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6 6-8 움직임 =========================================================================
8장 움직임 - 3.
“……네.”
감시하던 기사들이 허겁지겁 밧줄을 풀고, 수면향을 치웠다.
미하일은 굳은 눈으로 잠들어 있는 엘리제의 얼굴을 바라봤다. 안타까움과 아픔이 담긴 눈동자로.
‘리제.’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손을 뻗어 조심히 그녀의 백금발을 어루만졌다. 간절히 바라지만 이제 절대 닿을 수 없는 그녀. 마음 깊이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아.’
그때, 메르키트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전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거사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야기를 들으셨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기는 어렵습니다. 곧 그녀의 실종 사실을 클로랜스 가와 황태자가 눈치챌 것입니다.”
“…….”
미하일은 입을 다물었다.
메르키트는 말을 이었다.
“칼라일 자작의 말처럼…… 오늘 밤밖에 기회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미하일은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검기사단에 전해. 오늘 밤, 야간 연무(硏武)가 있을 거니 준비하라고.”
연무. 검 훈련을 뜻한다.
야간 훈련은 검기사단에서 흔하게 하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메르키트는 3황자의 말에 숨은 속뜻을 알아들었다.
그는 침중한 얼굴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나가 봐. 나는 곧 따라갈 테니.”
“네, 전하.”
조심스럽게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엘리제와 미하일만 남게 되었다.
“…….”
미하일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말없이. 가만히.
“리제.”
그는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조용히. 그녀가 깰까 봐 조심하여.
“이제 이렇게 널 보는 것도…… 마지막이겠지? 난 이제…… 형님과 싸우러 가야 하니.”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 사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 있다? 어쩌면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손이 그녀의 백금발을 다시 어루만졌다.
“나 너 사랑해.”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지금까지 꺼내지 못했던 고백.
“많이. 정말 많이 사랑해.”
중얼거렸다.
“모든 걸 다 잊고 네 얼굴만 보고 있고 싶을 정도로. 그냥 네 손만 잡고 있고 싶을 정도로.”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이마를 가린 백금발을 쓸어올린 그는 주저하며 살짝 입술을 맞췄다.
입술을 뗀 그는 그녀의 얼굴을 담으려는 듯, 하염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나 이제 형님을 죽이러 갈 거야. 그런데…… 우스운 이야기지만, 나……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해서일까?
그는 계속해서 가슴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혼잣말로 꺼내었다.
“하긴 잘할 수 있는 게 이상한 거겠지? 형제끼리 죽이는 건데. 그걸 어떻게 잘할 수 있겠어? 역사서나 소설 책보면 황가의 형제들끼리 잘도 서로 죽이던데 어떻게 그렇게 잘하나 모르겠어. 말도 안 돼.”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상한 것은 나인가? 원래 황위를 앞에 두고는 피도 눈물도 없이 비정해져야 하는데. 후세의 역사가들이 보면 날 얼간이라 비웃을지도 모르겠어.”
거기까지 이야기한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사랑해. 정말.”
그는 한 번 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춘 후,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애검, 비천검을 들고 방을 벗어났다.
문을 닫기 전, 미하일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아마 자신이 그녀를 보는 것은 이 순간이 마지막이리라.
‘우리. 이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3황자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운 건 그녀와의 관계뿐이 아니었다.
형님과도 이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의미 없는 가정.
오늘 밤이 지나면 형님과 자신 한 명은 죽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미하일은 자신의 검을 바라봤다.
급작스러운 거사였지만 승산이 없지는 않았다.
그건 그가 서대륙 최강검인 검제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병력이 지키고 있어도 그의 앞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론도에서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이는 오로지 공제 린덴뿐이었다.
아니, 사실 황태자도 객관적인 무력에서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그는 황태자와 비교해 몇 수는 위의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하일은 자신이 형님의 목을 베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싸우기도 전에 이런 꼴이라니. 정신 차려. 오늘 싸움에 모든 것이 달려 있어.’
미하일은 고개를 털었다.
방 밖으로 나와 별장 앞을 흐르는 테즈 강을 바라봤다.
고요한 강물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으며 얼굴을 굳혔다.
‘이제 가자.’
그러고 자신의 말에 올라타려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들린 하나의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잡았다.
“……밀.”
“……!”
수면향에서 덜 깬 것일까, 약간은 흔들리는 음성.
미하일이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그녀의 목소리였다!
“…….”
그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평소처럼 밝은 미소를 띠었다.
“일어났어, 리제? 조금 더 자지?”
등을 돌리니, 작은 소녀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겨울바람에 백금발이 옅게 흔들렸다.
“……밀.”
“추울 텐데. 들어가 있어.”
“밀.”
엘리제는 그를 반복해 부르며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와 그의 거리가 좁혀졌다.
마지막이라 생각해서일까? 그녀가 다가올수록 미하일은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기 힘들었다.
결국, 그는 그녀를 처음으로 밀어냈다.
“다가오지 마.”
“…….”
