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3 6-5 약혼식 =========================================================================
5장 약혼식 - 3
‘이번 삶은 언제일까.’
그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당뇨는 그녀의 지식으로 큰 문제 없이 조절하고 있지만 하늘의 뜻일까. 그의 건강은 알 수 없는 병으로 악화일로였다.
‘지금까지 봐온 병의 성격상 갑자기 빠른 시간 안에 돌아가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몰랐다.
언제, 어느 순간 어떤 일이 생길지.
걱정된 그녀는 이것저것을 물었다.
“폐하, 어제 수면은 편히 취하셨습니까?”
“그래, 영애가 준 약을 먹고 잘 잤네.”
“어지럽거나 기력이 빠지거나 하는 증상은 없습니까? 팔다리에 저린 느낌이 들거나…… 혹시 불편하신데 무리해서 나오신 것은 아니신지…….”
여러 질문에 민체스터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런 날까지 환자 걱정인가, 영애? 오늘의 주인공은 영애네. 그러니 오늘만큼은 다른 걱정하지 말고 영애와 린덴에게만 신경 써.”
“……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걱정을 거두진 못했다.
“폐하, 만약 조금이라도 몸이 좋지 않으시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식 중이라도 제가 달려가겠습니다.”
“허허.”
황제는 아들을 돌아보았다.
못 말리는 며느리라고. 고생 좀 하겠다고.
린덴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고생입니다, 아버지. 라는 의미로.
“어쨌든 난 먼저 가보겠네. 곧 식장에서 보게, 영애.”
민체스터는 그녀와 그의 약혼이 그렇게 기쁜지 만면에 웃음을 거두지 못하고 휠체어에 의지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떠나는 그에게 예를 표한 엘리제는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정말 괜찮으신 걸까.’
왠지 오늘따라 민체스터의 안색이 더 하얘 보였다.
표정은 한없이 밝지만 말이다. 기쁜 날이라고 몸이 안 좋은데 무리하는 것은 아닌지.
곧 다른 사람들도 그녀에게 인사하러 왔다. 식이 시작되기 전 얼굴을 보러 온 것이다.
“리제, 축하해!”
3황자 미하일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밝은 얼굴로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지난밤 아픔은 갈무리한 걸까?
꽃처럼 화사한 얼굴에 축하의 미소가 떠 있었다.
“고마워요, 밀.”
미하일은 너무 예쁘다느니, 형님은 도둑놈이라느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무뚝뚝한 얼굴의 린덴을 돌아보았다.
날카로운 정국 속, 칼을 겨누고 있는 두 형제의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친근하게 이야기를 할 사이는 아닌지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뭐라 서로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덕담을 나누기도 어색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린덴이었다.
“……와줘서 고맙다, 미하일.”
미하일은 미소를 지었다.
“축하해.”
짧은 답.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고, 미하일은 돌아갔다.
그리고 여러 손님이 찾아왔다.
그레이엄 남작.
유리엔 공녀.
또 같이 일하는 황실십자병원의 동료 의사들. 크림반도에서 인연이 있었던 의료진들. 이제 곧 의사가 되어 황실 십자 병원에 수련을 받으러 올 예정인 레이디 제이.
그리고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이들.
수없는 이들이 찾아왔다.
장기간 입원하다 얼마 전 퇴원한 메르키트 백작도 따로 찾아왔다. 아직 걷기가 쉽지는 않은지 지팡이를 짚은 채.
그렇게 많은 이의 축복을 받은 후, 드디어 식이 시작되었다.
“황태자 전하와 레이디 클로랜스께서 입장합니다!”
“와아!”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레이디 클로랜스!”
“퍼스트 레이디!”
“등불을 든 여인!”
린덴을 향한 외침도 있었다. 주로 그의 낭만적 구출에 반한 귀족 영애들이었다.
“꺄악! 황태자 전하! 로맨티스트!”
“…….”
어쩌다 무뚝뚝 린덴의 별명이 로맨티스트가 되었는지, 요지경인 일이었지만 나름 린덴은 그 별명을 싫어하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그들이 대성당의 단상에 올라가자, 함성이 뚝 멈췄다.
이제 예식이 시작하는 것이다.
