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1 6-7 파국 =========================================================================
7장 파국 - 2
“랑함 자작님, 치안총감 하슬입니다. 지금 당장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 하겠습니다.”
“무슨?!”
가족들과 식사를 하던 귀족파의 일원, 남부의 대지주 랑함 자작은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 놀라 소리쳤다.
치안총감 하슬은 딱딱한 얼굴로 죄목을 읊었다.
“세금 탈세 죄, 뇌물수수죄, 농작물 거래법 위반죄로 귀하를 체포하겠습니다.”
“……!”
“지금 이 시각 부로 귀하의 신병을 구속하겠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이거 놓지 못할까?!”
랑함 자작은 강하게 반발했으나, 치안총감은 법원에서 발급한 구속영장을 내밀었다.
“변론은 법정에서 하십시오.”
“놔라! 이건 모함이야!”
그렇게 귀족파 랑함 자작은 경찰들에게 끌려갔다.
그리고 이런 광경이 론도 여기저기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황태자와 치안부가 공조해 확보한 증거들을 한 번에 터뜨린 것이다. 특히 이번 일은 황태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함으로써 사법권을 손에 넣게 된 점이 큰 힘으로 작용했다.
연이은 악재에 귀족파는 순식간에 공황에 빠졌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우리를 어떻게 보고!”
구속의 칼바람을 피해간 귀족파들이 차일드 가문의 저택에 모여 분노를 토했다.
“물론 우리가 일부 불법적인 일을 저지른 점도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관례적인 일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들 황태자파는 어디 깨끗하답니까? 오히려 상법이나 거래법 위반 등은 저들이 더 심합니다!”
그들이 법을 어긴 것은 분명한 잘못이긴 했다.
하지만 세상사 어디나 그렇듯,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이들이 어디 있겠는가? 특히 그들처럼 고위직에 있는 이들이.
그들이 대단한 부패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하던 대로 관례적인 정도를 저질렀을 뿐이다.
“물론 관례적으로 했다 하더라도, 법을 어긴 것은 분명한 잘못이나 너무 과하군요. 벌금형으로 끝날 수 있는 정도도 일부러 구속하여 감옥으로 끌고 가다니. 이건 대리청정을 시작한 황태자의 탄압입니다.”
그래, 이건 탄압이었다. 그것도 노골적인.
“어떻게 합니까?”
모든 인원이 상석에 앉아 있는 3황자와 암셀 후작, 메르키트 백작을 바라봤다.
3황자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를 보며 암셀 후작이 가만히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하와 제가 긴밀히 논의를 해보겠습니다. 일단 돌아가서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각하.”
귀족파의 인원들은 불안한 눈으로 차일드 가문의 저택을 나섰다.
메르키트 백작, 그리고 차일드 가문의 차기 당주, 유리엔까지 4명만 남게 되자, 암셀 후작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이 생각보다 더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전하.”
“구속 사태 말고도 무슨 일이 더 있습니까?”
“네, 얼마 전 재정부에서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그 말에 미하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재정부?
“황태자가 재정부를 통해 은행을 설립한다더군요.”
“은행 말입니까?”
“네,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은행 말입니다.”
미하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은행이라니? 획기적 발상이긴 하나, 지금 상황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가 알기에 브리티아 제국의 재정은 은행을 운영할 만큼 넉넉지 않다. 나라가 부유했지만, 워낙 국가의 규모가 커 돈 나갈 일이 많으니 적자를 면하기도 어려웠으니까.
그리고 그 재정 부족은 로마노프 황실이 차일드 가문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수가 틀린 차일드 가문이 한꺼번에 돈을 회수하면 나라가 마비될 수도 있으니까.
“그 은행의 주 역할은 우리 차일드 가문의 은행들처럼 예금이나 대출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바로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종이로 만든 돈, ‘지폐’를 만드는 것입니다.”
미하일은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종이로 만든 돈이요?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금이나 은이 섞이지 않은 돈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화폐로 인정받지 못하는데?”
미하일이 말한 것은 금화본위제도.
현시대 전 세계의 기축 통화는 금화나 은화다.
제국의 펀드화도, 공화국의 돈도, 동방 청에서 유통되는 동전도, 모두 모양만 다를 뿐 금이나 은을 기반으로 한다.
금이나 은이 섞여 있지 않으면 통화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렇기에 제국이든, 어떤 나라든 마음대로 돈을 찍어낼 수 없는 것이다. 금의 생산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이것이 바로 차일드 가문이 서대륙을 호령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금화와 은화의 흐름을 독점하고 있었으니까.
