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5 6-8 움직임 =========================================================================
8장 움직임 - 2.
장미궁을 방문하자 시종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아, 전하께서는 지금 궁에 계시지 않는데…… 죄송합니다.”
“언제 돌아오시나요?”
“아마 3시간 정도 걸릴 듯합니다. 돌아오시면 방문 사실을 고해 드릴까요?”
3시간. 기다리고 있기에는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다른 용무였으면 돌아갔다 다시 왔겠지만 그럴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안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시종은 그녀를 안쪽의 응접실로 안내했다.
엘리제는 시종이 내온 차를 마시며 가만히 미하일을 기다렸다.
‘잘되어야 할 텐데.’
그녀는 생각했다.
이 일을 하려면 일단 미하일의 승낙이 필요했다.
‘밀은 거절하지 않을 거야. 오히려 환영할 거야.’
3황자는 한결같이 이 정권 싸움을 원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원하는 것은 황위가 아니라 자유로운 새처럼 저 하늘을 훨훨 나는 것.
문제는 혈탑의 비극의 당사자인 암셀 후작과 황태자의 반응이었다.
일단 황태자의 반응을 차치하고라도, 암셀 후작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도 막막하긴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응접실 안에서 생각지도 않은 소리가 들렸다.
끼잉.
‘응?’
웬 강아지였다. 품종 좋은 혈통이 아닌,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누런 강아지.
‘웬 강아지지? 밀이 강아지를 키웠었나?’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강아지는 그녀에게 다가 와 혀를 내밀어 발을 핥았다.
그녀는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다리를 의자 위로 올렸다.
“얘, 간지러워.”
강아지는 이번엔 왕진 가방을 바라봤다. 이런저런 물건이 잔뜩 든 가방이 신기한 눈치였다.
엘리제는 귀여운 마음이 들어 가방에서 청진기를 꺼내 강아지에게 보여줬다.
“이거 청진기야. 처음 보지? 그런데 넌 이름이 뭐니? 밀이 네 아빠니?”
끼잉!
맞는다는 듯, 소리 지르는 강아지.
‘강아지라니.’
누군가 선물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전통 고급 품종도 아닌, 누리끼리한 누렁이를 황족에게 선물하는 이는 없을 테니까.
‘길에서 주어온 걸까? 밀답네.’
너무 미하일다운 취향 같아 엘리제는 자신의 상황도 잊고 쿡쿡 웃었다.
강아지의 털을 어루만졌다.
끼잉.
강아지는 간지럽다는 듯 몸을 털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애잔해졌다.
‘내가 하려는 일이 실패하면…… 이 강아지는 밀을 잃겠지?’
한숨이 나왔다. 어깨가 한층 무거워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멍!
강아지가 돌연 소리를 지르더니, 그녀의 손에 들린 청진기를 낚아채 달아난 것이다!
“어! 안 돼?!”
엘리제는 깜짝 놀라 강아지를 쫓았다.
저 청진기는 장인에게 부탁해 특별히 제작한 최고급의 것이었다. 아니, 그걸 떠나 린덴이 선물해 준 것이라 잃어버리면 안 됐다.
“얘! 이리 가져오렴!”
하지만 강아지는 장난을 치는 거로 생각했는지, 열심히 그녀에게서 달아났다.
그렇게 장미궁에서 생각지도 못한 술래잡기를 한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잃어버리면 안 되는데…….”
엘리제는 허리를 숙여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원래 바닥인 체력이라 조금만 뛰었는데, 숨쉬기가 힘들었다.
‘어디로 간 거지? 아니, 여긴 어디지?’
정신없이 쫓아 장미궁 깊은 곳에 들어와 버렸다.
그런데 다시 응접실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을 때였다. 그녀의 발목을 우뚝 잡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자리한 복도 옆에 자리한 방 안에서였다.
“그러면 그때 황태자의 목을 치는 것이오?”
“네, 그때가 아니면 더는 기회가 없습니다.”
“총기사단이 움직이지는 않겠지요?”
