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2 6-7 파국 =========================================================================
7장 파국 - 3.
“……!”
암셀의 얼굴이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예요. 사실 황태자의 입장에서도 저희 차일드 가문과 귀족파를 품으면, 강력한 힘이 생기는 것이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륙 전체의 금줄을 장악한 차일드 가문과 전통 지주 세력인 귀족파.
황태자파에 더해 그들마저 하나로 품으면 린덴은 어마어마한 통치력을 가진 황제가 될 것이다.
물론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되면 미하일 전하는?”
“전례에 따라 로마노프령의 대공이 되시겠지요. 그리고 아시잖아요. 미하일 전하는 황위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하지만 암셀은 딱 잘라 고개를 저었다.
“네가 말한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황태자는 절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유리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하께 용서를…… 구한 적도 없잖아요.’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황태자는 정말 자신들을 용서하지 않을까? 그렇게 그가 피에 미친 복수귀일까?
모른다.
왜냐면 차일드 가문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암셀 후작과 마리엔 1황비는 그에게 용서를 구한 적이 없으니까.
눈앞에서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을 목격한 어린 소년은 아무런 사과도 받지 못했다.
당시의 일은 차일드 가문의 위세에 유야무야 대충 넘어갔다. 그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린덴이 복수의 칼을 갈아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지 않을까?
만약……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만약.
그들이 황태자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했으면 혹시나 뭔가가 달라졌을까? 그래도 황태자는 자신들의 피로 어머니의 원한을 갚으려 하고 있었을까?
물론 여러 정치적 상황상 있을 수 없는 가정이었다.
그래도 유리엔은 그게 항상 궁금하고 안타까웠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그녀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물었다.
“실례되는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
“해봐라.”
암셀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리엔은 당돌한 평소 성격과 다르게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리 딸이라도 아버지의 기분을 너무 건들까 꺼려졌던 것이다.
“괜찮다. 말해봐라.”
결국, 유리엔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황태자 전하께 그날의 일을 사과할 생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으셨나요?”
“……!”
그리고 그 물음을 듣는 순간.
암셀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마치 얼음장처럼.
“…….”
둘 사이에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암셀은 얼굴을 굳힌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리엔은 괜한 질문을 했나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한 번은 꼭 물어보고 싶었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 된, 그날의 일을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사과? 무슨?”
“…….”
“난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구나. 왜 그날의 일을 우리가 사과해야지?”
“아버지.”
암셀은 배에서 다시 통증이 올라오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넌 우리가 왜 그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이 암셀이 왜 그런 죄악을 저질렀겠어?”
“……아버지.”
“자그마치 20년이다. 20년. 내 동생 마리엔이 황제 민체스터 때문에 고통받은 시간이.”
복통 때문일까? 암셀은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을 깨문 그의 이빨이 부르르 떨렸다.
“어린 시절부터 마리엔은 한결같이 민체스터만 바라봤어. 그가 자신에게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이. 아무리 냉대하고, 외면하고 고통을 줘도. 한없이 그만 바라보며 그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민체스터는 그런 내 동생에게 어떻게 했지? 외면하는 것도 모자라, 근본도 없는 여인을 황후로 앉혔어. 수없는 세월 동안 자신을 바라본 내 동생은 보잘것없는 황비의 자리로 밀어버리고!
“…….”
“그래, 황후, 황비의 자리 따위는 아무래도 괜찮아. 하지만 마리엔이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너는 아느냐? 이렇게 광증에 빠질 때까지! 20년. 무려 20년이야. 그 시간 동안 내 동생이 눈물 없이 잔 날이 며칠이나 될까?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그 순간, 격통이 다시 덮쳐 암셀 후작은 신음을 흘리며 말을 끊었다.
“……아버지. 의사를…….”
“아니, 됐다. 불러도 소용없어. 어쨌든.”
암셀은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와 우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둘 중 한 명은 피를 흘려야 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말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가슴이 답답했다.
암셀이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리엔, 내 딸아. 마음이 그렇게 약해서 쓰겠느냐. 그래도 걱정하지 말거라. 내 너를 위해서라도 지지 않으마. 비록 몸이 이렇다 하나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버틸 수 있다.”
***
한편 황태자 측은 계속해서 귀족파를 압박했다.
대리청정을 통해 얻은 사법권으로 사소한 꼬투리라도 잡아 귀족파를 구속해 옥에 가뒀고, 일체의 참작도 없는 엄한 벌을 내렸다.
그리고 때맞춰 출범한 ‘로마노프 은행’은 차일드 가문의 날개를 꺾었다.
로마노프 은행이 새로이 발행한 ‘지폐’가 기존 화폐 질서를 완전히 개혁했던 것이다. 그 결과 차일드 가문이 수호하던 금화본위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권 다툼과 상관없이 만성적인 통화 부족을 해결한 ‘지폐’의 개발은 훗날 역사에 린덴의 대표적 업적으로 칭송받는 일이었다.
그 여파를 몰아 린덴은 귀족파를 더욱 압박하는 발표를 하였다.
정식으로 황위를 이양받는 대관식 일정을 잡은 것이다.
더구나 이런 선언도 했다.
