”
콰앙!
귀족파 서열 2위 메르키트 백작이 회의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회의장에는 3황자 미하일과 암셀 후작을 제외한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이렇게 진행되다가는 황태자가 그대로 황위를 계승받게 될 것이오!”
귀족파 귀족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알고 있었다.
지금 그들 귀족파와 3황자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볼 때, 머지않은 시기에 황위 이양이 일어날 것 같은데, 그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정통성에서도 밀리고, 세력에서 압도하는 것도 아니다. 황태자 개인의 흠을 잡을 수도 없다. 이미 린덴은 황태자로 보위하며 뛰어난 국정 능력을 연거푸 보여주었다.
이전이라면 지지율이 낮은 점이라도 트집을 잡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현재 황태자 린덴의 지지율은 정상을 달리고 있었다.
크림전쟁의 승전과 예비 황태자비, 등불을 든 여인 때문에.
“정식 약혼 발표가 난 후 지지율이 다시 폭등했소. 이대로는 그가 황위를 물려받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하오! 그리고 그가 황위를 물려받게 되면 우리는 끝이오.”
귀족파 인물들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혈탑의 비극을 눈앞에서 목격한, 그래서 복수의 칼을 평생 갈아온 그가 황제가 된다.
그러면 자신들의 처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도 저희에게는 암셀 후작이 계시는데…… 설마…….”
한 귀족이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황제가 되더라도 차일드 가문을 건드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메르키트는 메기 같은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차일드가.
국제 금융계의 대재벌인 그들은 브리티아 제국이라도 감히 건들 수 없는 금융 제국을 구축하고 있었으니까.
지금은 봉건 영주의 시대가 아니다.
여섯 개의 대륙이 하나로 묶여 교역을 하고 있고, 서대륙 끝의 브리티아 섬에서 동방 끝의 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산업화는 물류 생산의 폭발을 이끌어냈고, 론도에만 250만의 넘는 시민이 거주한다.
그런 거대한 세계란 생명체를 지탱하는 것은 ‘돈’이란 혈맥이었다.
돈이 없다면 세계의 모든 움직임은 한순간 정지한다. 세계 최강국이라는 브리티아 제국도 대혼란을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전 세계의 돈줄을 움켜쥐고 있는 차일드 가문은 그런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가문이다.
그들이 서대륙 열강에 빌려준 돈들을 일시에 회수하거나 대출을 멈춘다면 전 세계 경제는 한순간에 멈출 것이다.
가히 금융 제국의 황제라 부를 수 있는 강력한 금권.
그런 차일드 가문이었기에 현 황제 민체스터도 감히 아내의 복수를 할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차일드가를 건드린 후 그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에.
‘하지만.’
메르키트 백작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가 이 계산을 안 하고 있을까? 그 황태자 린덴이?’
오로지 일평생을 복수를 위해 살아온 황태자다.
그런 그가 차일드 가의 금권을 고려하지 않고 있을까?
아니다.
아닐 것이다.
그라면, 그 황태자라면 분명히 계산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금권의 사각을 뚫고 자신들의 목을 쳐 낼 계획을 가지고 있겠지.
‘젠장.’
메르키트는 초조하게 손가락을 깨물었다.
‘이대로 진행하다가는 최후의 방법밖에 남지 않게 돼.’
최후의 방법.
그건 바로 군사적 정변을 뜻한다.
메르키트와 귀족파라도 절대 고르고 싶지 않은 선택지.
하지만 저 린덴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면, 그래서 자신들의 목을 치려 한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에게는 검제 전하와 검기사단이 있으니까.’
정변을 일으킨다면 승산은 있었다.
아무리 황태자가 공제라 불린다지만 3황자는 서대륙 최강검인 검제.
그리고 론도 내 주둔 중인 검기사단은 전원이 오러 나이츠로 이루어진 말도 안 되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로열 나이츠인 총기사단은 대부분 론도 교외에 주둔하고 있으니, 검기사단으로 길버트 백작의 로열 가드만 제압하면 된다.
‘아니야. 정변은 아니야.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메르키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라도 그런 최악의 수를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정변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쥐가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아.”
메르키트의 고뇌가 깊어졌다.
그렇게 일촉즉발의 나날들이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엘리제가 병원의 일, 보건 정책, 궁내부의 일에 더해 약혼 준비까지 하며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바쁜 와중에도 린덴과 가끔 만나 아쉬운 만남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결국, 폭탄의 도화선이 터져 버리는 대사고가, 그리고 엘리제가 처음으로 그들의 다툼에 개입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 버렸다.
***
발단은 대저택이 모인 화이트가의 도로에서였다.
콰앙!
히이잉!
요란스러운 충돌 소리와 함께 말의 비명이 울렸다. 간밤에 내린 비 탓일까? 도로 한가운데에서 마차 충돌 사고가 일어났던 것이다!
“무슨 일이냐?!”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메기 얼굴 메르키트 백작은 인상을 와락 쓰며 마차에서 내렸다.
충돌 시 벽에 부닥친 탓에 오른팔이 심하게 아파왔다.
“저쪽에서 마차가 들이닥쳐서…….”
상대 마차를 본 메르키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날아오르는 매 문양.
도리슨 백작이었다.
‘젠장. 그렇지 않아도 싫어하는 놈이.’
