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0 6-7 파국 =========================================================================
7장 파국 - 1
“……!”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물었다.
“이 내용은…… 황태자 전하가 발의하신 건가요?”
혐의를 벗은 황태자 린덴은 의식을 잃은 민체스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사실상 황제와 같은 권위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귀족파는 그 대리청정에 반발했지만 반대할 어떤 명분도 없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떤 대신도, 귀족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크게 찬성했습니다. 아마 론도의 시민들도 자작님을 승작시키는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부담되지만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이런 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닌데.’
그렇게 그녀는 일개 귀족가의 영애에서 16살에 기사(Dame) 서임. 17살에 제국군 대령, 의무사령관 재직, 18살에 자작 위 수여, 그리고 같은 해에 백작 승작을 하는 유례없는 기록을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
뭐, 사실 황후가 될 그녀이기에 이런 작위는 실제적 의미는 없긴 하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명예였다.
제국 역사상 여성이, 그것도 이렇게 어린 나이에, 남편의 작위를 물려받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공으로 백작이 된 것은 처음이니까. 서대륙 전체를 둘러봐도 없던 일이다.
그리고 린덴이 준비한 진짜 상은 고작 명예뿐인 승작이 아니었다.
“……전하?”
그녀는 작위 수여식 날 자신에게 주어진 또 다른 상에 깜짝 놀라 물었다.
“이건……?”
린덴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상을 줄 거라고. 받아.”
“하, 하지만…… 이건 너무 과합니다. 부디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녀는 무릎을 꿇으며 사양했다.
정말 너무 과했다.
그가 아니, 황실에서 그녀에게 내린 것은 무려 ‘황실 십자가’였으니까!
황실 십자가(Royal cross)!
머나먼 옛날부터 내려온 황실의 보물로 다이아몬드로 수놓아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조각된 목걸이였다.
신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었다는 성서의 교리처럼 황실 십자가의 소유자에게는 한 가지 권한이 부여된다.
바로 무소불위의 면책권!
한 대에 한하여 이 보물의 소유자는 그 어떤 죄를 지어도, 황제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권한.
황실에 어마어마한 은혜를 끼친 자에게만 수여되는 보물로 브리티아 제국의 역사를 통틀어도 이 십자가가 수여된 적은 10번이 되지 않는다.
“감히 받기 어렵습니다.”
엘리제는 곤란한 얼굴로 거절했다.
너무 과했다. 그리고 자신이 저걸 받아 어디에 쓰겠는가?
하지만 린덴은 완강했다.
“황제 폐하의 권한을 대신하여 내리는 상이다. 거절은 허락지 않는다.”
“…….”
그래도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작위 수여식에 온 다른 사람들이 못 듣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라. 혹시 모르지 않느냐? 나중에 부부 싸움하고 써먹을 일이 생길지.”
“……!”
엘리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부부 싸움으로 이 면책권을 쓰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하아.’
결국, 문무대신들이 자신만 보고 있어 엘리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을 받았다.
짝짝짝!
수많은 사람이 그녀의 작위 수여를 축하해 주었다.
그렇게 그녀는 엘리제 백작이 되었다. 한 번에 한하여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받을 수 있는 면책권도 얻었다.
지극히 영광된 작위 수여식이었다.
***
그녀의 작위 수여가 끝난 후, 황태자 린덴은 사자궁으로 돌아왔다.
시종 란돌과 비서관인 크리스가 그를 맞았다.
“차를 내올까요?”
“그래, 엘리제가 알려준 레시피대로.”
엘리제는 그를 위해 사자궁의 시종장 란돌에게 이런저런 레시피를 알려주었다.
덕분에 그는 이전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차 맛을 내게 되었다.
곧 란돌이 차를 내왔고, 린덴과 크리스는 테이블에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지금까지 수고하셨습니다, 전하.”
크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수고. 그가 백원의 궁에 감금돼 고초를 겪었던 것을 말한다.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뭘, 그런 걸 수고라고. 부황께서 좋아지셔서 천만다행이지.”
그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크리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다행입니다.”
그러고 둘은 잠시 말없이 차를 마셨다.
약간은 긴장된 침묵.
이윽고 크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제 시작하실 것입니까?”
린덴이 그를 바라봤다.
크리스는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눈가는 지극히 차가웠다.
“…….”
린덴은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한참이나 론도의 풍경을 바라봤다.
크리스는 가만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이번 전하의 감금이 도움이 될 듯합니다.”
“그런가?”
“네, 이번 사건 때 귀족파에서 여러 여론을 이용해 전하를 음해하려고 한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그 사실을 터뜨리면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 3황자의 지지율을 폭락시킬 수 있을 듯합니다.”
민체스터는 모든 이의 존경을 받는 황제이다.
그런데 그런 황제의 위급을 이용해 형제를 음해하려고 하다니. 친근한 3황제의 이미지는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다.
“그렇군.”
“네, 그렇게 일단 시민들이 등을 돌리게 한 후, 손가락부터 하나하나 쳐 내면 될 듯합니다. 손가락부터, 손등, 손목, 팔꿈치, 어깨까지.”
“……그래.”
“나름 3황자도 대응하겠지만, 그게 우리가 노리는 것이니까요. 결국, 그들은 이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건 그들의 죽음을 뜻한다.
“그래, 이제 시작해야겠군. 자네가 수고가 많군.”
크리스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우군인 클로랜스 가의 직계로 황태자가 꾸민 암계에 수족 역할을 했다.