“종이로 돈을 만들어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 텐데요. 왜 형님이 그런 허튼 수고를?”
하지만 암셀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이건 화폐의 혁명입니다.”
“네?”
“종이로 만든 돈은 로마노프 황실과 브리티아 제국의 직인이 찍힌다고 합니다. 언제, 어떤 상황이든 지급 능력을 보증할 수 있도록.”
“……!”
미하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그 말은……?”
“네, 다른 나라도 아닌, 전 세계 최강국인 제국의 보증입니다. 금, 은을 넘는 보증 효력을 가지고 있지요. 이 종이로 만든 화폐는 금화와 은화와 더불어 순식간에 새로운 기축 통화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어쩌면 후에는 금화와 은화의 자리를 대체할 수도 있습니다.”
“……!”
그 말의 뜻은 자명했다.
여태껏 서대륙 돈의 흐름을 장악했던 차일드 가문의 금권이 상당수 약화된다는 것이다.
차일드 가문의 은행들이 장악하고 있던 금화와 은화 말고도 새로운 기축 통화를 사용하면 되니까.
“그렇게 우리 가문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면…… 황태자의 다음 행보는 하나일 것입니다.”
“…….”
“기회를 봐서 모조리 치겠지요. 우리 모두를.”
정확한 말이었다.
지금껏 민체스터가 이를 갈면서도 차일드 가문에 손을 못 댄 이유는 바로 그 어마어마한 금력 때문.
유사시에 차일드 가문이 돈의 흐름을 막아버리기라도 하면 대혼란을 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태자가 고안한 새로운 화폐가 있으면 금화의 흐름이 막히더라도 그런 혼란을 상당 부분 상쇄할 수 있다.
더구나 황태자는 평생 원한을 갈고닦은 인물이다. 방패가 사라진 그들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입니다.”
“…….”
“정변을 일으켜 우리가 먼저 그를 쳐야 합니다.”
장내에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감돌았다.
정변.
반역을 뜻한다.
차마 입에 담기에도 무서운 단어.
하지만 더 이상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모든 면에서 밀리고 있었다.
지지율도, 여론도, 정통성도, 세력도.
이대로면 황태자는 곧 황제가 될 것이다.
황제가 된 그는 그들에게 죽음의 철퇴를 내릴 것이다.
그러니 죽임당하기 전에, 먼저 황태자를 죽여야 한다.
“꺼려지십니까?”
“…….”
그 물음에 미하일은 입술을 깨물었다.
꺼려지느냐고? 당연히. 형제를 치는 일이다. 꺼려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님을 쳐야 한다고? 이 내가?’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피가 통하지 않아 주먹이 하얗게 변했다.
“다행히 승산은 충분합니다. 저희에게는 전하와 검기사단이 있으니까요.”
서대륙 최강검 검제!
전원이 오러나이츠로 이루어진 검기사단!
전 대륙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는 최고의 전투 전문가들.
“물론 아무리 검기사단이라도 대규모 병력과 싸우는 것은 무리지만,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황태자의 목. 대규모 군대와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기회를 틈타, 전하와 검기사단이 한 번에 몰아쳐 황태자를 죽이기만 하면 정변은 성공입니다.”
“…….”
암셀 후작의 말에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
다른 것은 필요 없다. 오로지 황태자만 죽이면 된다.
그러면 모든 명분과 세력을 떠나 3황자의 승리였다. 그리고 황태자를 죽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3황자, 검제가 있으니까.
아무리 공제라 불리는 황태자라도, 3황자의 무력에 비하면 한 수 아래였다.
“천만다행으로, 저희를 돕는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로열 가드인 길버트 백작이 저희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
모두가 놀라 암셀을 바라봤다.
길버트 백작이면, 미하일을 제외하고 제국 최고의 검사이자, 로열 가드의 수장이었다. 현 황태자를 호위하는 자이기도 하고.
그만 돕는다면 황태자의 목을 베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 될 것이다.
“그가 어째서?”
“그의 부인이 차일드 가문의 먼 친척입니다. 가문 자체가 우리 귀족파와 인연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가문이지요. 그리고 그런 것보다는 최근 황태자의 경호를 서며 많은 마찰을 빚고 있다고 합니다.”
“마찰이요?”
“네, 사실 아직 황위를 물려받지도 않았는데, 그가 황태자의 호위를 서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일로 의견 충돌이 잦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황태자가 아예 선언했다고 하더군요. 황위에 오르면 길버트 백작을 내칠 것이라고.”
