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4 6-1 결투 =========================================================================
1장 결투 - 2
“지금 그 결정. 후회하게 될 것이오.”
“얼마든지.”
그렇게 이른 오전에 전혀 생각지도 않은 결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그것도 귀족파와 황제파의 최고 핵심 인물들끼리.
메르키트 백작과 도리슨 백작은 서로 등을 맞대고 화이트가의 한복판에 섰다.
“저, 정말 결투를 하시겠습니까?”
강제로 입회인이 된 노귀족, 랑슬 자작이 하얀 얼굴로 물었다.
랑슬 자작은 중립파지만 둘의 결투를 말리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국이 살얼음 같은데, 각 계파의 핵심인물인 둘 중 한 명이라도 다치면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이 일어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투는 귀족의 고유 권한이었다.
그리고 감정 다툼 끝에 서로가 받은 명예 손상이 너무 컸다. 이런 상황에서 물러서면 둘 모두 두고두고 비웃음당할 것이다.
“자작은 걱정하지 말고 진행해 주시오.”
둘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 기회에 저 재수 없는 녀석을 없애겠다.’
‘어쩔 수 없다. 차라리 이번에 메르키트 백작을 제거해야지.’
둘 모두 각 계파의 핵심 인물.
생각지도 못한 결투를 벌이게 되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상대의 목숨을 뺏을 생각이었다.
이렇게 합법적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다면 각자의 계파에 큰 이득일 테니까.
랑슬 자작은 어쩔 수 없이 신호를 내렸고, 둘은 양방향으로 얼굴을 굳힌 채 걸어갔다.
그리고 이윽고 스무 걸음.
찰칵. 찰칵.
권총이 장전되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고.
곧바로 돌아선 그들이 서로를 향해 총을 쐈다.
타앙! 타앙!
“……!”
첫발은 불발!
그들은 두 번째 발사를 준비했다.
‘한 번에……!’
도리슨은 이를 악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결투에 휘말렸지만, 질 생각은 없었다. 반드시 귀족파의 핵심 인물인 메르키트를 제거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메르키트도 마찬가지였다.
‘반드시 심장을……!’
다시 타앙! 총성이 울렸고.
“커억!”
외마디 비명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메르키트의 안색이 환해졌다. 자신의 총알이 도리슨을 관통한 것이다!
순식간에 도리슨의 배가 시뻘겋게 물들어갔다.
하지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도리슨이 격통을 참으며 다시 총을 겨눈 것이다.
아득해지는 의식을 붙잡으며 정확히 메르키트의 가슴을 향해.
“……!”
그리고 그 총구를 본 순간, 메르키트는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급히 총을 들어 다시 도리슨을 겨누려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타앙!
총성이 울렸고.
퍼억!
메르키트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아…….’
메르키트는 도리슨과 다르게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중앙 가슴이 정통으로 관통된 것이다!
“아니, 이게 무슨?!”
그제야 총소리에 놀라 화이트가의 저택들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미 둘은 의식을 잃고 쓰러진 뒤였다. 그들이 흘린 피로 화이트가의 도로가 빨갛게 물들었다.
“비키시오! 도대체 이게 무슨?!”
마침 저택 안에서 업무를 보던 재상 엘 후작이 사람들을 제치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하얗게 얼굴을 굳혔다.
“아니, 도리슨. 그리고 메르키트 백작?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옆에 서 있던 노귀족, 랑슬 자작이 허겁지겁 상황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엘 후작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아니, 무슨 이 바보 같은! 애들도 아니고!’
물론 둘의 사이가 원래 안 좋았던 것은 안다.
그리고 말다툼을 하다 명예가 손상된 귀족들끼리 결투를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하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지! 하필 이렇게 안 좋은 시기에!
그는 급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지시했다.
“둘 모두 살려야 합니다! 빨리 병원으로 옮길 준비를 해주십시오!”
사람들이 허겁지겁 그들을 마차에 실어 병원으로 옮겼다.
엘 후작이 직접 그들을 따라갔다.
그는 초조히 입술을 깨물었다.
‘둘 모두 살려야 해. 반드시.’
안 그래도 폭풍 같은 정국이다.