“네, 그럴 걱정은 없습니다.”
낮은 소곤거림.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건?’
생각지도 않게 엿듣게 된 역모 모의였다!
심지어 아는 목소리들도 있었다.
“길버트 백작이 정확한 시기를 알려주기로 했소. 황태자가 교외로 나가면 검제 전하와 검기사단이 급습할 것이오. 아무리 황태자가 공제라 불릴 정도로 강하다 해도, 서대륙 최강의 오러 나이츠인 3황자 전하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요.”
“이번이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요. 반드시 성공해야 하오. 그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소.”
엘리제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곳을 벗어나야 해.’
손이 파르르 떨렸다.
물론 그녀는 그들의 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죽이려는 계획을 직접 귀로 듣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빨리…… 이곳을.’
혹시라도 자신이 그들의 계획을 엿들었다는 것을 들키면 상황이 곤란해진다.
다른 음모도 아닌, 역모 계획이다. 자신은 차기 황후가 될 이이고.
아무리 귀족파가 그녀를 존경한다지만, 역모 계획을 엿들은 것을 알면 고분고분 놔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모든 것이 걸린 일이었기에.
어떻게든 입을 막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녀의 계획은 시작부터 꼬인다.
‘조심히. 발소리 내지 말고.’
워낙 긴장해서인지 발끝이 떨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주군인 3황자의 장미궁이라서 그런지, 모의하는 이들이 크게 밖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중이었다.
엘리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가 울렸다.
멍! 멍!
청진기를 물고 있던 강아지가 엘리제에게 다시 돌아와 큰 소리로 짖었던 것이다.
‘아……! 안 돼!’
엘리제는 아득한 마음이 들었다. 등줄기로 한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덜컥하는 문소리와 함께.
“누구냐?!”
놀라 뛰쳐나온 이들은 그녀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아니? 레이디 클로랜스? 어째서 이곳에?”
숨 막힐 듯한 적막이 그들 사이를 흘렀다.
엘리제는 최대한 당황하지 않으려 애썼다.
자신이 저들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것을 티 내면 안 된다.
“오, 오랜만이에요. 메르키트 백작님. 최근 몸은 괜찮으신지요?”
“…….”
모의하던 이들 중, 가장 익숙한 메르키트 백작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는 친근하게 인사하던 평소와 다르게 한없이 딱딱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서부터 들었소, 엘리제 백작?”
“무슨 말씀이신가요?”
엘리제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노력하며 반문했다.
그러나 메르키트는 백전노장의 정치인. 엘리제의 눈동자를 보고, 그녀가 자신의 대화를 눈치챈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들어버렸구려.”
엘리제는 흠칫 놀랐지만 놀람을 감추며 고개를 저었다.
“뭘 들었다는 건가요?”
“시치미 떼지 마시오. 하…….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백작에게 들켜 버리다니.”
메르키트는 깊게 탄식을 내뱉었다. 옆에 있던 다른 이들도 탄식을 뱉었다.
귀족파의 인원들은 모두 엘리제를 존경했다. 정치적 이념을 떠나 성녀와도 같이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역모 모의를 들키다니. 이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무리 등불을 든 여인이라도, 놔줄 수 없었다. 그녀를 놔주었다가는 거사를 치르기도 전에 음모가 새어나갈 것이고, 그건 그들의 몰살을 뜻하는 것이었으니까.
“무슨 말씀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전 미하일 전하를 뵈러 온 것이니 돌아갈게요.”
그녀도 곤란한 마음으로 말했다.
자신은 이미 저들의 음모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괜찮다고 잠시만 날 믿으라고,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과연 역시.
찰칵.
섬뜩한 금속성이 울렸다.
그리고 그녀의 관자놀이에 와 닿는 차가운 느낌.
“……!”
옆에 서 있던 한 중년 귀족이 총을 겨눈 것이다. 귀족파의 중핵인 유트 자작이었다.
“이렇게 총을 겨눠 정말 죄송합니다, 백작님. 하지만……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렇게 엘리제는 생각지도 않은 납치를 당하게 됐다.
