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0 6-4 부자(父子) =========================================================================
4장 부자(父子) - 2
“뭐, 너야.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잘하겠지.”
민체스터는 아들을 믿었다.
그가 사랑하는 똑똑한 아들은 이 브리티아 제국을 자신 이상으로 번영의 길로 이끌 것이다. 그건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 남긴 씨앗으로 인해 일어날 비극이었다.
‘내가 조금 더 잘할 수는 없었을까.’
민체스터는 속으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린덴의 가슴을 찢어놨던 혈탑의 비극은 결국 자신의 원죄 때문이었다.
당시 그가 조금만 더 성숙하게 행동했더라면 그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지 않았을까? 그게 그는 일평생 후회스러웠다.
더구나 그때 죄악의 씨앗이 다시금 또 다른 비극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자신으로서는 말릴 방법이 없었다.
린덴, 저 아이는 일평생 품어온 원한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미하일, 그 아이도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둘 사이는 결국 파국으로 끝날 것이다.
무언가 방법이 없을까?
하루에도 몇 번을 고민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답이 없었다.
‘일방적으로 한쪽의 편을 들어주는 것은 가능하겠지.’
황태자 린덴의 편을 들어 귀족파를 모조리 쳐 낸다?
물론 그러면 정권 다툼을 막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또 다른 소중한 아들 미하일의 죽음과 귀족파의 몰락을 뜻한다.
또 귀족파는 황제인 자신에게 눈엣가시 같은 지긋지긋한 존재이긴 하지만, 사회의 암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그들도 나름의 역할이 있었다. 황제파 귀족들이 도시 귀족과 신흥 부르주아들을 대표하는 세력이라면, 귀족파 귀족들은 전통의 지방 봉건 지주들을 대표하는 세력인 것이다.
정치적 입장이 달라 끝없이 부닥치지만, 귀족파든 황제파든 모두 브리티아의 귀족이었다.
즉, 단순히 마음에 안 든다고 목을 칠 존재들은 아니었다.
‘하아, 괴롭군.’
속으로 한숨을 내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난 일어나 보겠네. 머리가 어지럽군.”
황태자를 비롯한 대신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밴트 경과 같이 돌아갈 테니 자네들은 굳이 마중할 필요 없네. 계속 사안을 논하게.”
그런데 그렇게 그가 손을 내젓는 순간이었다.
민체스터는 갑자기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
그가 갑자기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린덴이 놀라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바마마?! 갑자기? 괜찮으십니까?”
“괜…… 찮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민체스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온몸에서 힘이 빠지더니 풀썩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것이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여봐라!”
대신들도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의를 불러라! 빨리!”
마침 회의실 밖에는 의사가 대기 중이었다.
바로 제국 최고의 의사라는 레이디 클로랜스가!
최근 민체스터의 건강이 악화하며 어의인 그녀는 전임 어의인 밴 자작과 또 다른 명의인 피터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가급적 황제 곁에 머물러 있었다.
엘리제는 황제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살피기 위해 당장 급한 일을 제외한 많은 일을 미룬 상태였다.
“엘리제 자작님! 폐하께서!”
엘리제가 화급히 민체스터의 상태를 살피러 들어왔다.
민체스터는 린덴의 품 안에 쓰러져 있었다.
“전하! 갑자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갑자기 쓰러지셨다. 빨리 살펴다오, 엘리제.”
린덴은 아버지의 쓰러짐에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며 황제의 상태를 살폈다.
‘동공반사는 정상이야. 다른 반사들도 괜찮고. 맥박 횟수도 괜찮아. 다만 혈압만 낮으신데…….’
그녀는 활력 징후를 확인한 후, 눈동자를 살피고, 여러 신경 반사를 체크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꼼꼼히 살핀 후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혈압이 낮은 것 외에는 모두 정상이었다.
“다행히 특별한 문제로 쓰러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전하.”
엘리제는 대신들 앞이어서 황태자에게 공손한 존칭을 썼다.
“그러면? 어째서 쓰러진 것인가?”
린덴이 걱정 어린 눈으로 물었다.
“아마 기력이 약해진 것에 따른 저혈압이 일시적으로 온 것 같습니다.”
“병환 악화에 따른 것인가?”
“네, 전하.”