“다가오지 말라고! 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러 가야 하니!”
하지만 엘리제는 멈추지 않았다.
“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가오지 말라고.”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왜…… 이렇게 울고 있어요…….”
“……!”
미하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투명한 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울지 마요, 밀.”
미하일은 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웃기지 마. 안 울어. 내가 무슨 눈물이야. 이건 바람이 불어서 그런 거라고.”
“…….”
“왜 그렇게 봐? 정말 아니야. 아니라고.”
지금까지 쌓여온 한이 터져 버린 것일까? 말과 다르게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요. 바람이 강하네요.”
“그렇지? 왜 이렇게 바람이 강해서.”
그런데 그 순간…….
미하일은 눈을 부릅떴다.
그녀가 발꿈치를 들더니 작은 팔로 자신을 감싸 안은 것이다.
“……리제?”
“그냥…… 바람이 세서…… 잠시만 이러고 있을게요.”
“…….”
미하일은 이를 악물었다. 눈물을 참으려 했으나 지금까지의 고통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을 감싸 안은 작은 몸 때문일까.
결국, 그는 참지 못했다.
그의 어깨가 말없이 들썩였다.
그녀는 가만히 그 등을 두드려 주었다.
‘밀…….’
엘리제는 아련한 눈으로 그런 그를 바라봤다.
왜 이렇게 아파야 할까? 린덴도, 미하일도.
둘 모두 자신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인데.
그녀는 나직이 말했다.
“밀, 이전에 약속했던 것 기억나요?”
“무슨?”
“저와 여행가기로 했던 거요.”
미하일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기억나지.”
이전 크림전쟁 때 차일드가의 후계자 알버트를 수술하며 했던 약속이다.
저 동방의 청과 려, 신대륙의 오대호까지. 같이 여행을 가자고.
절대 이룰 수 없는 꿈같은 약속.
“그 약속 안 지키실 거예요?”
미하일이 애써 웃었다.
“지키고 싶지. 하지만…… 어렵잖아. 무엇보다 형님이 내가 너와 단둘이 여행 가는 것을 지켜보겠어?”
여행이라니. 정말 간절히 가고 싶다.
그녀와도, 아니, 혼자라도. 모든 걸 내려놓고 바람같이 떠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엘리제가 의외의 말을 하였다.
“3명이 같이 가면 되잖아요.”
“응?”
“3명이 가족 여행 안 돼요?”
미하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그녀가 농담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웃었다.
“그러게. 3명이 가면 되겠네. 그런데 형님이 싫어하지 않을까? 너랑 단둘이 가고 싶어 할 텐데.”
분명 그 독점욕 많은 린덴은 싫어할 거다.
혼자 그녀를 독차지해야 하니까. 하긴 그 어떤 남자가 좋겠나.
“무엇보다…… 형님과 나는 절대 여행을 같이 갈 수 없어. 이유는 너도 알지?”
오늘 밤, 둘 중 한 명은 죽을 테니까.
미하일은 그 말을 삼켰다.
그런데 엘리제가 고개를 저으며 생각지도 않은 물음을 던졌다.
“같이 갈 방법이 있으면요?”
“응? 그게 무슨……?”
“혹시…… 밀과 린덴이 싸우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요?”
“……?!”
미하일은 놀라 엘리제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의 금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린덴과 똑 닮은 눈동자.
“밀, 한 가지만 먼저 물을게요. 황위를 진정으로 바라시나요?”
미하일은 고개를 젓고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답했다.
“알잖아. 난 그런 거에 관심 없어.”
“그러면 만약 린덴과 싸우지 않을 수 있다면, 황위를 포기하고 물러설 수 있나요?”
그 물음에 미하일은 입을 다물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야 왜 안 그러겠는가? 얼마든지 물러설 수 있었다.
하지만 물러나면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죽는다. 싸우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밀,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저를 믿나요?”
“당연히 믿지.”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아한 마음을 품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엘리제는 잠시 숨을 들이켠 후,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제게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어쩌면 둘의 싸움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물론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높지만요.”
“……?!”
미하일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했다.
“그게…… 뭐지?”
엘리제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듣는 미하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놀람으로.
“하지만…… 그건…….”
“네, 물론 알고 있어요.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죠. 오히려 역효과만 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어차피 지금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아질 수는 없잖아요.”
“너는? 그건 형님의 건드릴 수 없는 역린(逆鱗)이야. 네가 그 말을 하면 너에게 분노할 수도 있어.”
그 말에 엘리제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녀가 지금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분노하는 것이면 괜찮다. 하지만 실망하면? 그래서 날 싫어하게 되면? 그러면 난 어떻게 하지? 그 아픔을 견딜 수 있을까.
그래도 해야 한다. 그를 사랑하니까.
소중한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네, 알고 있어요. 그래도…… 린덴과 밀을 위해 해내고 싶어요.”
미하일은 잠시 입을 다물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가 사랑하는 작은 소녀는 그를 굳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에게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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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