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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70화 (170/194)

00170  6-9 실타래  =========================================================================

9장 실타래 - 1.

썩은 부위가 남지 않도록, 하지만 최대한 최소한으로. 또 주변 장기가 상하면 안 된다.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한 일.

“혈압은 어떤가요?”

수술 보조를 하던 카일 준남작이 말했다.

“수축기 70입니다.”

지속적인 쇼크 상태.

“시간은 얼마나 지났죠?”

“1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췌장 절제까지 한 시간.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였지만 쇼크에 빠진 암셀 후작이 얼마나 더 버텨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조금 더 속도를 내야 했다.

“계속 진행합니다.”

툭. 이윽고 췌장 머리가 몸에서 완전히 잘라 떨어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췌장 머리와 연결된 혈관에서 솟구치는 피들!

“선생님, 타이로 지혈 부탁합니다!”

“네, 백작님!”

순식간에 피가 흥건히 차올랐지만 지혈은 그레이엄에게 맡기며 그녀는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다음엔 십이지장 끝을 잘라낼 차례!

쩌억!

처음에 십이지장 앞부분을 자르고 이제 뒷부분마저 자르니 십이지장 전체가 잘려 나갔다.

그러자 십이지장에 연결되어 있던 췌장 머리도 같이 몸에서 떨어졌다.

“아…… 이렇게 췌장 머리 부분을.”

그레이엄은 감탄을 뱉었다.

췌장 머리 부분은 십이지장과 붙어 있기 때문에 접근이 어려웠다. 그런데 저렇게 십이지장과 한 번에 잘라내다니. 역시 엘리제기에 가능한 테크닉이었다.

“그러면 오염된 부분을 세척하겠습니다.”

썩은 부위는 잘라냈지만 여기저기 균이 남아 있을 것이다.

깨끗한 물로 꼼꼼히 복강 안을 씻어낸 후, 그녀는 이제 재건을 시작했다.

담관과 췌장, 십이지장을 한 번에 잘라 냈으니 그걸 모두 일정한 규칙에 따라 이어주어야 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오래 걸리는데.’

잘라낸 부위들을 실로 하나하나 이어주어야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렇게나 붙이면 안 됐다. 섬세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확실히 이어야 한다.

그녀는 초조히 물었다.

“혈압은 어떤가요?”

“60입니다!”

여전히 심각한 쇼크였다.

어쩌면 수술 중에 사망할 수도 있는 상태.

‘빨리. 최대한.’

엘리제는 급히 손을 움직였다.

먼저 소장을 끌어 올려 수술실로 소장의 벽과 췌장의 몸 쪽을 두 개의 층으로 이어나갔다.

특히 췌장 안의 효소가 나오는 길, 췌관을 소장 벽에 조심히 이었다.

그야말로 절정의 단단 문합술!

그리고 얇은 담관의 길을 소장 쪽으로 새로 내주었다.

둘 모두 한 치의 오차만 있어도, 몸 안으로 췌장액이나 담즙액이 새어나가며 치명적 합병증을 일으킬 수 있는 어려운 테크닉.

암셀 후작의 몸 상태를 봤을 때 그런 합병증이 일어나면 돌이킬 수 없었다.

그녀는 심혈을 기울이며 수술실을 움직였다. 최대한 서둘렀지만 워낙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이제 조금만 더!’

마지막은 소장과 위를 연결해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수술실을 움직였다. 역시 마찬가지로 위장의 내용물이 밖으로 새어 나가서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심혈을 다해서.

“…….”

한편, 귀족파의 귀족들은 수술장 밖에서 침을 꿀꺽 삼키며 그런 그녀의 수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귀족파에게는 암셀 후작이 필요했다. 이렇게 그가 사망하면 귀족파는 뿌리째 흔들릴 것이다.

‘제발. 등불을 든 여인이여. 기적을……!’

그들은 의학의 문외한이기에 수술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짐작할 수는 없었다.

