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149화 (149/194)

00149  6-4 부자(父子)  =========================================================================

4장 부자(父子) - 1

메르키트 백작과 도리슨 백작이 살아났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장 총상과 간 총상을 입은 환자를 동시에 살려내다니. 특히 심장 총상을 치료한 것은 가히 기적과도 같이 여겨졌다.

이 시대에 심장이 다친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현대 지구에서조차 심장 부상을 치료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메르키트 백작과 도리슨 백작의 수술은 각각 학회에 보고되었고, 제국 의학계는 물론 공화국, 프러시엔, 오스트리엔 등 서대륙 전체 의학계를 경악으로 빠뜨렸다.

단 하나의 수술만 해도 의학사에 기록될 수술이었는데, 그런 대수술을 한 번에 해내다니!

“레이디 클로랜스? 엘리제 자작? 여자인가?”

“왜? 알지 않나? 크림반도의 등불을 든 여인, 그녀야. 브리티아 제국의 황태자비가 될.”

“아……! 정말 대단하군. 믿을 수 없어. 어떻게 이런 수술을. 완전 기적이 아닌가?”

브리티아, 프랑소엔, 프러시엔 등 서대륙 전체 의학계가 그녀의 수술에 경악하며 감탄했다.

원래부터 제국 최고의 의사로 여겨지던 그녀는 다시 한 번 그 명성을 드높였고, 서대륙 전체에 그녀의 이름이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녀를 감탄하고 칭송한 것은 의학계뿐이 아니었다.

론도의 귀족들.

그들도 그녀를 칭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처구니없는 결투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질 뻔한 정국을 안정시킨 것이다.

물론 곧 충돌할 서로였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뜻하지 않은 파국은 아무도 원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기적 같은 수술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론도 정국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였다.

특히 귀족파의 인물들은 감탄을 넘어서 감동에 가까운 감사를 느꼈다.

자신들은 정적이라 적대하던 그녀가 메르키트 백작을 살려낸 것이다.

사실 당시 상황을 봤을 때 그녀가 메르키트 백작을 포기했어도 아무도 비난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치적인 관계를 떠나 그만큼 심각한 상처였으니까.

하지만 엘리제는 오로지 환자를 살리겠다는 의사의 마음으로 큰 무리를 하면서까지 그를 살려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그녀를 적대하고 있었다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에 인간적인 감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이디 클로랜스에게는…… 정말 감사하구려.”

“그러게 말입니다.”

“그녀가 아니면 메르키트 백작은 어떻게 되었을지.”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도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결투라는 크나큰 실수를 한 메르키트였지만, 그는 차일드 가문과 더불어 귀족파의 중심이었다.

만약 그가 죽었으면 어떤 폭풍이 몰아닥쳤을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런 감사의 마음이 가장 큰 것은 다름 아닌 메르키트 백작 본인이었다.

“백작님, 가슴의 통증은 어떤가요?”

“……괜찮소이다.”

“숨이 차거나 어지럽거나 하는 증상은 없나요?”

“……좋아졌소이다.”

“다행이네요. 혹시나 다른 불편한 증상은 없나요?”

메르키트는 하얀 가운을 입고 친절하게 증상을 체크하는 백금발의 소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날 살려준 것이지…….’

수술 후 의식을 차린 메르키트는 혼란에 빠졌다.

일단 자신이 살아났다는 것에 놀랐고, 자신을 살린 것이 엘리제 자작이란 것에 더 놀랐다.

그리고 자신을 치료한 과정을 듣고는 놀람을 넘어 경악했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무리를 하면서까지 자신을 살린 것인가?

자신은 그녀의 적인데.

그녀를 헐뜯으려고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만약 주군인 3황자의 만류만 없었으면 그녀에게 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른다.

‘나였으면 그냥 죽게 놔뒀을 텐데.’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물어보니 소녀는 별 고민 없이 답했다.

“환자를 살리는 데 의사에게 특별한 이유가 필요한가요.”

“…….”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백작님께서도 이곳에서는 다른 생각하지 마시고 편하게 몸을 회복하는 데만 집중하세요. 불편한 것 있으면 저한테 말씀 주시고요.”

그 친절한 말에는 아무리 옹고집 메르키트라도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귀족파에는 그녀에게 치료를 받은 이가 꽤 있었다. 본인이 받든 가족이 받든 말이다.

