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8 6-2 양방 수술 =========================================================================
2장 양방 수술 - 3
피에 젖은 것은 장갑뿐이 아니었다.
수술복, 팔, 다리, 심지어 얼굴까지 피에 범벅이었다.
몸에 묻은 피를 닦고, 수술복을 갈아입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곧바로 도리슨 백작을 치료해야 했다.
‘하아.’
한숨을 삼키고 옆의 수술방으로 가려는데, 낮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리제.”
“……!”
황태자 린덴이었다.
지금껏 밖에서 수술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그녀를 부른 것이다.
그런데 그의 눈빛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안타까움이 담긴 가라앉은 눈빛이었다.
‘엘리제.’
린덴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그녀가 수술하는 것을 직접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럴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 자신의 그녀가 안간힘을 쓰며 수술하는 모습을 목격한 그는 안쓰러운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녀가 무리하는 것을 보니 가슴이 찢어지듯 속상했다.
“전하?”
엘리제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그가 다가왔다.
그리고…….
꽈악.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저, 전하? 피가?”
엘리제는 당황해 그를 불렀다.
다른 사람이 보는 것보다 자신의 몸에 젖은 피가 그에게 묻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린덴은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대신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라.”
“……!”
“네가 힘들면…… 내가 속상하니.”
그 진심 어린 말을 듣는 순간.
엘리제는 가슴이 울컥했다.
“네…… 전하. 린덴.”
그녀는 잠시. 정말 잠시 그의 품을 느꼈다.
가슴이 따뜻해지며 힘이 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의 몸에서 떨어지며 말했다.
“저 다녀올게요.”
“…….”
“나중에 메르키트 백작님한테 맛있는 거라도 얻어먹어야 할 것 같아요. 이번 수술은 너무 힘들었어요.”
그녀의 농담 섞인 말에 린덴이 고개를 저었다.
“저놈 말고 내가 사줄게. 뭐 먹고 싶어? 단 음식? 딸기 케이크? 바싹 익힌 스테이크 요리?”
“음…… 딸기 케이크 말고 다른 거요.”
린덴은 그 거절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딸기 케이크를 거절하는 것은 처음이다.
“딸기 케이크도 좋지만 이번에는 다른 음식 먹어요.”
“어떤?”
“맨날 제가 좋아하는 것만 먹었으니, 이번엔 린덴이 좋아하는 것으로 먹어요.”
그 말에 린덴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 네가 좋아하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니까.”
“치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어쨌든 절대 무리하지 마라.”
린덴은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맞추었다.
엘리제는 그에게서 떨어진 후, 옆의 수술방으로 걸어갔다.
두 번째 수술.
도리슨 백작의 간 총상을 치료하기 위해.
‘조금만 더 힘내자, 엘리제. 할 수 있어.’
그리고 작은 소녀, 외과의사는 굳은 얼굴로 수술방의 문을 열었다.
“레이디 클로랜스!”
기다리고 있었는지 방의 모두가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엘리제는 도리슨 백작의 상태를 살폈다.
“현재 바이탈은 어떤가요?”
“수축기 혈압 107. 맥박은 130회입니다.”
그 말에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아까 전보다 호전된 상태인 것이다.
‘그레이엄 선생님.’
그녀는 수술 필드 가운데에서 지혈에 열중인 그레이엄 남작을 바라봤다. 아마 그가 해낸 일일 것이다.
그레이엄도 그녀를 돌아보았다.
“오셨습니까, 레이디 클로랜스?”
“네, 선생님. 쉽지 않으셨을 텐데 감사해요.”
그 말에 그레이엄이 까칠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저도 이래 봬도 젊은 천재라 불리는 명의입니다. 이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엘리제도 마주 웃었다.
그녀는 간호사에게 부탁했다.
“수술 장갑을 주세요.”
“네, 교수님.”
찌익. 새롭게 장갑을 낀 그녀는 수술 필드 앞에 다가갔다.
이미 그레이엄이 배를 열어놓아 커다란 간이 붉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철제 집게 주세요. 바로 수술 이어서 진행하겠습니다.”
그렇게 그녀의 두 번째 싸움이 시작되었다.
***
방금 극악한 난이도의 심장 수술을 마친 탓일까, 아니면 그레이엄 남작의 전 처치가 훌륭해서일까?
심각한 정도의 간 손상이었지만 엘리제는 한결 편안한 느낌을 받으며 수술을 진행했다.
“간십이지장 인대에 접근합니다. 시야 확보해 주세요.”
“네, 교수님.”
다른 어시스트 의사가 창자를 당겨 시야를 밝혔다.
그녀가 지금 하려는 것은 프링글 조작(Pringle Maneuver)!
간으로 향하는 간 동맥, 문맥 정맥을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그레이엄이 간을 손으로 당기며 그녀의 조작을 도왔다.
엘리제는 고맙다는 시선을 보낸 후 철제 집게를 움직였다.
“차단합니다.”
찰칵!
금속성이 울리며 철제 집게가 간 동맥, 문맥 정맥을 단단히 물었다.
“이렇게 하면 간으로 향하는 혈류가 차단되는 것입니까?”
그레이엄의 감탄이 섞인 물음에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심한 간 출혈 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하면 간에 피가 부족해 간 손상이 올 수 있으니, 오랫동안 사용하는 것은 피해야 해요.”
“그러면?”
“앞으로 최대한 빨리 수술을 끝내야 하죠.”
늘 그렇듯, 출혈 환자의 수술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환자가 저혈량 쇼크로 사망하기 전에 지혈을 완료해야 하니까.
“세임 선생님은 거즈로 출혈 부위를 패킹해 주세요. 그레이엄 선생님은 한 손으로 대동맥에서 간으로 향하는 혈관이 나오는 부위 위쪽을 지긋이 압박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녀의 말을 따르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울컥울컥 쏟아지던 피의 상당 부분이 멈춘 것이다.
