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4 6-8 움직임 =========================================================================
8장 움직임 - 1.
깊은 입맞춤 후 그는 그녀를 놔주었다.
“그러면 잠시만 걸을까?”
“……네.”
“추우면 바로 이야기하고. 감기 걸리면 혼내줄 테니.”
그렇게 둘은 정원 길을 산책했다.
손을 잡고 말없이 서로를 느끼며.
그렇게 조용히 걷다가 엘리제가 눈 덮인 나무를 보며 문득 말했다.
“거기 생각나요.”
“어디?”
“크림반도의 우크라 산맥이요.”
“아…… 힘든 기억이었지.”
린덴은 혀를 찼다.
포로로 잡혀간 그녀를 그가 구출해 둘은 우크라 산맥을 통해 탈출했다.
확실히 힘든 기억이었다. 둘 모두 죽을 뻔했으니까.
하지만…….
엘리제는 그에게 몸을 기댔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해요.”
“왜?”
“린덴…… 당신과 같이 있었잖아요.”
그 말에 린덴은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깊은 시선.
엘리제는 약간 민망한 마음이 들어 얼굴을 피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리고 그 순간.
그가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마치 으스러지듯 품에서 절대 놔주지 않겠다는 듯.
“린…… 덴?”
엘리제는 놀라 린덴을 불렀다.
그가 말했다.
“사랑한다.”
“……!”
짧지만 강렬한 마음이 담긴 문장.
그가 그녀를 안은 그대로, 귓가에 대고 말을 이었다.
“리제,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느냐?”
“네, 말씀하세요.”
“내 곁에 영원히 있어주겠느냐?”
“……!”
뜻밖의 부탁에 엘리제는 흠칫 놀라 그를 바라봤다.
바로 눈앞에 놓인 그의 금색 눈은 그녀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린덴은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네가 없다면 난 한순간도 못 버틸 것 같아서. 그래서 부탁하는 거다. 제발…… 내 곁에 영원히 있어주지 않겠느냐?”
“전…… 린덴의 곁에 영원히 있을 거예요.”
“그렇지?”
“네, 영원히. 영원히 함께할 거예요.”
린덴은 잔잔히 미소 지었다.
“고맙다. 난 너만 있다면 다 상관없다. 모두…… 괜찮아. 하지만 네가 없다면 견디지 못할 거다.”
“린덴…….”
엘리제는 그의 말을 듣는데 이유 없이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등을 껴안았다.
그렇게 둘은 겨울 정원 아래에서 잠시 말없이 서로를 안고 있었다.
싸늘한 바람이 둘의 볼을 스칠 때쯤, 린덴이 그녀를 놔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다. 내가 요즘 피로해서 괜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것 같군. 그냥 해본 말이니, 크게 신경 쓰지 말도록.”
린덴은 아쉬운 듯 다시 그녀의 볼을 어루만진 후 말했다.
“바람이 차니 그만 들어가자.”
“…….”
그러고 그는 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제는 따라가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그의 등 뒤를 바라봤다.
‘전하…… 린덴…….’
왜일까? 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할까?
‘보고 싶지 않아.’
그래, 그가 비극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수많은 이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고, 그 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자신은 그를 사랑하니까. 이미 그는 자신에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래, 이제 그는 그녀 자신보다 소중한 사람이었다.
‘아…….’
그 사실을 떠올린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나…… 혹시나 곧 다가올 비극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방법이!
‘……!’
그녀의 몸이 벼락에 맞은 것처럼 굳었다.
‘가…… 능할까?’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대단한 방법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방법 자체는 단순했다.
문제는 이 방법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인 것이었다.
이 일을 성공해 내도 비극을 막을 수 있는 확률은 굉장히 적었다. 어쩌면 역효과만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단순히 역효과가 아니라, 그녀는 그의 분노에 직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방법 외에는 없어.’
엘리제는 자신의 역량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다가올 비극을 막을 능력이 없다. 자신은 그저 일개 의사이자 황태자의 약혼녀일 뿐 힘을 가진 세력가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방금 떠올린 이 방법은 오로지 그녀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아니, 이 방법 외에는 그녀가 다가올 비극에 맞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해도…… 될까? 전하께서 많이 분노하실 수도 있어.’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
이제 그녀도 그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방법을 잘못 사용하면 그는 자신에게 분노할 수도 있다. 어쩌면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의 원한은 크고 깊었으니까.
‘하지만…… 전하가 아픈 것 보고 싶지 않아…….’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분노를 사는 것은 무서울 정도로 싫었다.
하지만 그래도 사랑하기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닐까?
“엘리제?”
앞서가던 린덴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오지 않고 뭐하지?”
엘리제는 주저하며 말했다.
“전하.”
그녀는 린덴이 아닌, 전하란 단어를 사용했다.
“왜 그러지?”
“지난번 승작식 때 저에게 황실 십자가를 주셨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그건 왜 이야기하지?”
“그러면…… 저는 한 가지 잘못을 해도 전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요?”
린덴은 흠칫 그녀를 바라보았다.
작은 소녀는 떨리는, 하지만 굳은 눈동자로 그를 보고 있었다.