“허…….”
메르키트 백작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만약 길버트 백작만 도와준다면,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릴 수도 있겠군요. 어차피 론도 내에 있는 부대라고 해봐야 로열 가드와 소수의 수도 경호대인데, 로열 가드를 배제할 수 있으니까요.”
“네, 총기사단이야 근교에 머물고 있으니, 결정적인 순간에는 나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황태자 한 명의 목숨을 뺏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니까요.”
암셀은 그때까지 아무 말도 않고 있는 3황자를 향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
“…….”
“전하.”
거듭된 부름에 미하일은 입을 열었다. 짓눌린 듯한 목소리였다.
“말씀하시오.”
“마음을 굳게 먹으셔야 합니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습니다.”
그 말에 3황자는 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그래, 알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란 것을.
암셀의 말처럼 그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을 것이다. 이건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비정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무뚝뚝한 형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를 보며 웃던 리제의 얼굴도 같이 생각났다.
가슴이 아팠다. 괴로웠다.
“전하.”
재촉하는 암셀의 말에 미하일은 결국 입을 열었다.
“... 알겠습니다, 외숙부. 걱정하지 마십시오.”
암셀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저는 길버트 백작과 은밀히 연락을 취하며 때를 살피겠습니다. 전하는 검기사단을 잘 준비해 주십시오.”
대화를 끝낸 미하일은 방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은 그는 벽에 몸을 기대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빌어먹을…….”
손가락 사이로 괴로운 신음이 새어나왔다.
이 손으로 형님을 쳐야 한다고? 그 수밖에 방법이 없다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차일드 가문의 깊은 방에서 역모가 결정되었다.
론도의 하늘에 핏빛 구름이 감돌기 시작했다.
***
메르키트 백작과 3황자가 돌아간 후, 방에는 암셀 후작과 딸 유리엔만 남게 되었다.
몸이 안 좋은 그가 딸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는 배에서 격통이 올라와 크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아버지?”
“괜…… 찮다.”
“빨리 진통제를.”
“아…… 니, 소…… 용없어. 잠깐만…… 이대로…….”
암셀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유리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실 아버지가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로즈데일병원의 의사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현재 상태가 많이 좋지 않습니다. 어쩌면 조만간 급격히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안 좋아진다는 말이 무슨 뜻이죠?’
‘어쩌면 급하게 안 좋아져 최악의 경우 사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암셀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통증이 가라앉았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는 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자, 고개를 저었다.
“이제 괜찮다. 걱정 안 해도 된다. 가자꾸나.”
“아버지.”
그녀는 주저하다 말했다.
“혹시…… 레이디 클로랜스의 진료를 받아볼 생각은 없으세요?”
레이디 클로랜스. 제국 최고의 의사인 등불을 든 여인을 뜻한다.
하지만 암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특별한 방법이 있겠느냐? 이미 췌장의 기능이 다 망가진 것을.”
“그래도…….”
“무엇보다, 지금 우리는 황태자와 전쟁을 치르려 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진료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말에 유리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런 방법밖에 없는 걸까? 그를 죽여야 한다니.’
유리엔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녀는 황태자를 연모하고 있었다.
오래된 짝사랑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스쳐 지나가듯 본 그에게 온 마음을 뺏겼다. 시간이 지나도 식지 않는 사랑.
하지만 자신은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자신은 그의 어머니와 누이를 죽음으로 몬 차일드 가문의 적녀였으니까.
‘사랑이 이뤄지는 것은 바라지도 않아. 감히 내가 어떻게 그런 것을 원하겠어?’
그래, 언감생심 바라지 않는다.
황태자는 자신들을 죽여 원한을 갚으려 하고 있다. 자신들도 황태자를 쓰러뜨리려 하고 있다.
이런 비극적 상황에서 무슨 사랑을 바라겠는가?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것은…….’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랑이 이뤄지는 것은 바라지도 않으니, 단 하나 바라는 것.
그의 손에 죽고 싶지도 않았고, 그를 죽이고 싶지도 않았다.
‘무리한 바람이겠지.’
그녀는 씁쓸히 웃었다.
항상 당당하고 도도한 그녀였지만,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떠올리자 눈물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자신들이나 황태자, 둘 중 하나는 죽는다.
그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왜 그러느냐, 유리엔?”
“……아버지.”
아버지의 의아한 물음에 유리엔은 조심히 물었다.
“저희와 황태자 전하는…… 하나의 길을 갈 수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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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