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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63화 (163/194)

00163  6-7 파국  =========================================================================

7장 파국 - 4.

로즈데일 병원의 최상층, VVIP 입원실.

오로지 차일드 가문의 인물을 위한 그곳은 층 전체가 하나의 병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병실의 깊은 곳, 병상의 침대에 파리한 안색의 장년인, 암셀 후작이 누워 있었다.

‘외숙부.’

미하일은 침중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외숙부?”

“……괜찮습니다, 전하.”

암셀은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지만 전혀 괜찮은 얼굴이 아니었다.

거의 시체 같은 낯빛.

미하일은 방금 전 의사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원래부터 췌장이 기능을 거의 못했는데, 거기에 괴사성 췌장염이 합병되었습니다.’

‘괴사성 췌장염이 뭐지?’

‘쉽게 말해 감염증으로 썩어 들어간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치료는 할 수 있는 건가?’

‘항생제를 쓰고는 있지만 어렵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셔야 할 듯합니다. 짧으면 며칠. 길면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안에 사망하실 확률이 높습니다.’

절망적인 대답이었다.

암셀 후작이 미하일에게 나직이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전하. 저는 괜찮습니다.”

“뭐가 괜찮습니까? 이렇게 안 좋으면서……!”

미하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암셀은 씁쓸히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하필 이렇게 정국이 안 좋을 때 쓰러지게 되다니. 내가 며칠이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괜찮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도 직감하고 있었다.

본인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내가 쓰러지면 앞으로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암셀은 탄식했다.

귀족파의 수장인 그가 급환으로 사망하면 귀족파는 끝장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고 있었는데,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이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하지만 내 딸 유리엔은? 마리엔은? 저 미하일 전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안 돼. 이렇게 세상을 떠나면. 죽기 전에 정변을 마무리해야 해.’

자신이 죽으면 귀족파는 무너질 것이다.

그러면 정변을 일으키기도 전에 끝이었다.

그러니 서둘러 정변을 마무리해야 했다.

“전하.”

“네, 외숙부.”

“아무래도 시기를 앞당겨야 할 것 같습니다.”

“……!”

미하일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행히 길버트 백작에게서 얼마 전 연락이 왔습니다. 조만간 황태자가 론도 근교를 방문할 예정이라고요.”

암셀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침 그곳은 총기사단의 주둔지와는 거리가 멀고 검기사단의 군영과는 일직선으로 가까운 곳입니다. 거사를 시행하기에 가장 최적의 시기와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

“이제는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 제가 죽으면, 정변을 일으키기도 전에 귀족파는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암셀은 고열에 달뜬 얼굴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반드시 황태자의 목을 쳐야 합니다. 마음 굳게 먹으십시오, 전하.”

“……알겠습니다.”

미하일의 무거운 목소리에 암셀이 미하일을 바라봤다.

“전하, 혹시 아직도 피를 나눈 황태자에게 검을 빼 드는 것이 꺼려지십니까?”

“…….”

미하일은 잠시 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 방법 외에는 다른 수가 없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 굳게 먹고 있으니, 외숙부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며 미하일은 병실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볼 테니 외숙부는 몸조리 잘하고 있으십시오. 만약 다음에 왔을 때 더 안 좋아져 있으면, 혼내줄 것입니다.”

암셀 후작은 옅게 웃으며 답했다.

“네, 좋아질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

병실을 나온 미하일은 창밖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는데.’

그는 씁쓸히 생각했다.

도저히 잘 되지가 않았다.

형님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는다. 어머니도 죽는다. 그러니 형님을 죽여야 한다.

변하지 않는 명제.

하지만 왜 이리 가슴이 답답할까? 왜 이리 가슴이 터질 것 같을까?

“하아.”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형님의 목을 베는 장면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손이 떨렸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해야 했다. 이제는 이 방법밖에 남지 않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어떻게든 다른 방법은 없을까?

‘리제.’

미하일은 창밖을 바라봤다.