무언가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깨달은 그도 표정을 굳혔다.
“무슨 일이길래 그러지?”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갑자기?
억지로 더 물어보려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엘리제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궁금하긴 했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해로운 일을 하진 않을 것이라 믿은 것이다.
대신.
“아니, 황실 십자가를 사용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다. 이제 곧 황위에 오를 이로서 면책권은 인정하지 않겠어.”
“네? 그게 무슨……? 분명 황실 법에 무조건적인 면책권을 인정한다고…….”
엘리제는 당황해 그에게 항의했다.
피식 웃은 린덴은 엘리제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 다정한 포옹에 엘리제는 눈을 크게 떴다.
“……전하?”
“엘리제,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냐? 면책권? 그게 우리 사이에 왜 필요하지?”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왜 네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설마 진짜 잘못을 저지르거나 하지는 않겠지. 아니, 잘못을 저질러도 상관없다. 내가 널 사랑하니 다 용서해 주마. 그러니 무슨 일이든 마음껏 해도 좋아.”
“……전하.”
그 한정 없는 애정에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너에게 황실 십자가를 준 것은 죄를 지었을 때 그걸로 용서를 빌라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네가 그런 죄를 저지를 리도 없고, 우리 사이에 무슨 면책권이냐? 그저 아바마마를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일 뿐이었다.”
따뜻한 그의 말 덕분일까?
엘리제는 조금 용기를 가졌다. 그래서 조심히 물었다.
“그러면 전하. 저…… 조금은 주제넘은 짓을 해도 괜찮을까요?”
“주제넘은 짓?”
“네.”
린덴은 눈썹을 찌푸렸다.
도대체 이 소녀가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일까?
엘리제가 다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혹시 기분을 상하게 하더라도…… 그래도 저 싫어하지 않으실 건가요?”
결국, 린덴은 와락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저, 전하?”
린덴은 그녀의 입술을 범하며 불쾌하다는 듯 내뱉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는 몰라. 궁금하지만 네가 원치 않으니 더 물어보지 않겠다. 하지만 내가 너를 싫어하게 된다니.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응?”
“저, 전하…….”
“내가 널 싫어하는 일 따위는 절대 오지 않아. 알겠어?”
그러며 그는 그녀의 붉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똑똑히 알라는 듯, 일부러 아프도록.
엘리제는 그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네, 감사해요. 사랑해요, 린덴.’
그러며 그녀는 간절히 마음속으로 바랐다.
물론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이 하려는 일을 해내도, 비극을 막을 수 있는 확률은 굉장히 적다는 것을.
그래도. 모두가 행복하게 되었으면.
제발 그럴 수 있었으면.
***
린덴과 헤어진 엘리제는 병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전임 어의인 밴 자작을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백작님?”
“죄송하지만 잠시만 폐하의 진료를 맡아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 네. 물론이죠. 그런데 무슨 일로?”
“어디 다녀올 데가 있어서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길어도 2~3일 정도…….”
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엘리제는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곳 병원의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니, 무언가 용무가 있을 거로 생각한 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감사해요. 폐하는 현재 대부분 호전된 상태라서 기본적인 처치만 하면 될 듯해요. 지금 들어가고 있는 보조약들과 수액은…… 그리고 영양 공급은…….”
그녀는 밴에게 황제의 상태에 대해 인계했다. 하나라도 놓칠까 꼼꼼하게.
마치 가족을 걱정하는 듯해 밴은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는 제가 책임지고 진료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가운과 진료복을 벗고, 활동이 편한 가벼운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코트를 걸치고 왕진 가방을 들었다.
엘리제는 방을 나서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이 정말 맞는 것일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확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겠다.
자신이 이렇게 행동한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도 없을지도, 황태자의 분노만 자극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 일을 하면 자신은 그의 분노를 살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그는 자신에게 실망할 수도 있다.
‘나를 싫어하게 될지도.’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싫어.’
그가 자신에게 실망하다니. 그래서 싫어하게 된다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까마득한 아픔이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해야 했다.
그를 사랑하니까.
다가오는 비극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방법 외에는 없으니까.
그러니 미움받을 것을 각오하고 해야 했다.
아무런 의미 없을지라도. 오히려 그의 미움만 받는 것으로 끝날지라도, 이 순간 자신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짧게 기도한 엘리제는 방을 나섰다.
시간이 없었다.
암셀 후작이 급환으로 쓰러진 이상, 과거를 비추어 볼 때 앞으로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2~3일. 그 안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백작님을 뵙습니다!”
로열 가드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경례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마차를 부를까요?”
로열 가드의 물음에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마차는 필요 없었다.
그녀의 목적지는 바로 옆이었으니까.
엘리제는 고개를 들어 황궁 안 한 건물을 바라봤다.
황태자 린덴의 사자궁 옆의 흰색 건물, 장미궁이었다.
‘밀.’
엘리제는 그 장미궁 주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녀가 찾아가는 곳은 장미궁, 바로 3황자 미하일을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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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뵙겠습니다!! 완결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본편 완결은 181화이며, 이후 잠시의 휴식 후 외전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외전 분량은 아직 미정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