‘황위에 오른 후, 혈탑의 비극 때 일어났던 일을 철저히 재조사하겠다! 죄가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귀족파로서는 간담이 서늘하다 못해, 목이 떨어지는 듯한 말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그가 당시의 일을 재조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당시의 일에 가담했던 그들은 단 한 명도 화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차일드 가문과 마리엔 황비는 무조건 죽임당할 것이다. 그들을 지키려는 미하일도 마찬가지였다. 이 3명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 압박에 맞서 3황자 측은 조용히 정변을 준비했다.
모든 면에서 밀리고 있는 그들에게 남은 수는 오로지 하나, 군사적 반역밖에 없었다.
그들은 은밀히 길버트 백작과 연락을 취하며, 검기사단을 정비했다.
기회를 틈타, 황태자의 목을 칠 수 있도록.
***
황태자의 사자궁.
린덴은 길버트 백작과 단둘이 면담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이가 틀어졌다는 소문과 다르게 둘의 분위기는 가까워 보였다.
아니, 단순히 가까운 게 아니라, 대화 내용을 보니…….
“자네가 수고가 많군.”
“아닙니다, 전하.”
“그래, 하지만 조심해야 해. 귀족파 놈들이 눈치채서는 곤란하니까.”
길버트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심하고 있습니다.”
“귀족파의 의심을 덜기 위해 자네가 조금 더 궂은일을 겪어야 할 텐데 괜찮겠나?”
“제국의 불순분자를 솎아내는 일입니다.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내용의 대화가 연이어 이어졌다.
귀족파가 믿고 있던 길버트 백작의 배신은 그들을 반역의 올가미로 얽어맬 황태자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황태자는 일부러 길버트 백작을 자신의 경호로 삼았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연거푸 모욕을 주었다. 사이가 벌어진 것처럼 보이기 위함이었다.
“하여튼 정말 수고가 많네. 이 공은 절대 잊지 않을 거야. 그러면 앞으로도 귀족파 놈들과 은밀히 연락을 유지하고 있어주게.”
“네, 전하.”
“저들은 곧 미끼를 물 것이다. 초조할 테니까.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한 번에 목을 칠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길버트가 나가자, 린덴은 눈을 감았다.
‘이제 곧 끝나겠군.’
린덴은 중얼거렸다.
이 함정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될 것이다.
‘모조리, 한 명도 빠짐없이 얽어맬 수 있어.’
그는 일부러 귀족파가 역모를 일으키도록 유도했다.
혈탑의 비극과 연관된 인물을 한 명도 빠짐없이 단두대로 보내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고 해서 무작정 복수를 할 수는 없었다.
혈탑의 비극은 끔찍한 비극이었지만, 워낙 오래된 일이었고, 그 당시의 일만으로 피의 복수를 하기는 어려웠다.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는 어느 정도의 징역을 선고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황제라고 막무가내의 폭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계책이 귀족파가 군사적 정변을 일으키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무려 군사 정변, 반역이니까 연관된 귀족파의 인원들을 모조리 단두대에 보낼 수 있었다.
오조리 복수를 위한 계책이었다.
‘어머니, 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린덴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이 일만 끝나면 그는 과거에서 벗어날 것이다. 어머니와 누이의 한을 달래고, 그들을 악몽에서 해방할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눈을 감은 그의 머릿속에 기뻐하는 어머니와 누이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저 안개에 갇힌 듯 머릿속이 뿌옜다. 가슴도 이상하게 답답했다.
‘너무 과로했나.’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최근 확실히 무리하긴 했다.
그는 피로한 눈을 붙여 잠시 잠이 청했다.
늘 그렇듯 그는 똑같은 꿈을 꾸었다.
어머니와 누이가 나오는 꿈.
린덴은 꿈에 나타난 어머니와 누이에게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꿈은 조금 이상했다.
원래 그가 어떤 말을 하든, 일체의 표정 변함없이 가만히 그의 얼굴만 바라보다 끝나야 하는데. 그들의 눈빛이 살짝 변했던 것이다.
어딘지 안타까운. 슬픔이 깃든 눈빛으로.
‘……?!’
린덴은 그들의 눈빛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하지만 그 변화는 지극히 짧았다.
곧 그들의 눈동자는 평소의 무감정한 빛으로 돌아왔다. 마치 그가 잘못 보기라도 했던 것마냥.
‘…….’
그런 그들에게 린덴이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무채색한 세계가 흐트러지며, 그는 번뜩 눈을 떴다.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아…….”
린덴은 고개를 흔들었다. 무언가 멍한 느낌이었다.
뭐였지, 방금 꿈은?
그들이 왜 그런 눈빛을?
수없는 세월 동안 꾸어온 악몽이지만, 그들의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내가 많이 피로하긴 한가 보군.”
린덴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악몽도 곧 마지막이야.’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왜일까?
문득 그녀가 떠올랐다.
엘리제.
자신의 소녀.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옆에서 그녀를 느끼고 있고 싶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살얼음 같던 대치 속.
균형이 깨지는 일이 발생했다.
지병을 앓던 암셀 후작이 쓰러진 것이다.
그만 바라보던 귀족파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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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