그런데 각 계파의 핵심 인물이 서로의 총을 맞고 사망한다? 어떤 후폭풍이 몰아닥칠지 모른다.
물론 언젠가는 부닥쳐야 할 그들이지만, 이런 식의 예상치 못한 충돌은 황제파도, 귀족파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상처를 본 엘 후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의학에 문외한이었지만, 한눈에 봐도 상처가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화이트가에 바로 붙어 있는 로즈데일병원에 간 엘 후작은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이런 상처는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로즈데일병원의 수석교수 카일 준남작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수술을 해도 안 되는 것이오?”
“메르키트 백작님은 현재 심장 손상이 의심됩니다. 그리고 도리슨 백작님의 경우도 간이 관통되었습니다. 단순히 위장이 관통된 것이 아니라서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하아…….”
엘 후작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반드시 살려야 하는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촉즉발의 상황인데. 앞으로 론도 정국이 어떻게 될지 막막했다.
그런데 그때, 수석교수 카일이 한 줄기 희망이 담긴 말을 하였다.
“그런데 어쩌면……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지만…… 제가 아는 한 의사라면 이런 총상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누구요?!”
카일은 익숙한 이름을 꺼내었다.
“황궁어의 겸 황실십자병원의 수석교수인 레이디 클로랜스입니다.”
“……!”
“엘리제 자작, 그분이면 이런 총상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레이디 클로랜스. 엘리제 자작.
딸의 이름이었다.
***
그때 엘리제는 린덴과 같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교수실에서 서류를 보며 일하는 중이었는데, 린덴이 찾아왔다.
“전하…… 아니, 린덴 무슨 일로?”
웬일이냐는 듯한 물음에 린덴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왜? 오면 안 되는가?”
“아니, 그건 아니지만…… 혹시 용무가 있나 해서요.”
“그냥 보러 왔다.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그 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제 익숙해질 법하건만, 저런 직설적인 표현이 꽂힐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저 지금은 할 일이 있는데…… 끝나고 제가 찾아가면 안 될까요?”
“일 끝나고 나서 온다고? 어느 세월에? 내가 늙어 죽고 나서야 오겠군. 도대체 우리가 지난번 얼굴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은 하나? 이렇게 내가 일부러 찾아오지 않으면 얼굴을 구경도 할 수 없으니.”
뭐가 서운한지 린덴은 불퉁불퉁 말했다.
엘리제는 배시시 웃었다.
맨날 바쁜 것은 자신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가 저러니 그냥 왠지 기분이 좋았다.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리제, 네가 일하는 것은 방해 안 하마. 나도 일할 것 가져왔으니, 서로 같이 일이나 하자.”
“정말요? 거짓말 아니에요?”
그녀가 미심쩍은 듯 물었다.
그가 이렇게 일이나 같이하자고 찾아온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끝(?)이 좋지 않았다.
밀폐된 공간에 맹수와 단둘이 함께 있으니 예쁜 초식동물이 무슨 일을 당했겠는가.
‘하, 하여튼 정말 밉다니까.’
이 방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린 엘리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납치 사건 이후 변한 것이 있다면, 그의 접근이 거침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무, 물론. 나도 시, 싫은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으니 곤란했다.
“오늘은 안 돼요. 재정부에 기획안을 제출해야 한단 말이에요.”
선을 긋는 그녀의 말에 린덴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누가 뭐라고 했느냐? 난 정말 일 하러 온 것이다. 일.”
일이란 단어에 강조를 넣으며 서류를 펼쳐 보여주었다.
“알겠어요. 믿을게요.”
그간의 행적을 보면 솔직히 전혀 믿음이 가진 않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같이 일이라. 일만 하는 거면 당연히 좋았다.
정말로 린덴은 보란 듯이 응접용 소파에 앉아 서류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얄미운 크리스가 가져다준 일거리였다.
‘크리스, 그놈.’
그녀의 작은 오빠를 떠올린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대로 그 납치 사건이 일어난 후, 그가 자신을 보는 시선이 한결 더 싸늘해졌다.
그나마 이전은 도둑‘님’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그냥 도둑‘놈’이었다.
유능하지만 않으면 잘라버리는 건데! 누가 그녀의 오빠 아니랄까 봐 너무 유능하니 자르지도 못한다.