간의 해부학적 구조를 정확히 이해한 조처 덕분이었다.
‘이제 총알을 꺼내고.’
엘리제는 간 아랫부분에 박혀 있는 총알을 바라봤다.
메르키트 백작의 심장에 박혀 있던 총알보다 구경이 더 컸다.
만약 이 정도 구경의 총알이 심장에 박혔다면 메르키트 백작은 병원에 오기도 전에 즉사했을 것이다.
‘그래도 심각한 손상이긴 하지만, 다행히도 간을 절제해 내야 할 정도는 아니야. 문제는 총알이 박히며 생긴 동맥 손상들인데.’
그 동맥 손상을 치료하는 것이 그녀가 할 일이었다.
엘리제는 굳은 표정으로 총알을 조심히 간에서 빼내었다.
짱!
미리 준비해 둔 철제 그릇에 총알을 떨어뜨렸다. 금속성이 수술장을 울리는 순간. 울컥. 다시 피가 솟구쳐 올랐다.
관통면에서 절단된 동맥들이 노출되며 출혈이 시작된 것이다!
‘침착하게.’
순식간에 수술 필드가 피로 차오를 만큼 많은 양의 출혈이었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거즈로 피를 닦아 달라 부탁한 후 차분히 손을 움직였다.
“지혈용 철제 집게. 최대한 많이. 그리고 수술실도 준비해 주세요.”
찰칵! 찰칵! 찰칵!
그녀는 일단 지혈용 소형 철제 집게로 혈관들을 집었다. 집게가 혈관을 단단히 물자, 절단면이 입을 다물며 피가 멈추었다.
그렇게 임시방편으로 출혈을 멈추게 한 그녀는 한 손으로 수술용 실을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이 춤을 추었다.
“원 핸드 타이.”
그 손가락의 움직임에 어시스트하던 의사가 감탄성을 토했다.
실로 혈관을 묶어 지혈하는 기법인 타이.
그녀의 손가락이 보여주는 움직임은 그야말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 타이였다. 그 절제되고 정확한 움직임은 아름답다 느껴질 정도.
질끈.
잘린 동맥이 실에 묶였다.
그녀는 차분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타이. 그리고 힘을 잃는 동맥들.
그렇게 시간이 지난 후, 총알이 박혔던 관통면은 완벽히 지혈되었다.
‘이제 마지막. 하대정맥 손상만 치료하면 돼.’
그녀는 가장 어려운 간 뒷부분에 위치한 하대정맥을 바라봤다.
하대정맥(Inferior Vena Cava).
인체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대동맥과 더불어 가장 큰 혈관 중 하나이다.
총알이 깊게 뚫고 가며, 그 하대정맥에도 상처가 났다.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그레이엄이 물었다. 천재라 불리는 그이지만, 저 대정맥의 손상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엘리제는 짧게 답했다.
“간단해요. 꿰매면 돼요.”
“혈관을…… 말입니까?”
그레이엄은 놀라 물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네.”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해요.”
조금 전에는 심장도 꿰맸다.
그리고 과거 지구에서는 현미경을 보며 미세 혈관도 잇던 그녀였다. 저런 커다란 대정맥쯤 꿰매는 게 뭐가 어렵겠는가?
하지만 그레이엄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이 시대 의사들에게 혈관을 수리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을 따라갈 수가 없군요.”
그는 그녀를 마음속으로 연모하고 있다.
밝힐 수 없는, 괴로운 짝사랑이었다.
그래서 한 다짐이 있다.
한 남자로서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다면, 의학적 실력으로라도 그녀를 옆에서 도와주겠노라고.
그런 마음으로 노력하고, 또 노력해 왔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는 닿을 수 없는 하늘과도 같아 좌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 엘리제가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도 하실 수 있으세요.”
“제가…… 말입니까?”
“네, 안 해보셔서 그렇지. 선생님의 실력이시면 충분히 하실 수 있으세요.”
“……!”
“이번에 제가 하는 것 보시고 다음에 해보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엘리제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그레이엄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어차피 앞으로는 지금처럼 내가 중환자 수술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그레이엄 선생님이 뒤를 이어주셨으면 좋겠어.’
그녀는 황후가 될 것이다. 황후가 되면 지금처럼 병원에 매여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마 지금의 반의반도 병원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전에 그녀는 이 황실십자병원의 의사들에게 가능한 많은 것을 전달할 생각이었다.
특히 저 노력하는 천재 그레이엄 선생님은 자신의 뒤를 이을 천재라 여기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레이엄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녀의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가슴이 먹먹했다. 이게 그가 아픈 마음을 안고, 그녀 곁에 머물러 있는 이유였다.
“그러면 봉합 시작하겠습니다.”
그들은 다시 수술에 몰두했다.
봉합용 철제 집게에 얇은 실을 끼운 엘리제는 대정맥을 한 땀 한 땀 꿰매기 시작했고, 그레이엄은 그녀의 손동작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며 지켜봤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이윽고.
타악.
그녀는 지혈용 도구를 수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길고 길었던 수술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메르키르 백작과 도리슨 백작, 둘 모두를 아무런 문제 없이 살려낸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또 한 번의 기적을 일으킨 작은 소녀에게 수술장 모두가 존경을 담아 외쳤다.
엘리제는 장갑을 벗으며 힘겨운 미소를 지었다.
참 힘든 수술이었다.
그렇게 의학사에 한 획을 그은 또 하나의 대수술이.
그리고 터질 것 같은 론도 정국에 큰 영향을 끼친 수술이 마무리되었다.
============================ 작품 후기 ============================
주말은 쉽니다.
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