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9 6-8 움직임 =========================================================================
8장 움직임 - 6.
“네, 위 앞부분과 십이지장, 담관, 담낭 다 잘라내면 돼요. 그러면 췌장 머리 쪽으로 접근할 수 있어요.”
“하, 하지만 그러면 잘라낸 장기들은 어떻게 합니까?”
췌장 머리의 병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장기들을 잘라내면 죽는다.
어떻게 하려고?
“문합 테크닉을 통해 끌어 올린 소장 옆에 췌장의 남은 부분을, 그 앞에 담관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를 연결하면 돼요.”
“…….”
카일은 입을 벌렸다.
무슨 뜻인지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다. 단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수술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게…… 가능합니까?”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능해요.”
그녀가 하려는 것은 바로 휘플 수술(Whipple operation)!
췌장 머리에 병이 있을 때, 표준적으로 시행하는 수술이다.
휘플 수술은 이식을 제외하고 외과 분야의 최고 난이도로 꼽힌다. 대학 병원의 능숙한 교수들도 보통 6~8시간 이상 걸리고, 10시간 이상 걸리는 케이스도 수두룩했다.
그만큼 고난도의 대수술이다.
“그, 그럴 수가…….”
카일 준남작은 그런 수술이 가능하단 것에 충격을 받은 듯 말을 잃었다. 그가 알고 있는 의학적 상식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달랐다.
“백작님, 혹시…….”
“가능하다면 후작님을…….”
귀족파의 인원들이 주저주저하며 말했다.
그들은 의학적 사항은 몰랐다. 그러나 그녀가 지금껏 수없이 많은 기적을 일으킨 등불을 든 여인이란 것은 알았다.
그러니 그녀라면! 그녀라면 그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또다시 기적을 일으킬지도 모르리라!
하지만 강하게 매달리지는 못했다.
작금의 상황이 걸렸던 것이다.
자신들은 황태자를 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황태자의 약혼녀다.
그런데 그때, 유리엔이 엘리제에게 말했다.
“……백작님.”
경칭.
단순히 친분 있는 사이가 아닌, 차일드가의 후계자로서의 말하는 것임을 뜻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차일드가의 차기 당주 유리엔 드 차일드가 엘리제 백작님께 부탁합니다. 저희 아버지를 치료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만약 저희 아버지를 살려주신다면, 차일드는 백작님의 은혜를 결단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차일드의 차기 당주로서의 약속.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거창한 부탁이 아니어도 어차피 그녀는 암셀 후작을 치료하러 이 병원에 왔다. 그가 살아나야 자신이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다만.
“아무리 저라도 위험할 가능성이 높아요. 실패할 수도 있어요. 아니, 수술이 성공적으로 되더라도 그저 일시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될 수도 있어요.”
그녀는 정확한 사실을 설명했다.
수술에 실패할 가능성도 높고, 성공하더라도 그저 죽음을 몇 개월 미루는 결과가 나올 확률도 높았다.
원래부터 몸의 상태가 안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최선을 다해줄 것이니, 믿고 있겠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말에 엘리제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바로 치료를 시작하겠어요. 패혈성 쇼크에 대해 제가 이야기한 처치들을 먼저 해주고, 수술 준비를 해주세요.”
카일 준남작이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수술 어시스트는? 저희 병원에서 혹시 원하는 의사가 있습니까?”
카일은 수석교수였지만 외과 수술에는 능숙하지 못했다.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로즈데일병원도 론도의 유수한 병원 중 하나였지만, 이번 수술은 워낙 대수술. 최고의 의사가 어시스트를 서야 했다.
“지금 바로 황실십자병원에 사람을 보내, 제가 말하는 분을 데려와 주세요.”
“누구입니까?”
그녀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의사의 이름을 꺼냈다.
“그레이엄 드 팰론. 그분을 불러주세요.”
***
그렇게 암셀의 수술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부름을 받은 그레이엄은 곧바로 로즈데일병원으로 달려왔다.
암셀의 상태를 확인한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췌장 머리 쪽 괴사이군요.”
“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존 췌장의 기능이 워낙 나쁜데, 치료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봐야죠.”
그 대답에 그레이엄은 자신이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느꼈다.
이런 중한 질환에 치료할 수 있느냐가 어디 있겠는가. 그저 의사는 최선을 다할 뿐이지.
“어떻게 접근하실 것입니까?”
“지난번 설명해 드린 휘플 수술을 할 거예요. 기억나시나요?”
그녀는 점점 병원의 일을 정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예 의술에서 손을 떼지는 않겠지만, 결혼 후 내명부의 일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서다.
그 일환 중 하나가 교수들에게 자신의 수술 노하우를 전파하는 거였다.
휘플 수술도 그런 과정 중 설명한 적이 있었다.
“네, 기억납니다. 그 고난도의 수술을 한다는 말입니까?”
그레이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기억났다.
듣기만 해도 고난도라 굉장히 인상적이었었다.
“네, 시간이 없으니 지금 바로 시작할게요.”
엘리제와 그레이엄은 수술대 위에 누운 암셀의 양옆에 섰다.
그녀는 메스를 들고 잠시 눈을 감았다.
‘반드시 살려야 해.’
암셀이 이대로 사망하면 비극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물론 그녀가 그를 살려낸다고 해도 비극을 무조건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누누이 생각했던 것처럼 결국 아무 의미 없을 확률이 훨씬 높았다.
하지만 계기를 마련해 볼 수는 있었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노력해 볼 수 있었다.
‘도와주소서.’
짧게 기도한 그녀는 메스를 움직였다.
“오픈합니다.”
메스가 움직이며 살이 갈라졌다. 피가 튀었다.
***
그때, 황궁의 사자궁.
늦은 시간임에도 황태자 린덴은 비서관 크리스가 전해준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준비는 잘되고 있나?”