엘리제의 대답에 린덴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니 다행이었지만, 아버지의 병환이 더욱 악화하였다는 말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일단 십자 병원으로 옮겨 혹시 다른 문제는 없는지 추가적인 검사를 해봐야겠습니다. 보존적 치료를 받으시면 의식은 금방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래. 고맙다, 리제”
그렇게 황제 민체스터는 황실십자병원으로 이송되었다.
***
이런저런 검사를 하였지만, 다행히 특별히 다른 문제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의 추측대로 병환 악화에 따라 일시적으로 저혈압이 발생했던 것 같다.
“그래도 일단 며칠은 더 입원해서 경과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엘리제는 그렇게 말했다.
귀족들을 진료하지만 황실십자병원은 기본적으로 황족, 그리고 황제를 위한 병원이었다.
따라서 의사들의 동선에 가장 가까운 층 하나 전체가 황제를 위한 병실로 준비되어 있었다.
물론 황실십자병원 건립 50년 동안, 그 층이 사용된 것은 전대 황제가 사망할 때 이후로는 없었다. 그런데 이제 민체스터가 처음으로 그 병실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 파장은 굉장히 컸다.
한 시대를 풍미한 거인이 퇴장할 시기가 다가왔단 의미니까.
황위 계승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느낀 론도 정국은 소리 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모두 다음 대의 황제가 될 린덴과 그에 맞서고 있는 미하일만 바라봤다.
그들의 행보에 따라 앞으로 제국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 대의 황제가 될 린덴은 그때 장미 정원에서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
말없이.
무거운 눈으로. 한없이.
그렇게 얼마나 꽃을 보고 있었을 때였을까?
가벼운 인기척이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엘리제, 그가 사랑하는 그녀가 그를 보고 있었다.
“……린덴.”
“리제.”
린덴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처럼 다가가 으스러지도록 안아주고 싶었지만, 오늘은 왠지 기운이 나지 않았다.
“아바마마는 어떠신가?”
“괜찮아지셨어요. 이틀 정도 더 요양 후 퇴원하실 수 있으실 것 같아요.”
“다행이군. 역시 등불을 든 여인이야.”
그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는 왠지 그가 웃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아파 보였다.
“린덴…….”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바람이 불며 정원에 쌓인 낙엽을 쓸었다.
‘아파.’
엘리제의 가슴이 저려왔다.
그를 사랑해서일까?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그녀는 그의 감정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무뚝뚝한 금안은 지금 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아파하는 것을 보니 자신도 너무 아팠다.
린덴은 자신이 힘들어하는 것을 그녀에게 보이기 싫은지, 고개를 돌려 다시 정원을 바라봤다.
“난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 수고가 많았을 텐데, 가서 쉬도록. 내가 나중에 다시 찾아가마.”
“……린덴.”
그녀는 머뭇거렸다.
하지만 린덴의 말처럼 그를 놔두고 떠나지는 않았다.
그를 보는 게 저릿하게 아파서, 놔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히 뒤에서 그를 감싸 안았다.
“……!”
등 뒤에 와 닿는 부드러운 느낌에 린덴은 흠칫 놀랐다.
“……리제?”
“네.”
“난 정말 괜찮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녀는 그의 등에 대고 고개를 저었다.
하나도 안 괜찮은 것이 느껴졌다. 그가 아파하니 속상했다.
“알고 있겠지만…… 저……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
“그러니…… 당신이 아프면 저도 아파요. 힘…… 내세요.”
엘리제는 자신이 조금 더 유창한 위로를 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했다.
그저 가슴이 아파 힘내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진심이 담긴 탓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그녀의 말이기 때문일까. 그 짧은 위로는 백 마디 말보다 더 그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었다.
“…….”
린덴은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억지로 억누르려던 감정이 흔들렸다.
“……약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엘리제는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거 알아요? 저 늘 린덴과 하고 싶은 게 많아요.”
“뭐지?”
“같이 맛있는 디저트도 먹고 싶고, 산책도 하고 싶고, 공연도 보고 싶고, 지난번 납치 때처럼 같이 여행도 다니고 싶어요. 그런데 그것만큼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요?”
린덴은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힘들 때 서로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힘들 때, 린덴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고, 린덴이 힘들 때는 제가 옆에서 같이 있으면 좋겠어요.”
“…….”