그들이 왜 레이디 클로랜스만큼은 정치적 이해와 상관없는 성역이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존중해야 한다고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성녀.’

낯 뜨거운 단어였지만 메르키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단어를 중얼거렸다.

사실 그녀만큼 성녀, 세인트(Saint)란 단어가 어울리는 이도 없었다.

고귀한 몸으로 구제 병원에서 빈민을 위해 일했고, 론도를 대역병에서 구했으며, 크림반도에서는 병사들과 함께하였다.

더구나 지금은 예비 황태자비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있다.

그런 그녀가 성녀란 칭호를 받지 못한다면, 누가 그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그래, 다른 사람들의 말이 맞았구나. 이 소녀는 정치적인 눈으로 바라볼 존재가 아니야.’

귀족파든 황제파든.

이 소녀는 그런 이기적인 관계로 엮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메르키트는 지금껏 자신이 그녀를 어떻게든 헐뜯으려 했던 것이 미안하고 후회되었다.

고작 정치적인 목적으로 폄훼할 소녀가 아닌데.

‘황태자는 복도 많군. 이런 소녀를 황태자비로 맞게 되다니.’

그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저 소녀가 미하일의 짝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레이디 클로랜스.”

방을 나가는 엘리제를 메르키트가 불렀다.

“네, 백작님? 혹시 불편한 증상이라도?”

“……감사하오.”

“……!”

엘리제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을 적대하던 그에게 이런 직접적인 감사를 들을 줄은 몰랐다.

“아닙니다, 백작님.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러나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이 감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뭐라도 은혜를 갚고 싶구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말고…….”

“내 마음이 불편해서 감사의 선물이라도 하고 싶소. 혹시 나에게 부탁할 일은 없소? 정치적 입장 차이가 있어 큰 부탁은 들어주지 못하겠지만…….”

엘리제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원래 옹고집인 메르키트 백작은 완강했고, 결국 그녀는 말했다.

“딸기 케이크요.”

“……딸…… 뭐요?”

“딸기 케이크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메르키트는 메기 같은 얼굴로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것이다.

엘리제는 웃으며 말했다.

“퇴원하고 다음에 입궁하실 일이 있을 때 카린 베이커리의 딸기 케이크를 사다 주세요. 최근 론도에서 가장 맛있는 케이크 집이에요.”

그 말에 메르키트는 결국 헛웃음을 터뜨렸다.

딸기 케이크라니. 자신의 심장을 살려낸 외과의사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나 소녀 같은 단어가 아닌가?

“알았소. 카린 베이커리면 되겠소? 윈던 베이커리의 딸기 케이크도 맛있는데 그건 어떻소?”

“윈던 베이커리요?”

엘리제는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윈던 베이커리는 카린 베이커리와 맞먹는 전통의 딸기 케이크 강자였다. 그런데 귀족가 영애나 알 내용을 메르키트 백작이 어떻게 알고 있지?

메르키트는 얕게 웃었다.

“얼마 전 웨일 지방으로 시집간 딸이 가장 좋아하던 베이커리요. 나도 먹어봤는데 아주 달달한 게 맛있더구려. 단 음식 좋아하오?”

“좋아해요!”

달달, 이란 단어에 엘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가, 곧 얼굴을 붉혔다.

“죄, 죄송해요. 나도 모르게…… 단 음식 너무 좋아해서…….”

메르키트는 큭큭 웃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이 소녀를 대상으로 무슨 생각을 해왔던 것이지.

“퇴원하면 바로 사다 주겠소. 카린, 윈던 베이커리의 딸기 케이크 모두다.”

“네, 감사해요.”

그러고 엘리제가 정말로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등 뒤에 메르키트가 말했다.

“레이디 클로랜스.”

“……?”

“그냥 듣기만 하시오. 나중에 혹시…… 혹시라도 나에게 무언가 부탁할 일이 있으면 말하시오. 물론 내 입장이란 게 있으니, 큰 부탁은 못 들어드리오. 하지만 우리 계파와 주군인 3황자 전하에게 위해가 가지 않는다면 가급적 들어주려 노력하겠소.”

엘리제는 백작을 돌아보았다.

메르키트는 무거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빈말로 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엘리제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편히 쉬십시오.”

그러고 그녀는 방을 나섰다.