“…….”
그는 엘리제를 힐끗 바라봤다.
그녀는 백금발을 한 갈래로 묶고 수술복에 가운을 입은 채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전혀 꾸미지 않은 모습.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형처럼 아름다웠다.
‘엘리제. 리제.’
그는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엔 정말로 같이 일하러 온 것인데, 자꾸 그녀가 신경 쓰여 서류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곁눈질로 엘리제만 바라보다 린덴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집중은 잘하는군. 나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 건가?’
자신은 그녀가 의식돼 글자가 하나도 안 들어오건만, 그녀는 전혀 그런 게 없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최상의 집중력!
마치 자신은 먼지가 된 듯한 느낌이다. 의식은커녕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왠지 꼬인 마음이 들어 말했다.
“엘리제. 리제.”
“…….”
하지만 대답도 없다.
집중해서 못 듣는 것이다.
린덴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정말 혼을 내줘야겠다. 물론 그녀가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내 마음이었다.
“크흠. 리제. 리제?”
“……네? 부르셨어요?”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고개를 드는 엘리제.
린덴은 자신의 소파 옆자리를 두드렸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이쪽으로 와 보도록.”
“할 이야기가 있다고요? 거기서 하셔도 되잖아요.”
“너무 멀어.”
“안 먼데…….”
“멀다고. 잘 안 들리니, 옆으로 와라.”
시커먼 속이 훤히 보였다. 엘리제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거, 거짓말하지 마요. 이상한 짓 하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그녀도 학습 능력이 있었다.
지금껏 린덴이 찾아왔을 때 저 소파 옆자리에서 그에게 당한 일이 도대체 얼마인가? 떠올리기도 민망했다.
린덴이 얼굴을 구겼다.
“이상한 짓이라니. 아니야.”
“그래도 싫어요. 일해야 해요.”
결국 그는 작전을 바꿨다.
“그러면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차나 타주겠나?”
“차요?”
“응, 차. 깔끔한 동방 차가 마시고 싶군. 네가 달여 주는.”
엘리제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 차만 마실 거죠?”
“날 못 믿나?”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어 그녀는 차를 달여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청량한 향이 방 안에 퍼졌다.
“여기. 뜨거우니 조심히 드세요.”
“그래.”
그리고 그녀가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고 몸을 돌려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차가운 손이 덥석 엘리제의 손목을 잡았다.
흠칫 놀라는 순간, 그가 그녀를 잡아당겼다. 자신의 품으로.
“리, 린덴?!”
그녀는 그의 가슴에 풀썩 안겼고, 당황해 고개를 드는 순간.
“읍……!”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엘리제는 믿으라면서요! 란 표정을 지었으나 소용없었다.
“믿느냐고 물어봤지 키스 안 한다고는 안 했다.”
거짓말쟁이!
하지만 그런 항의는 곧 사그라졌다. 그의 혀가 얽혀 들어가며 정신이 몽롱해진 것이다.
“아…….”
그는 탐닉하듯 한참이나 그녀를 괴롭혔다.
엘리제의 몸이 파르르 떨렸고,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힐 때쯤에야 그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나, 나빠요.”
“뭐가?”
“이상한 짓 안 한다고 했으면서.”
“내가 그랬나? 잘 기억 안 나는데?”
린덴은 피식 웃었다.
왠지 위험해 보이는 그 미소에 그녀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이젠 그만. 절대 안 돼요. 나 일해야 해요.”
“일해. 누가 하지 말래?”
“이래 놓고 어떻게 일해요!”
린덴은 쿡쿡 웃었다.
이 소녀는 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왜 이렇게 나를 애타게 할까.
그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엘리제. 리제.”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여진 반지가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나의 소녀. 절대 놔주지 않을 내 것.
‘빨리 결혼해야겠어. 최대한 빨리.’
뾰로통한 그녀의 이마에 린덴이 가볍게 입맞춤했다.
밖에 나가면 지금 이 시각에도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인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잊혔다. 가슴이 벅차 왔다.
그런데 둘이 그렇게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그들의 행복을 산산이 부수는 일이 일어났다.
“자작님! 큰일 났습니다! 응급 환자입니다!”
“……!”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