“이후 자네의 공을 절대 잊지 않겠네.”
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전하의 신하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그런데 외람되오나, 한 가지 질문만 해도 괜찮겠습니까?”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게.”
“혹시…… 정말 혹시나 여쭈옵니다. 그들을 치는 게 꺼려지십니까?”
“……!”
그 물음에 린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지? 자넨 내가 그들에게 무슨 원한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 그런 질문이라니?”
눈에 띄게 불쾌해하는 황태자의 물음에 크리스는 크게 고개를 숙였다.
“실례되는 질문 정말 죄송합니다. 그저 얼굴이 좋지 아니하여 외람된 질문인 줄 아나 여쭈어 보았습니다.”
“얼굴이 좋지 않은 것은 피로해서 그렇다. 그러니 다시는 그런 질문은 하지도 말도록. 아무리 그대가 엘리제의 오라버니라도 받아줄 수 없는 것이 있어.”
“……네, 정말 죄송합니다.”
크리스는 깊이 사과했다.
린덴은 굳은 얼굴로 명했다.
“알겠으면 곧바로 가서 시작하게. 모든 준비가 무르익었으니, 지체할 필요는 없겠지.”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로열 가드의 길버트 백작은 부황이 아닌, 내 호위를 서도록 하고.”
오로지 황제만 따르는 로열 가드의 수장 길버트 백작.
대리청정을 시작한 그가 사실상 제국의 황제나 다름없게 되었다지만, 길버트 백작을 호위로 쓰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부황이 엄연히 살아 있고, 아직 정식으로 황위를 계승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길버트 백작 먼저 반발할 것이다. 그가 현재 충성을 바치는 대상은 민체스터지, 린덴이 아니기에.
평소 사려 깊은 황태자 린덴답지 않은 명령.
하지만 크리스는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저 길버트 백작이야말로, 황태자 린덴이 꾸민 암계에 방점을 찍을 존재였으니까.
“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크리스가 나가자 린덴은 인상을 구겼다.
“꺼려지느냐고? 이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평생을 바라온 염원이다.
오로지 이 복수 하나만을 원하며 살아왔다.
지금도 밤마다 나타나는 피에 젖은 어머니와 누이. 그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했다.
복수를 끝내면 피에 젖어 눈물 흘리는 그들도 더는 자신의 꿈에 나타나지 않으리라.
‘어머니, 누이.’
그는 매일 반복하는 꿈을 떠올렸다.
비참하게 피에 젖어 있는 그들은 항상 자신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안타까운 얼굴로.
하지만 자신은 늘 듣지 못했다.
그들은 뭐라고 자신에게 말하려는 걸까. 매일 밤마다. 반복하며.
‘이 복수를 끝내면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일이 끝나 그들의 한이 풀리면 그들도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 마지막 순간에 본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해주지 않을까.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
***
다음 날 론도 시내에 묘한 소문이 돌았다.
황제의 위급 당시, 신문사의 기자들이 모종의 사주를 받고 일부러 황태자에게 불리한 편향된 기사를 썼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문은 사실로 드러났다.
황태자의 명을 받은 크리스가 모아둔 증거를 터뜨렸던 것이다.
[신문사의 기자들, 검제 3황자의 사주를 받아 편향된 기사를 작성해!]
[황제 폐하의 병환 시 3황자, 황태자를 음해해!]
심지어 그뿐이 아니었다.
당시 시위를 일으켰던 선동자들 대부분이 귀족파, 3황자의 사주를 받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 이야기를 들은 론도 시민들은 술렁거렸다.
“이게 정말이야? 3황자 전하가 그러셨다고?”
“믿을 수 없는데…….”
3황자 미하일은 시민들에게 굉장히 친근한 이미지였다.
높은 신분임에도 한치의 거리낌 없이 자신들과 술잔을 나누는 가깝고 친근한 황자. 그게 그에 대한 시민들의 생각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음흉한 흉계를 꾸미다니! 그것도 존경받는 황제가 위중한 틈을 타서.
시민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지만, 증거가 너무도 확고했다.
크리스가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당시 귀족파의 사주를 받았던 기자들이 속속 자백을 했던 것이다.
그것도 3황자에게 불리하게.
‘3황자 검제 전하의 부탁을 받고 일부러 편향된 기사를 썼다.’
‘원하지 않았는데, 강요받았다.’
선동꾼들도 경찰에 체포돼 자백했다.
‘모두 3황자 전하의 명을 받고 한 일입니다. 살려주십시오.’
‘차일드 가문과 3황자 전하께서 명하셨습니다. 최대한 황태자 전하에 안 좋은 쪽으로 시위를 몰아가 달라고.’
그 내용을 전해 듣고 시민들은 혀를 찼다.
“허, 세상에 정말 믿을 사람 하나 없구먼.”
“그렇게 착해 보이던 3황자 전하께서 뒤에서 이런 음해 공작을 하시다니.”
“그러게 말이야.”
3황자에 대한 시민들의 시선이 급속도로 싸늘해졌다.
3황자는 원래부터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인보다는,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인기인에 가까웠다. 그 시민들의 사랑과 지지가 그의 정치력의 가장 큰 밑천이었고.
하지만 아버지의 병환을 틈타 형을 음해하려고 했단 사실이 대대적으로 퍼지자, 그의 지지율은 곤두박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파가 가라앉기 전이었다.
황태자 린덴은 3황자에게 두 번째 공격을 벌였다.
다음 수는 그의 손발을 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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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