도리슨 백작은 재정부 장관으로 재상인 엘 후작과 더불어 황제파에서 수위에 꼽히는 권력자이며, 린덴의 밀명으로 모종의 비밀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대귀족이었다. 사실상 황제파 서열 2위의 핵심 인물.
그런 도리슨 백작은 얄미운 말투로 다혈질인 메르키트와 툭하면 충돌하곤 했다.
과연 마차의 문이 열리며 메르키트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빤질빤질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이거 메르키트 백작 아니오? 마부 교육 좀 잘 시켜야겠소이다. 큰일 날 뻔하지 않았소?”
“뭐라고?! 잘 달리고 있는 마차에 들이받은 주제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허. 우리가 들이받았다고 말하셨소? 이거 참 내가 창문으로 봤을 때는 정반대였는데 말이오. 여봐라. 저 메르키트 백작의 말이 참이냐?”
도리슨의 마부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주인처럼 얄미운 말투로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정해진 길을 그대로 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저 메르키트 백작가의 마부가 낮술이라도 했나 봅니다. 정해진 방향으로 가고 있던 저희에게 마차를 돌진하다니.”
메르키트의 마부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도 정해진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먼저 충돌한 쪽은 저쪽입니다!”
그 말에 도리슨 백작이 호통을 쳤다.
“허! 이 천한 놈이 거짓말을! 솔직히 말하지 못할까? 누구에게 배웠기에 그딴 거짓말이냐?!”
메르키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누구에게 배웠기에.
주인인 그를 대놓고 질책하는 말이다.
“지금 말 다했소, 백작?”
“다 안 했소. 마차 사고를 일으킨 것에 대해 사과를 받아야겠소. 다행히 아무도 안 다쳤지만, 하마터면 크게 위험할 뻔했소이다.”
“사…… 과?”
메르키트의 얼굴이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붉어졌다.
실제로 누가 잘못을 했는지는 도리슨도 메르키트도 모른다. 마차 안에서 밖을 직접 보지 않았으니까.
메르키트는 그래도 아마 자신의 마부가 실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은 했다.
왜냐하면 성품이 착하고 성실해 마부로 쓰고 있긴 해도 평소에도 이런저런 잔실수가 많은 이였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 실제로 누가 잘못했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감정이 안 좋았던 도리슨 백작과 메르키트 백작은 그저 서로의 흠을 잡아 망신을 줄 의도였던 것이니까.
“왜 못하겠소? 이거 실망이구려. 명망 높으신 메르키트 백작께서 자신의 잘못도 인정하지 못하는 소인배인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는데.”
“지금…… 나한테…… 소인배라고…… 했나? 이 제비 같은 녀석이!”
도리슨 백작의 얼굴이 굳었다.
제비 같은 녀석. 빤질빤질한 얼굴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들었던 별명으로, 그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였다.
“제비? 그 말 당장 사과하시오.”
“사과? 웃기지 마라. 네놈이야말로 나 메르키트를 모독한 것을 무릎 꿇고 사과해라.”
도리슨 백작은 비웃음을 지었다.
“소인배를 소인배라고 한 것이 뭐가 잘못이오?”
“뭐?”
서로 지나치게 격해져 있던 탓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감정이 안 좋았던 사이인 탓일까?
도리슨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다.
“지난 과거, 레베카 황후께 백작이 한 일을 보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소만.”
“……!”
아차.
도리슨 백작은 내뱉고 나서야 자신이 지나치게 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메르키트 백작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진 것이다.
도리슨 백작이 무언가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
“이건…….”
하지만 그 순간.
철썩!
무언가 날아와 도리슨의 얼굴을 때렸다. 놀라 보니 메르키트가 끼고 있던 하얀 장갑이었다.
“……!”
장갑을 본 도리슨 백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메르키트가 싸늘한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말 잘했다, 도리슨. 내가 소인배라고? 그러는 넌 얼마나 대단한지 보지.”
그러며 그는 품 안에서 기다란 은색 금속을 꺼내 도리슨에게 겨누었다.
7연발 리볼버였다.
“나 메르키트 백작. 도리슨 백작에게 귀족의 명예를 걸고 결투를 신청한다.”
“……!”
“결투 시기는 지금 당장. 설마 소인배처럼 도망가진 않겠지, 도리슨?”
도리슨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진정하시오, 메르키트 백작. 지금 이 화이트가에서 총질이라도 하겠다는 거요?”
메르키트가 피식 웃었다.
“왜 겁나나?”
“……!”
“결투 방식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하지. 서로 스무 걸음을 걸은 후 사격을 시작하는 것으로. 입회인은…….”
마침 화이트 가를 걸어가던 한 노귀족이 보였다.
랑슬 자작.
문인으로 황제파도, 귀족파도 아닌 명망 높은 노귀족이었다. 입회인으로 딱 적절한 신분.
“저 랑슬 자작에게 부탁하면 되겠군.”
“……!”
“왜? 다시 한 번 묻지만 겁나나? 주둥이만 산 네놈답게 겁나면 사과해도 좋아. 다만 개처럼 무릎 꿇고 하는 사과가 아니면 받지 않겠다.”
결국, 그 말에 도리슨 백작의 얼굴도 싸늘하게 굳었다.
<주말은 쉽니다.>
============================ 작품 후기 ============================
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