그곳엔 황실십자병원이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엘리제가 있는 곳.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이미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지만, 그래도 그냥 잠시라도 좋으니 얼굴이 보고 싶었다.

환자를 진료하며 반짝이는 눈이 보고 싶었고, 시시껄렁한 농담에 웃는 미소도 보고 싶다.

그냥…… 잠시만 같이 있고 싶었다.

“하아.”

그는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엘리제는 그때 병원에서 민체스터의 진료를 보고 있었다.

이제 정식 약혼자가 되었으니, 진작에 어의직에서 사퇴하는 것이 맞지만, 황제가 아직 건강을 되찾지 못한 관계로 그녀의 퇴직도 뒤로 미뤄지게 되었다.

그래도 그녀의 노력 덕에 민체스터는 많이 안정된 상태다. 혈압을 비롯한 활력 징후도 완전히 돌아왔고, 여러 수치도 정상인 상태였다.

다만 아직 회복되지 않은 것은 의식.

‘언젠가는 돌아오시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심장마비 후 심폐소생술을 한 경우, 원래 의식 회복이 더디다. 그래도 그녀가 옆에서 곧바로 심장 마사지를 시작했었고, 심폐소생술 시간도 길지 않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의식이 회복될 거로 생각했다.

‘하아. 그것보다.’

그녀는 황제의 병실 한편에 놓인 진료 책상 앞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정국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돌아가는 소문들이 심상치 않았다.

귀족파의 구속, 로마노프 은행의 출범, 대관식, 암셀의 급환.

‘이전 삶과 똑같아.’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똑같을까?

비록 시기는 달랐지만, 지금 론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암셀 후작의 급환 소식까지.’

그녀는 허리를 숙여 책상 위에 팔을 대고 얼굴을 묻었다.

복잡한 소식 때문인지, 마음이 답답했다.

‘난 어떻게 해야지.’

린덴과 미하일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이 소용돌이치는 정국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곧 정변이 일어난다.

궁지에 몰린 귀족파가 들고 일어설 것이다.

하지만 그건 황태자의 함정이다.

정변은 철저히 제압되고, 관련된 수많은 이의 피가 흐르게 된다.

미하일도 죽고, 1황비도 죽고, 유리엔도 죽는다. 자신에게 윈던 베이커리의 케이크가 최고라고 말하던 다혈질 메르키트 백작도 죽는다.

그 밖에 지금껏 자신의 치료를 받고 감사하다고 말하던 수많은 이가 죽는다.

하늘이 눈물 흘린다고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비참했던 론도의 비극.

그 비극이 곧 일어난다.

‘밀에게 정변을 포기하라고 부탁해 볼까?’

물론 부탁은 해볼 수 있다.

부탁이 대수겠는가? 비극만 막을 수만 있다면 무릎을 꿇고 빌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않는다.

서로가 칼을 들게 된 과거의 괴로움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칼을 거두지 않을 테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떠올려 보았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제국 최고의 의사.

시민들의 많은 지지를 받는 명사.

황태자의 약혼녀.

귀족파와 황제파가 동시에 가깝게 생각하는 이.

그리고 절대 면책권인 황실 십자(Royal cross)의 소유자.

이것들이 바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걸 통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엘리제.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내. 이제 시간이 없어. 곧 비극이 일어날 거야. 그 안에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해.’

물론 그녀도 본인을 과대평가하지는 않았다. 비록 많은 명성을 얻고 있지만, 자신이 힘없는 이임은 알고 있다.

두 거대한 세력끼리의 정권 다툼에 일개 의사인 자신이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해보고 싶어. 소중한 사람이 죽는 것을, 그리고 나중에 그가 후회로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그녀는 책상에 엎드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 때문인지, 몸이 무거웠다.

엘리제는 무거운 머리를 짚고, 허리를 폈다.

띵하고 현기증 나는 시야를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린…… 덴?”

검은 머리, 조각 같은 얼굴.

황태자 린덴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오셨어요?”