다만 어마어마한 수술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옆에서 유리엔은 눈을 감았다.

‘아버지. 제발.’

정치적 사안도 사안이지만 자신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은 그녀는 간절히 수술이 잘 끝나길 기도했다.

그리고 이윽고 3시간여의 시간이 지나고. 엘리제가 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혈압은 어떤가요?”

“80입니다. 다행히 조금 올라갔습니다.”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클로즈하겠습니다.”

배를 닫겠다는 말에 귀족파의 인물들은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엘리제…… 수술은 혹시?”

유리엔이 수술장 문 사이를 통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엘리제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은 잘 끝났어요.”

“……!”

그 말에 유리엔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면?”

“네, 경과를 봐야겠지만…… 아마 회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 말과 동시에 사람들의 입에서 짧은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유리엔의 눈동자에도 눈물이 돌았다.

등불을 든 여인이 다시 한 번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

수술이 끝났다고 쇼크가 바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제는 암셀 후작의 바로 곁에 붙어서 집중 치료를 하였다. 수액을 적절히 투입하고 항생제를 쓰고 약물을 조절하고.

고된 수술을 끝냈지만 여러 치료를 하느라 엘리제는 전혀 쉬지 못했다. 원체 상태가 안 좋았기 때문에 쇼크를 회복시키는 것도 굉장히 어려웠다.

한편 귀족파의 인원들은 그렇게 고군분투하는 그녀를 보며 감사와 감동을 느꼈다.

‘성녀.’

그래, 그녀는 정말 성녀였다.

그녀를 성스럽다 하지 않으면 도대체 그 단어를 어디에 사용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엘리제의 노력 덕분일까?

암셀 후작은 다음 날 쇼크에서 회복되어 의식을 차릴 수 있었다.

“…….”

눈을 뜬 아버지를 보며 유리엔은 울컥 손으로 입을 가렸다.

“……유리엔?”

“네, 아버지. 흐윽.”

죽는 줄 알았던 아버지가 살아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반면 암셀 후작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분명 마지막 순간, 흐릿하게 의식이 꺼져가며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죽어 지옥에 온 건가?’

그는 자신이 죽어 갈 곳은 당연히 지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지옥이라니?

그 순간, 그는 지병인 폐병으로 쿨럭 기침을 했다가 배에서 격통을 느꼈다. 평소 느끼던 췌장의 통증과는 전혀 다른 찢어지는 고통.

놀라 배를 보니, 수술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그때, 염려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증이 많이 심할 겁니다. 당분간 거동에 조심하셔야 해요.”

“……!”

고개를 돌리니 여린 체구에 인형 같은 얼굴의 소녀가 보였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 제국 최고의 명의.

그녀의 얼굴을 본 암셀 후작은 상황을 깨달았다.

‘그녀가…… 날 살려준 건가? 하지만 어떻게?’

모두가 포기했던 자신의 병이었다.

아무리 등불을 든 여인이라도 방법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백작이 날 치료해 준 것인가?”

“네, 후작님.”

그 말에 암셀은 자신의 몸을 다시 살폈다. 수술 상처 통증은 있었지만 배 깊은 곳에서 뻗어 나오는 격통이 없어졌다. 펄펄 끓어오르던 고열도 호전된 것 같았다.

믿을 수 없는 일.

죽음에서 벗어난 것이다.

“……백작.”

암셀이 엘리제를 불렀다.

“네, 후작님.”

그러고 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엘리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후작님?”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독사라 불리는 암셀이. 서대륙 최고의 금권을 가진 그가 깊은 감사를 표한 것이다.

“감사하네. 정말…… 정말로.”

단순히 말뿐이 아니었다. 후작으로서의 위신도 생각하지 않고 크게 고개를 숙였다.

엘리제는 놀라 급히 그를 만류했다.

“아, 아닙니다, 후작님. 몸을 그렇게 움직이시면 상처에 좋지 않습니다.”

“고맙네. 정말로…… 어찌 나를…….”