“먼저 주님 앞에 감사드리며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린덴과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브리티아 제국 황실의 약혼식은 전통적으로 종교 예식이었다. 그래서 약혼식 장소가 대성당인 것이다.
목회자의 인도로 약혼식이 진행되었다.
“그러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하겠습니다.”
전통 종교 예식인 탓에 약혼식은 길고 길었다.
묵념, 기도, 찬트, 설교, 축도, 다시 기도, 언약 등등.
모든 절차를 합하면 가히 4시간에 가까운 행사였다.
한창 설교를 들으며 린덴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뭐가 이렇게 긴 거야.’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이런 행사들은 쓸데없는 허례허식이 많았다.
‘결혼식도 아니고 고작 약혼식인데.’
그냥 ‘앞으로 결혼식 때까지 잘 지내다, 잘 결혼하십시오!’라고만 이야기하면 되지. 무슨 쓸데없는 과정이 이렇게 많은지.
그렇다고 자신들을 축복하는 내용들도 아니다.
그냥 전부 다 허례허식들. 마음에 안 들었다.
지루하기도 지루했지만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이유는 단 하나.
‘엘리제가 힘들잖아.’
그는 옆에 서 있는 엘리제를 바라봤다.
‘저렇게 약한데 어떻게 계속 서 있으라고.’
다른 하객들이야 앉았다, 일어났다 무리할 것이 없었지만 엘리제는 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상 앞에서 계속 서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약한 그녀가 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린덴은 속으로 열불이 뻗쳤다.
‘황위에 오르면 다 없애 버린다. 이런 과정들. 전통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그때, 엘리제가 그를 돌아봤다.
걱정 어린 그의 눈빛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자기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린덴은 한숨을 삼켰다. 한시라도 빨리 끝났으면.
그는 결혼식만큼은 허례허식 없이 그녀가 편할 수 있는 예식을 진행하리라 결심했다.
“…….”
한편 그때 엘리제는 황제 민체스터를 걱정하고 있었다.
‘정말 괜찮으실까.’
오랜 시간 서 있어야 하는 자신도 힘들지만, 긴 예식으로 민체스터의 몸에 무리가 갈까 걱정이었다.
편한 의자에 앉아 있긴 하시지만 이런 긴 예식은 쇠약한 몸에 무리일 텐데…….
‘더 강하게 만류를 했어야 했는데.’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시간이 흘렀다.
길고 긴 여러 과정이 지나고, 약속의 입맞춤도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절차가 다가왔다.
“황제 폐하께서 납십니다.”
단상 뒤의 상석에서 앉아 있던 민체스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길버트 백작의 부축을 받으며 단상으로 걸어왔다.
마지막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감사의 축배.’
엘리제는 감사의 축배 절차를 떠올렸다.
로마노프 황실은 약혼식과 결혼식 마지막 순서로 아들이 아버지에게 지금껏 내려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에 축배를 올리는 절차를 진행한다.
아버지가 아들이 준비해 온 축배를 마신 후, 축복의 말을 함으로써 예식이 끝나는 것이다.
“…….”
린덴과 엘리제는 민체스터가 단상으로 올라오는 것을 기다렸다.
기력이 쇠한 상태로 오랜 시간 앉아 있어서일까? 민체스터의 다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축하한다, 린덴. 그리고 엘리제.”
단상에 오른 그가 다시 축하의 말을 건네었다.
엘리제와 린덴은 고개를 숙였다.
“그래, 린덴. 네가 주는 축배를 마셔 보자구나.”
“네, 아바마마.”
옆에서 황실 시종이 비단에 싼 황금 술병을 가져왔다.
린덴이 직접 준비한 예식주이다.
술병은 자그마했다. 딱 한 잔 정도의 크기였다.
“한 잔 올리겠습니다, 아바마마.”
“그래.”
민체스터는 기쁜 얼굴로 잔을 받았다.
아버지의 건강을 생각해 약간의 술만 따르는 그에게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기쁜 날이니 더 주거라. 그리고 축배를 많이 마셔야 너희도 축복받을 것 아니냐.”
“……네, 아바마마.”
어쩔 수 없이 린덴은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예식용의 작은 술병이라 한 잔 가득 따르니 술이 바닥났다.