“특별히 도움이 안 되더라도…… 그래도…… 그냥…….”
린덴은 잠시 말이 없었다.
엘리제는 주저하며 물었다.
“혹시…… 제가 옆에 있는 게…… 싫으세요?”
린덴은 고개를 젓고는 그녀의 품에서 살짝 벗어났다.
그리고 몸을 돌려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엘리제를 보더니, 꽈악. 그야말로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린…… 덴……?”
“……고맙다.”
“……!”
린덴은 낮게 숨을 내뱉었다.
“정말. 정말로…… 고마워.”
그 말을 듣고 엘리제는 가만히 손을 들어 그의 등을 마주 안아주었다. 힘내라는 듯이.
그런 그녀를 보며 린덴은 무뚝뚝한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나의 리제.
나의 목숨.
어찌 이렇게 모든 것이 사랑스러울까.
사실 마음이 정말 무거웠는데, 그녀의 말을 듣고 조금은 따뜻해졌다.
“우습지? 이제 황제가 되어야 할 내가 감정에 흔들리는 게.”
“아니, 절대 아니에요.”
“이미 알고는 있었어. 아바마마의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시고, 어쩌면 빠른 시일 안에 각오를 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
“하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흔들리는군. 아버지니까.”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되면 철혈의 마음을 지녀야 하는데 참 실격이야.”
그때,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저한테는 괜찮아요.”
“응?”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에게만큼은 괜찮아요. 그러니 힘들 땐 저에게 오세요. 그래 주시면…… 좋겠어요. 당신이 아플 때…… 곁에 있고 싶어요.”
그 말에 린덴은 엘리제의 눈을 바라봤다.
자신을 향한 진심이 가득한 푸른 눈빛.
마음이 흔들렸고, 그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육체적인 행복보다는 사랑을 나누는 입맞춤.
“전하…….”
아파하지 말라는 듯, 그녀가 더욱 그를 끌어안았다.
입맞춤을 끝내고 린덴은 애정이 담긴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정말 고맙다. 사실…… 요즘 아버지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았거든. 많이 위로가 됐어.”
신경 쓰이는 일.
그 말을 들은 엘리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린덴이 말하는 일이 무엇인지 짐작한 탓이다.
‘미하일과 귀족파를 칠 계획.’
린덴도, 미하일도 뒤에서 서로를 향해 비수를 다듬고 있었다.
‘둘 다 나에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지만.’
그 둘과 모두 가까운 그녀였다.
하지만 다른 마음은 모두 털어놓아도 그들은 형제의 싸움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녀와 상관없는, 각자의 싸움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다 알고 있는 걸…….’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돌아가는 상황만으로도 눈치챌 수 있었다.
뒤에서 둘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그래서 결과적으로 어떤 비극이 일어날지.
이미 경험했던 일이니까.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시엔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니라고 모른 척 외면했다. 하지만 이번엔? 지난번 같은 외면은 답이 아니지 않을까?
그때, 린덴이 그녀에게 말했다.
“사실 요즘 이상하게 이유도 없이 심적으로 힘들군. 별다른 이유도 없는데 말이야.”
“……린덴.”
“하지만 리제, 그대 덕분에 괜찮다. 너만 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제는 가슴이 울컥했다.
‘여린 사람.’
그래, 저 무뚝뚝한 얼굴과 다르게 그의 마음 아득히 깊은 곳은 여렸다.
분명 그는 유능한 황태자다. 황제가 되면 눈부신 통치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리고 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렸다. 아무도 모르고 있겠지만, 이제 그녀만큼은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저 여린 마음으로 어린 시절 얼마나 아팠을까.’
눈앞으로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을 목격한 그.
그때 그가 받았을 고통을 생각하니,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앞으로는 또 얼마나 아파할까.’
그가 최근에 이유도 없이 힘들어한 이유.
그건 본인이 세운 계획 때문일 것이다.
3황자도 나름의 비수를 준비하고 있지만, 그는 그걸 모두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은 동생을 포함한 모두를 죽음의 올가미에 빠뜨릴 계획을 세운 상태다.
‘아마 본인은 자신이 왜 심적으로 힘든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한숨이 나왔다.
이전 삶, 모든 복수가 끝나고 그가 허망한 고통에 빠진 것이 떠올랐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복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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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