진심으로 암셀은 마음속으로부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자신을 살려주다니.

단순히 어려운 병을 치료해 주어서가 아니다.

그가 저 소녀에게 감사와 감동을 느끼는 이유. 그건 자신이 ‘암셀’임에도 어려움을 무릅쓰고 치료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암셀, 그는 엄밀히 말해 소녀의 적이었다.

현 황제 민체스터의 눈엣가시였고, 황태자의 원수였다. 동시에 클로랜스가의 대적이었고, 지금은 황태자와 서로 목숨을 다투는 귀족파의 수장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엘리제의 진료를 받지 않았던 것은 그녀라도 방법이 없을 거로 생각한 면도 있지만, 이런 정치적인 사안 때문이 컸다.

물론 저 소녀야 그런 정치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지만, 그래도 자신만큼은 도저히 저 소녀의 진료를 받을 수 없었다.

“나 암셀은, 그리고 우리 차일드는 자네, 엘리제 백작의 은혜를 결단코 잊지 않겠네.”

“각하.”

그러며 암셀은 감사가 가득한 눈으로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저 소녀에게는 도움을 받은 적이 많았다.

여러 귀족파의 귀족을 치료해 준 것도 그렇고, 최근 메르키트 백작을 살려주었으며, 과거에는 그가 아끼던 수양아들 알버트의 목숨도 살려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제는 자신마저도 죽음에서 건져주었다.

단순히 감사하다는 말로는 갚을 수 없는 은혜들.

“그런데 날 어떻게 수술한 건가? 카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하던데.”

엘리제는 수술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감탄하던 암셀은 어느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버지?”

유리엔이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 그를 불렀다.

암셀은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유리엔, 잠시만 나가 있거라. 내 엘리제 백작과 잠시 따로 할 말이 있으니.”

“무슨 말씀을……?”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저 물어볼 게 있어서니.”

유리엔이 나가자 엘리제는 그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암셀은 우선 그녀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힘든 수술이었을 텐데,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그런데 저에게 따로 무슨 할 말이?”

“엘리제 백작. 사실은 물어볼 것이 있네. 솔직히 대답해 주길 바라네.”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암셀은 입을 열었다.

“나에게 남은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 것인가?”

“……!”

엘리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암셀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네. 지금 당장 급한 치료는 하였지만, 근본적인 병이 치료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이 수술로 원래 병은 더 악화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렇습니다, 각하.”

엘리제는 솔직히 답했다.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니었고, 숨길 상황도 아니었다.

“얼마나 남았다고 보면 되겠는가?”

엘리제는 그의 상태를 생각했다.

췌장의 기능이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곧 여러 내분비적인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췌장에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만성적인 폐병도 있었다.

‘후작님의 폐병은 아마 간질성 폐질환의 종류일 가능성이 높아. 현대 지구에서도 치료할 수 없는 병.’

그 폐병도 계속해서 진행 중이었다.

그러니…….

“정확히는 모릅니다. 길면 2~3년이지만 빠르면 몇 달 안에 다시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다시 안 좋아진다.

후작은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때는 사망한다는 뜻이었다.

‘빠르면 몇 달이라.’

슬플 정도로 짧은 기간.

그래도 후작은 감사했다.

오늘 죽을 뻔한 것이 몇 달이나 연장되지 않았는가? 그 시간이면 급한 일들을 정리하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그때쯤이면 정권 다툼도 마무리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살아 있으면 됐다.

“백작.”

“네, 각하.”

“이전부터 백작에게는 고마운 일이 참 많네. 우리…… 이런 사이가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이런 사이.

그 말이 엘리제는 왠지 쓰게 들렸다.

“어쨌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 혹시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가?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보게.”

“…….”

“백작도 알겠지만 최근 정국 상황상 나중에는 들어주지 못할 가능성이 높네. 그러니 혹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지금 바로 말해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도록 해보겠네.”

그 말에 엘리제는 암셀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그와 나눌 말이 있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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