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2 6-5 약혼식 =========================================================================
5장 약혼식 - 2
엘리제는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끼는 그녀와 아들의 약혼식에 참석한다는 것을 무슨 수로 말리겠는가?
‘괜찮으셔야 할 텐데.’
이런저런 걱정 때문일까, 최근 생긴 두통이 다시 띠잉 하고 아파져 와 그녀는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
귀족파의 귀족들도 그들의 약혼을 축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속마음은 쓰리기 그지없었지만 그래도 다른 이도 아닌 등불을 든 여인이었다.
“약혼식까지 올리면 황태자 전하의 지지율이 하늘을 찌르겠구려.”
“그러게 말입니다.”
그들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등불을 든 여인이 3황자 전하의 짝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그러면 내 일평생 소원이 없겠소.”
저 등불을 든 여인이 자신들의 편이면 얼마나 좋을까!
엘리제는 자각 못하고 있었지만 현재 제국에서 그녀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껏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시민들의 사랑과 존경. 그것은 곧 힘이고 정치력이었다.
물론 엘리제, 스스로는 그걸 기반으로 무언가를 누릴 생각이 전혀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등불을 든 여인이 행복했으면 좋겠구려.”
그 말에 귀족파의 인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제의 존재는 참 묘했다.
그녀 때문에 황태자의 지지율이 급등했고, 귀족파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워할 수도, 적대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행복하길.”
물론 그녀의 행복과 그들의 행복은 양립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순간, 귀족파의 인물들은 모든 정치적 사항을 잊고 약혼식을 올릴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그렇게 모두가 그녀를 축하하고 있을 때.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3황자 미하일이었다.
“리제.”
그는 씁쓸히 중얼거렸다.
물론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알고 있어도, 아픈 것은 아픈 거다.
“리제.”
다시 중얼거렸다. 아파서, 그리고 미련하게도 이 순간 그녀가 보고 싶어서.
그런데 그때, 끼잉 소리를 내며 강아지 한 마리가 그에게 다가왔다.
지난번 길거리에서 주운 그 녀석이었다. 이름은 장난삼아 지은 ‘리제’.
미하일은 살짝 따뜻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너라도 내 옆에 있구나.”
그는 강아지를 들어 품에 안았다. 끼잉 소리를 내며 강아지가 그의 얼굴을 핥았다.
미하일은 고개를 저었다.
“나 걱정해 주는 거야? 괜찮아. 괜찮아.”
주인이 속상해하는 것을 안 걸까, 강아지가 끼잉끼잉거렸다.
미하일은 잔잔히 웃었다.
“고마워.”
강아지가 설마 자신을 위로하려고 저런 애교를 부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아픈 이 순간 누군가 옆에 있어주는 것이 고마웠다.
***
가슴 아파하고 있는 것은 미하일뿐이 아니었다.
그레이엄.
그녀의 곁에서 가장 가슴앓이를 오랫동안 한 불쌍한 남자. 그가 주점에서 술로 아픈 속을 달래고 있었다.
“남작님, 그만 마시시죠.”
주점의 주인이 걱정되는 표정으로 그를 만류했다.
단골로 오는 집인지라, 서로 잘 아는 사이였지만, 항상 냉철한 저 의사가 저렇게나 취하도록 마시는 것은 처음 봤다.
“그냥…… 오늘은 더 마시고 싶군.”
그레이엄은 술에 취해 중얼거렸다.
‘리제…….’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약혼식을 올린다니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녀는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자신이 그녀 때문에 이렇게나 아파한다는 것을.
‘하아.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날이 올까.’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자신은 평생 그녀의 옆에서 괴로워하겠지. 속마음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고작 약혼식도 이렇게 아픈데. 결혼하면 얼마나 아플까.
‘미안합니다. 이렇게 속이 좁아서.’
그레이엄은 쓰린 표정을 지었다.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사랑이니 그녀의 행복을 축하해 줘야 할 텐데. 그게 잘 되지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축하해야 한다 생각하지만 가슴은 그저 아프기만 했다. 이 마음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하아.”
그레이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픈 가슴을 참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행복하길…… 내가 사랑하는 분이여.’
그렇게 며칠간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이윽고. 그녀와 그의 약혼식 날이 다가왔다.
***
대성당.
론도 황궁 인근에 위치한 대성당은 제국 최대 규모를 자랑했지만, 이 순간 그 넓은 규모가 무색하게 터질 듯이 붐비고 있었다.
거국적인 약혼식을 앞두고 수많은 귀족이 몰려온 탓이었다. 론도 전체, 아니, 제국 전체에서 웬만한 귀족들은 전부 모여든 것 같았다.
론도 대성당은 제국뿐 아니라 서대륙 전체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규모였지만, 너무 많은 인파가 몰린 탓에 안에 발을 들이지도 못하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 대성당 안, 대기실.
인형 같은 한 소녀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약혼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많이 떨리시죠, 아가씨?”
“……조금.”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하는 약혼식도 아니어서 별다른 감흥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막상 약혼식 날이 되니 굉장히 떨렸다. 긴장돼 밤도 설쳤다.
“나 오늘 이상하지 않니, 마리?”
어느덧 소녀가 된 어린 하녀 마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너무 예뻐요. 너무너무.”
“빈말은.”
“빈말 아니에요. 정말 요정…… 아니, 천사 같아요.”
마리는 엘리제를 바라봤다.
원래도 예쁜 그녀지만…… 오늘은 정말 미의 천사가 강림한 것 같았다.
인형 같은 얼굴, 곱게 단장한 피부, 찬란한 백금발.