‘이런.’
그녀도, 귀족파도 모두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특히 그녀보다는 귀족파가 곤혹스러워했다.
“이 일을 어찌 해야 한단 말이오? 하필 레이디 클로랜스에게 들켜 버리다니.”
다른 이도 아닌, 황태자비가 될 그녀였다.
그녀를 놔주는 순간, 그들의 역모 모의는 곧바로 황태자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이대로 놔둘 수는 없습니다. 입을 다물게 해야 합니다.”
한 귀족의 말에 다른 이가 쏘아붙였다.
“어떻게 입을 다물게 한단 말이오? 등불을 든 여인을 죽이기라도 하겠단 말이오?”
그 말에 모두가 침묵에 빠졌다.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녀를 죽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차마 그 방법을 원하는 이는 귀족파 중 아무도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닌, 등불을 든 여인 아닌가?
아무리 역모를 앞두고 있다지만 그런 고귀한 여인을 죽여야 한다니.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방법이었다.
“감정적 이유를 떠나서도 그녀를 죽이면 안 됩니다. 우리가 그녀를 죽였다는 것을 시민들이 알면 후에 그 후폭풍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이대로 거사 날까지 그녀를 가둬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제안에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그녀가 사라졌다는 것을 곧 클로랜스 가와 황실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혐의가 돌아올 게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러니 그것도 답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귀족파의 인원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답이 없었다.
그녀를 가둬도 안 되고, 풀어줘도 안 된다.
그렇다고 죽이는 것도 답이 아니었다. 어차피 죽여도 변고를 눈치챈 황실이 그들을 의심할 것은 뻔했으니까.
‘하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메르키트 백작이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
‘과연 우리는 성공할 수 있을까?’
연달아 악재만 터지다 보니, 앞에 펼쳐진 운명이 너무나 어둡게 느껴졌다.
자신들은 과연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때였다!
한 거친 음성이 그들 사이를 갈랐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입니다!”
“칼라일 자작.”
머리가 희끗희끗한 거친 인상의 남자는 육군 장성 출신인 칼라일 자작이었다. 그는 과거 검은 대륙에서 여러 전투를 경험한 경력이 많았다.
“이제 남은 방법은 단 하나. 지금 당장 늦어도 내일 해가 떠오르기 전에 황태자를 쳐야 합니다!”
“……!”
그 전격적인 말에 모두 흠칫 놀라 칼라일을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장 황태자를 쳐야 한다니?”
“간단합니다. 이제 남은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며 칼라일은 설명했다.
“저 엘리제 백작을 풀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가 가두든, 입을 막든 황실은 곧 그녀의 부재를 알게 될 것입니다. 단번에 우리를 의심하겠지요.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황태자가 아직 그녀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한 지금뿐입니다.”
“…….”
귀족파의 분위기가 침중해졌다.
칼라일의 말이 맞았다.
이렇게 상황이 꼬인 이상, 원래의 계획을 밀고 갈 수는 없었다.
급작스러웠지만, 황실이 그녀의 변고를 눈치채기 전,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한숨을 토한 메르키트는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3황자 전하가 도착하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마침 벌컥 문이 열리며 3황자 미하일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화사한 평소와 다르게 딱딱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전하.”
“이야기는 오면서 다 들었다.”
그는 말했다.
“리제는 지금 어디에 있지?”
***
엘리제가 납치된 곳은 론도 근교의 별장이었다.
인적이 드문 그곳은 테즈 강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엘리제는 별장 안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손은 묶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미하일의 얼굴이 더욱더 딱딱해졌다.
메르키트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도주 우려 때문에…….”
“……풀어. 지금 당장.”
서늘한 기세에 메르키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미하일이 물었다.
“그리고 왜 이렇게 자고 있는 거지? 이 향은? 설마 수면향인가?”
“……네, 전하.”
미하일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낮은 한숨에 불과했지만 듣는 이들은 이유 없이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치워.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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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