은은한 황금빛이 도는 술이 스테인드글라스 빛을 반사했다.
워낙 마음이 기뻐설까? 민체스터는 아들이 올린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꿀꺽.
그리고 잔을 내려놓은 그가 미소 지으며 축복의 말을 꺼냈다.
“오늘은 참 기쁜 날이구나. 내가 얼마나 이날이 오기를 바랐는지 너희는 모를 것이다.”
“감사합니다.”
“너희 모두…….”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민체스터가 말을 멈췄다.
“……?”
고개를 숙이고 축복의 말을 기다리던 엘리제와 린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그리고…….
“커억!”
“……?!”
민체스터가 가슴을 움켜쥐더니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쿨럭, 커억!”
그리고 쏟아내는 한줄기 선혈!
“폐하?!”
엘리제가 깜짝 놀라 황제에게 다가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쿨럭. 가, 가슴이…….”
가슴을 움켜쥔 민체스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눈이 하얗게 뒤집히더니, 그대로 옥체가 무너져 내렸다.
“……!”
“폐하!”
대성당이 경악에 빠졌다.
모두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봐라! 의사를! 빨리 의사를 불러라!”
엘리제를 대신해 대기하고 있던 밴 자작과 황실십자병원의 의사들이 화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하기 전, 바로 옆에 있던 의사, 엘리제가 쓰러진 황제를 살폈다.
“폐하! 정신 차리십시오! 폐하!”
손가락으로 목의 경동맥을 짚은 엘리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맥이 없었다.
단순 실신이 아니라 심장마비가 온 것이다!
‘어째서……? 어떻게……?’
그녀의 머리가 백지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아무리 그녀라도 황제의 갑작스러운 심장마비에 냉철함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얗게 변한 머리와 다르게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황제를 살리기 위해!
파악!
곧바로 인공호흡을 한 엘리제는 하나로 겹친 손바닥으로 황제의 전흉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심장마비를 회복시키기 위한 심폐 소생술(CPR)이었다.
“밴 자작님! 인공호흡을 도와주세요!”
엘리제를 다른 의사들에게 도움을 청하며 온몸으로 가슴 압박을 하였다. 곱게 차려입은 백색 드레스가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피터 교수님, 폐하의 몸에 바로 강심제를 투여해 주세요! 2분 간격으로 제가 말할 때마다요!”
“알겠습니다!”
혼비백산해 달려온 의사들이 그녀의 지시를 따랐다.
엘리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도대체 어째서? 왜 이렇게 갑자기?’
걱정은 하긴 했다.
혹시나 몸에 무리가 가지는 않을지.
하지만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라니!
‘병환이 안 좋긴 하셨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를 일으킬 병은 아니었어! 도대체 왜?’
물론 민체스터가 앓고 있던 병이 무엇인지는 정확히는 모른다. 그저 모종의 만성병이라고 짐작하고 있었을 뿐.
하지만 지금까지 쌓은 임상 경험으로 추정할 때 이런 급작스러운 심장마비를 일으킬 병은 아니었다. 그것도 객혈과 흉통을 동반하면서.
‘술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황태자 린덴은 생각지도 못한 아버지의 쓰러짐에 뻣뻣이 굳어 있었다.
“아바마마…….?”
그 모습을 보고 엘리제는 필사적으로 가슴을 압박했다.
‘원인이 무엇이든 살려야 해! 무조건 살려야 해!’
원인은 지금 당장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무조건 살려야 한다. 이렇게 민체스터가 사망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마비된 심장의 기능이 돌아올 때까지 인위적으로 피를 순환시키기 위해 허리를 숙여 전신의 힘을 이용해 가슴을 압박했다.
압박이 이어지며 허리와 팔이 끊어질 듯 아팠고, 그녀의 이마에서 괴로운 땀이 끝없이 흘러내렸지만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제발! 제발……! 폐하!’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심장의 기능을 억지로 올리는 강심제가 몇 차례 들어가고, 그녀의 백색 드레스가 완전히 흐트러질 때쯤이었다.
<주말은 쉽니다.>
============================ 작품 후기 ============================
주말은 쉽니다.
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