방금 메르키트가 한 약속이 앞으로 폭풍처럼 변할 론도 정국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 누구도.

***

그렇게 다소 어처구니없었던 결투 사건은 막을 내렸다.

중책을 맡고 있음에도 경솔하게 행동했던 두 사람에게 황태자와 3황자는 큰 꾸지람을 내렸다.

둘 모두, 특히 순간의 분노를 못 이겨 천추의 한을 남길 뻔한 메르키트는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 상황에서 본격적인 충돌은 서로 원하지 않는 바이기에 서로에게 사과 서신을 보내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론도 정국은 다소 안정을 찾는 듯했다.

결투 사건 이후로 서로 눈에 띄는 마찰을 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

황태자든 3황자든 드러나지 않게 각자의 싸움을 준비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의 목에 확실한 비수를 꽂아놓을 수 있게.

그렇게 불편한 고요가, 그리고 폭풍 전야의 시간이 흘러갔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고.

그리고 고대하고 고대했던 황태자와 레이디 클로랜스의 약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다.

황제 민체스터가 쓰러진 것이다.

***

사건은 외교 정책을 정하는 회의 때 일어났다.

기력이 갈수록 쇠약해지며 대부분의 정무를 린덴에게 맡긴 민체스터는 가급적 몸에 무리가 가는 활동은 삼가고 있었다.

다만 이번 정책 회의는 최근 프랑소엔 공화국에서 일어난 쿠데타에 따른 대외정책을 정하는 중요한 회의였기에 참석하였다.

“이번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시몬 니콜라스가 암살당하면서 지금 공화국의 수도인 파리스는 복마전 그 자체라고 합니다. 은밀히 지원하면 원하는 인물을 총통으로 세울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하지만 그러면 타국의 정치에 개입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뭐, 우리 브리티아에 친화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을 총통으로 세울 수 있으면 그런 비난을 감수할 만하지요. 다른 나라도 아닌 프랑소엔 공화국이니까요.”

프랑소엔은 서대륙 전통의 강국이었다.

섬나라 브리티아가 삼류 국가 취급을 받을 때도 당당히 서대륙 최강국 중 하나로 군림하던 나라. 지금도 브리티아 제국과 더불어 전 세계를 아우르는 최강국 중 하나였다.

그런 프랑소엔 공화국을 대하는 외교 정책을 정하는 자리인지라, 회의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서로 전문적인 근거를 토대로 의견을 나누었다.

“그래, 다들 이야기는 잘 들었네.”

민체스터는 외교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군. 지금 결정에 따라 앞으로 공화국을 대하는 우리 태도가 결정될 테니까.”

그러며 그는 황태자 린덴을 돌아보았다.

“이 결정은 너에게 맡기마. 내 대가 아닌, 네 대에 영향을 미칠 결정이니까.

“……!”

린덴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바마마. 그런 말씀은…….”

내 대(代)가 아닌, 네 대.

지금 민체스터는 본인의 뒤를 생각하고, 나라를 물려받을 다음 대의 황제 린덴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도 조금씩 권력을 이양받고 있지만, 아버지에게 직접 듣는 그 말은 린덴의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했다.

하지만 민체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뭘 그런 표정을 짓느냐. 사람마다 다 때가 있는 것이거늘.”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곧 쾌차하실 것입니다.”

화내듯 정색하는 아들에게 민체스터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래. 내가 말실수했구나. 물론 내 건강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야 주님만이 아시는 일이긴 하지. 이러다 다시 좋아질 수도 있고 말이야.”

“아바마마…….”

“그래도 이 결정은 네가 하려무나. 내가 당장 어떻게 되지 않는다고 해도, 네 대에 영향을 끼칠 정책인 것은 맞으니까.”

그러며 민체스터는 조언했다.

“나야 시몬 니콜라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총으로 공화국을 대했지만, 너까지 꼭 그럴 필요는 없단다.”

“…….”

“중요한 것은 시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선택하는 것이야. 그러면 어떤 선택을 하든 크게 후회하지 않을 거다.”

섬기기 위해 지배한다(Governance for serving).

황제의 권위는 신민들을 위하는 마음으로부터.

민체스터는 잔잔한 목소리로 로마노프 황가의 제왕학을 언급했다. 그가 일평생을 따른 통치 철학이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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