“네, 예정된 날짜에 맞춰 총기사단이 움직일 것입니다. 개틀링 기관총의 성능 확인도 끝났습니다.”
개틀링!
지구에서는 1862년에 개발된, 역사상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기관총이다.
린덴은 그 기관총을 검기사단과 미하일을 상대할 수로 준비했다. 아무리 오러나이츠라도 분당 600발의 연사가 가능한 그 괴물 앞에서는 방법이 없으리라.
크리스가 답했다.
“귀족파는?”
“길버트 백작이 전해준 날짜에 맞춰 움직일 듯합니다. 아, 검기사단이 야간 훈련을 준비하다가 취소했습니다.”
“야간 훈련?”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돌발 변란의 징후는 아니었나?”
“그럴 가능성을 고려해 유심히 주시했으나, 특별한 이상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그렇군. 로열 가드와 수도 경비대, 총기사단에 전해 언제든 돌발 사태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해.
“네, 전하.”
그러고 황태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말없이 한참이나 서류를 바라보았다.
“……?”
크리스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황태자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기분도 무척 가라앉아 있었고 눈은 서류를 향해 있는데, 읽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떤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는 듯했다.
“전하? 혹시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잠시 쉬어야겠군. 크리스, 그대도 볼일 보도록.”
“알겠습니다.”
크리스가 나가자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랑하는 그녀가 자신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려서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그녀에게 화를 내어서일까?
모르겠다.
어쨌든 그녀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화내서 많이 놀랐을까?’
그녀에게는 항상 좋은 말만 하고 싶고 사랑만 속삭이고 싶은데 화를 내버렸다.
엘리제가 자신에게 사죄하고 궁을 나가던 것을 생각하자 기분이 더욱 엉클어졌다.
그녀는 잘 돌아갔을까. 내가 화내서 마음에 상처는 받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며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은 그의 가장 예민한 부분이었다. 그 누구도, 그녀라도 건들 수 없는.
‘혹시나……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린덴은 쓴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들의 한을 다른 식으로 풀 수 있다면 그래도…… 그들을 살려주실 수는 없는지요.’
그는 중얼거렸다.
“가능할 리가 없잖아.”
눈앞에서 핏물로 변한 어머니와 누이. 밤마다 나타나 고통스러워하는 그들의 한을 어떻게 풀겠는가? 오로지 복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일까?
자꾸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들어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
췌장 머리를 잘라내는 휘플 수술은 외과 분야에서 고난도로 꼽히는 수술이다. 췌장 머리 주위로 온갖 장기와 혈관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수술에 걸리는 시간도 장시간. 숙련돼도 일반적으로 6~8시간 이상 걸린다.
‘그래도 차분히 하면 어려울 것은 없어. 심장이나 혈관 수술처럼 한순간 한순간에 생명이 오가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암셀 후작은 그렇지 않아도 쇼크에 빠져 있다.
8시간이나 되는 수술을 버텨낼 상태가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해. 주변 장기를 잘라내는 것도 최소한으로. 몸에 부담이 안 가는 방향으로.’
그러며 그녀는 타임 리미트를 결정했다.
‘3시간. 그 안에 끝내도록 하자. 그 안에 끝내지 못하면 쇼크를 견디지 못하고 사망할 가능성이 높아.’
3시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일반적인 숙련자가 8시간이라면, 최고 수준의 췌장 외과의사들은 3~4시간 만에 수술을 끝내기도 한다.
다만 약해진 몸에 최대한 부담을 안 주면서 진행해야 한다. 빠르지만 섬세하게. 난도가 한층 더 높았다.
‘그래도 해내야 해. 무조건.’
굳은 각오로 암셀 후작의 배를 가른 그녀는 첫 번째 단계를 밟았다.
“간을 뒤로 젖혀 주세요.”
육중한 간이 물러나며 시야가 보이자 가위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간에서 뻗어 나오는 관을 싹둑 잘라내었다.
“……!”
그레이엄의 눈이 커졌다.
방금 엘리제가 자른 것은 간의 담즙이 흐르는 중요한 관이다. 잘못되면 생명을 잃는데. 저렇게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잘라 내다니.
하지만 그녀는 그걸로 멈추지 않았다.
곧바로 옆에 위치한 동맥을 짚더니.
“타이(Tie) 해서 묶어주세요.”
그레이엄이 실로 그 동맥을 묶자 역시 잘라버렸다.
정확하면서도 신속한 수술 진행.
“최대한 빨리 진행할 것입니다. 잘 따라와 주세요.”
“네, 백작님.”
그리고 움직이는 그녀의 손놀림.
엘리제의 손이 펼치는 광경을 본 그레이엄의 눈이 흔들렸다.
‘이건……!’
원래도 그녀는 수술 속도가 빠른 편이었는데, 이번은 현란할 정도였다.
잘라낸 담관과 동맥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더니, 췌장 머리를 후복막강에서 찌익 뜯어내 올렸다.
그리고 메스로 췌장의 붙어 있는 십이지장의 앞부분을 잘라냈다.
그러자 드러나는 췌장의 머리 부분!
‘거의 다 괴사했구나.’
엘리제는 신음을 삼켰다.
췌장 머리가 썩으며 진물이 차 있었다. 저기서 균이 자라 전신을 떠돌며 몸을 망가뜨렸던 것이다.
‘저 부분을 잘라내야 해. 하지만 썩지 않은 다른 췌장 부위도 만성 염증으로 많이 상해 있어서 최대한 조금만 잘라내야 해.’
그렇지 않아도 만성 염증으로 상해 있는 상태라 너무 많이 자르면 췌장 기능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조심히.’
그녀는 신중히 메스를 움직였다.
날카로운 칼이 움직이며 췌장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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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