“아까.”

“죄송해요. 오신 줄 몰랐어요.”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냥 얼굴만 보려고 온 것이니까. 아바마마는 괜찮으신가?”

“네,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렇군. 항상 고맙다.”

“아니에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하는 일인걸요. 그런데…….”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며 머뭇거렸다.

“왜 그러지?”

“……아니요.”

엘리제는 한숨을 삼켰다.

그녀와 그는 제법 오랜만에 보는 거였다. 3황자 측과 이런저런 다툼으로 린덴은 엘리제를 만나러 오지 못했다.

그런데 오래간만에 마주한 그는 얼굴이 좋지 않았다. 피로감이 가득한? 딱히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평소와 달랐다.

“왜 그러는가? 말해봐라.”

린덴이 엘리제에게 말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잘 지내셨는지요?”

많은 의미가 함축된 물음.

린덴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답했다.

“잘 못 지냈다.”

“아…….”

“그대가 보고 싶어서 말이지.”

린덴은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백금발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가만히 그녀를 자신에게 끌어당긴 후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리제.”

“린덴…….”

그가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넌 잘 지냈느냐? 몸이 아프진 않았고?”

작금의 어지러운 정국과 전혀 다른 따뜻한 말.

그 목소리에 담긴 따스함에 엘리제는 이유 없이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괜찮았어요.”

“거짓말. 조금 전에도 몸이 안 좋은 것 같던데? 왜 이렇게 자주 아픈 거지? 속상하게.”

“정말. 정말로 괜찮아요.”

엘리제는 그의 품속에 머리를 파묻었다.

마음이 답답해서일까? 그의 단단한 품을 느끼고 싶었다.

“하아. 안 되겠어. 아바마마의 진료는 밴이나 다른 교수에게 맡기고 그대도 입원시켜야겠어. 이렇게 맨날 아픈데 무슨 놈의 진료야.”

그녀는 가만히 웃었다.

그 미소에 린덴은 불만 섞인 표정을 지었다.

“웃지 마라. 난 진지하니. 입원시킨 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검사해 봐야겠어. 하여튼 이 병원의 의사들은 뭘 하는 것인지. 내 비가 될 그대가 툭하면 아픈데 보고만 있다니. 다 잘라버려야겠어.”

린덴은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를 바라봤다.

“리제.”

“네.”

“잠시 산책이나 할까, 우리? 혹시 바쁜가?”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안 바빠요.”

둘은 황궁의 정원을 걸었다.

언제 시간이 그렇게 간 것일까? 벌써 겨울이었다.

이미 낙엽이 진 눈에는 흰 눈이 희끗희끗 쌓여 있었다.

“춥지는 않나?”

“괜찮아요. 날씨 따뜻한 걸요. 하나도 안 추워요.”

“거짓말하지 마라. 얼굴이 빨가면서.”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그녀에게 둘러주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최대한 춥지 않도록.

“추운데 괜히 나왔군. 빨리 돌아가야겠어.”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저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그리고?”

“조금 린덴과 걷고 싶어요. 이렇게 같이 걷는 것 좋아서…….”

그 말에 린덴은 엘리제의 눈을 바라봤다. 그녀도 그를 바라봤다. 둘의 눈동자가 잠시 허공에서 얽혔다.

“사랑한다, 엘리제.”

“……저도요, 린덴.”

둘의 얼굴이 겹쳐졌다.

입술과 입술이, 혀와 혀가 섞여 들어갔다. 달콤한 사랑이 담긴 키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석을 다루듯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 린덴.’

왜일까? 그의 사랑을 느끼는데, 가슴이 울렁거렸다.

달콤했지만 슬픈 느낌이 들었다.

아마 자신이 그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곧 그가 일으킬 혈사, 복수를 끝내고 그 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괴로워할 그를 생각하는 게 아팠기 때문이다.

<주말은 쉽니다!>

============================ 작품 후기 ============================

월요일 뵙겠습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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