그리고 천사의 날개처럼 아름다운 예식용 백색 드레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 눈이 부실 정도였다.
“참, 마리. 내가 챙겨온 가방에서 약을 좀 가져다주겠니?”
“아…… 아직 머리가 아프세요?”
“응, 좀처럼 가라앉지가 않네. 꽤 시간이 지났는데.”
마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아름답고 완벽한 아가씨의 유일한 단점은 약한 몸이었다.
툭하면 걸리는 감기는 기본이고, 최근에는 몹쓸 두통까지 생기셨다.
“너무 무리하셔서 그래요.”
“괜찮아. 약 먹으면 돼.”
두통이야, 뭐.
그녀는 그런 생각으로 약을 손바닥에 들고 물컵을 찾았다.
그런데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다 안 나은 건가?”
“아, 린덴.”
린덴이 걱정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준비는 다 하셨어요?”
“준비? 됐다. 대충하면 되지.”
그렇게 말하는 그는 예식용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멋졌다.
엘리제는 평소보다도 더욱 멋지게 느껴지는 그의 모습에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와 이마를 어루만졌다.
“살짝 미열도 있는 것 같군. 도대체 언제 낫는 거지?”
“금방 나을 거예요. 별것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엘리제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으나 그는 못마땅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황실십자병원의 의사들에게 한 소리 해야겠군.”
“네?”
“내 여자가 맨날 아프지 않나. 그렇게 의사가 많은데,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건지. 그대가 아픈 것은 모두 그 이들이 그대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다.”
빈말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그들에게 한 소리 할 기세라 엘리제는 그의 팔짱에 매달렸다.
“저 정말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는 자신에게 매달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네? 네?”
엘리제는 애교 부리듯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그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읍, 린덴! 지금은……!”
엘리제는 피하려 했으나 그는 놔주지 않았다.
머릿결을 잡고 혀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아찔한 느낌.
자신의 안을 헤집는 그의 느낌에 그녀의 다리가 풀렸다.
그래도 공들여 화장한 것을 아는지, 거친 키스가 들어오지는 않았다. 부드럽게. 혀만 움직였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이 그녀의 정신을 더욱 아득하게 했다.
“그, 그만…… 제발.”
엘리제는 그의 팔에 매달려 부탁했다.
린덴은 살짝 입을 떼고, 그녀의 귓가에 말했다. 짓궂게.
“싫은데?”
엘리제는 울상을 지었다.
“화, 화장 망가진단 말이에요. 힘들게 했는데…….”
그 말에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마음만 같아선 저 예쁜 눈동자에 눈물이 맺힐 때까지 입맞춤을 나누고 싶었지만, 오늘은 약혼식 날이니 이 정도로 참아야 할 것 같았다.
‘앞으로도 시간은 많으니.’
이제 그녀는 자신의 것이 될 테다.
그런 생각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하지만 곧 든 생각에 인상을 구겼다.
‘약혼이 아니라 바로 결혼을 해야 했는데.’
그게 이 순간 그의 천추의 한이었다.
오늘 예식이 약혼이 아니라 결혼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첫날밤도…….
‘궁내부장을 갈아치우는 한이 있더라도 밀어붙였어야 했는데.’
그때, 엘리제가 드레스를 가다듬고 물었다.
“저 이상하지는 않죠?”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예뻐. 너무.”
그러며 조심히 드레스와 화장이 망가지지 않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들어온 그녀에게 속삭였다.
“지금 바로 결혼하고 싶을 만큼 예뻐.”
엘리제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가 곧 그의 숨겨진 말뜻을 알아듣고 사과처럼 얼굴을 붉혔다.
“도, 도대체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거예요?!”
하지만 린덴은 시치미 떼며 오히려 반문했다.
“무슨 이상한 생각? 난 그냥 결혼하고 싶다고 했을 뿐인데?”
“…….”
엘리제는 의심의 눈빛으로 그를 흘겨봤다.
“그거 아세요?”
“뭐?”
“린덴, 조금씩 능글맞아지는 것 같아요.”
그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런가? 그럴지도.
“그대가 너무 귀여워서 그렇지.”
그러며 그는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엘리제의 얼굴이 시뻘게지며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아, 좀! 다른 사람들이 본단 말이에요.”
“보면 어때? 어차피 하나가 될 사이인데. 사이가 가까우면 좋은 일이지.”
“그래도……!”
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늘 그렇듯 그는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입을 맞추려는데…….
옆에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둘의 모습을 보고 있던 마리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가씨…….”
“응, 왜?”
“저…… 손님이…… 폐하가…….”
“……!”
엘리제가 깜짝 놀라 그의 품에서 떨어졌다.
정말로 황제 민체스터가 와 있었다!
기력이 약해져 로열 가드의 수장 길버트 백작이 끄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는 아들과 예비 며느리의 다정한 모습에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지었다.
엘리제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예를 표했다.
“폐,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크흠. 둘이 사이가 좋군.”
엘리제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아, 린덴. 정말 미웠다. 정말로!
“그냥 한번 식전에 우리 며늘아기 얼굴이나 보고 싶어서 왔네.”
민체스터는 웃으며 ‘며늘아기’라고 그녀를 칭했다.
대제국의 황제가 황태자비에게 쓰기에는 지나치게 친근한 단어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저 단어는 이전 삶, 약혼 후 민체스터가 그녀를 부르던 호칭이었다. 당시 그는 당뇨 합병증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그렇게 그녀를 부르며 예뻐해 주었다.
린덴과의 결혼 문제로 그녀의 속을 많이 상하게 하긴 했지만 과거든 지금이든 그는 한결같이 자신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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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