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1 6-9 실타래 =========================================================================
9장 실타래 - 2.
“그러면…… 실례지만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든 말해보게.”
암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제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날, 혈탑에서 벌어졌던 비극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
암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치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황태자와 같은 반응, 아니, 그보다 더 거부감이 심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날의 일은 황태자뿐 아니라, 그에게도 뼈저린 역린이었으니까.
“그날의 일? 혈탑의 비극?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내가 잘못했다고?”
암셀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황태자가 시키던가? 죽기 전 죄라도 뉘우치라고?”
“그건 아닙니다.”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하아.”
암셀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짚었다.
그러고 잠시 말없이 감정을 다스리더니 말했다.
“미안하군. 내 생명을 구해주었지만 그 일만큼은 도저히 좋게 반응할 수가 없어.”
“…….”
“그래,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분명히 말하지만 그때의 일은 더 이야기할 거리가 없네. 그날의 일로 황태자와 난 원수가 되었고, 그걸로 끝난 거야.”
그러며 암셀은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황태자와 죽고 죽이는 관계가 되어 이런 상황까지 되었지만 그래도 난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네.”
엘리제는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암셀은 다시 말했다.
“그래, 이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난 그날의 일을 후회하지 않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당시에 내 동생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난 가여운 내 동생을 도저히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을 수가 없었어. 그러니 그날의 일에 대해선 더 할 이야기가 없네.”
그 말은 듣는 엘리제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그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아무런 이유 없는 악의로 당시의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미쳐 버린 1황비 마리엔, 암셀의 깊은 한.
혈탑의 비극은 일평생 민체스터의 냉대를 받아온 동생의 고통 때문에 저지른 일이었다. 동생의 고통이 아니었다면 암셀도 그런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래도…… 그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가 있다고 해서 잘못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엘리제는 씁쓸히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지.’
한두 마디 말을 듣는다고 해서 평생을 가져왔던 암셀의 생각이 갑자기 바꿀 리는 없다.
그녀도 그걸 알았다.
다만.
“……실례지만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무언가?”
“그때…… 황후 레베카 마마의 죽음을 바라셨습니까?”
“…….”
암셀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불편한 침묵이 방 안에 흘렀다.
“그게 중요한가? 황후의 죽음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어.”
그래, 의도한 비극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의도하지 않았을까?
남편의 냉대에, 그리고 황후를 향한 편애에 매일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동생을 보며 정말 황후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었나?
“그러면 황후 마마의 죽음을 정말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암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거 아나, 백작? 아무리 그대가 내 생명을 연장해 주었다 해도, 그건 너무 주제넘은 질문이야.”
“…….”
“후회하느냐고? 그럴 리가. 내 동생이 황제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는지 아나? 무려 20년이야! 20년! 고통받은 시간이! 결국엔 저렇게 미쳐 버리기까지 했지.”
암셀은 짓씹듯 말했다.
“차라리 마음을 받아주는 척이나 하지 말지! 황위에 오르기 위해 우리 차일드 가문을 이용하기 위해 약혼을 해놓고, 철저히 외면했어! 당연히 돌아가야 할 황후의 자리는 천한 평민에게 줘버리고, 선심 쓰듯 황비 직위만 던져놓고 돌아보지도 않았지. 내 동생이 유리궁에 유폐되듯 버려지고 나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상상이나 하나?”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은 옳았다.
분명 마리엔 황비에 대한 처신은 민체스터가 잘못한 면이 많았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폐하도 그걸 알고 있으시지.’
브리티아를 번영으로 이끈 명군 민체스터의 유일한 오점.
그건 바로 혈탑의 비극과 마리엔 황비였다.
만약 젊은 시절의 그가 제대로 처신했다면 혈탑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실을 일평생 후회하셨어. 죽을 때까지.’
이전 삶, 그는 아끼는 며늘아기인 그녀에게 속마음을 언뜻언뜻 내비쳤다.
자신이 젊은 시절의 일을 후회한다고.
‘조금 더 잘할 수는 없었을까? 그러면 그때의 일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늘 씁쓸히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었다. 그리고 그건 이번 삶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때의 일을 오로지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일평생을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잘 모르겠다.
그때의 비극은 정말 오로지 민체스터 혼자만의 잘못이었을까?
분명 일정 부분의 책임은 있겠지. 하지만 어찌 그게 다 그의 잘못이라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다고 암셀과 마리엔 황비가 이유 없이 잘못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그들도 원래부터 악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리엔 황비는 혈탑의 비극을 일으키기 전, 론도 시내에서 현숙하고 어질기로 명성이 높았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정말이었다.
그런 그녀가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죄악을 저질렀을까?
그 심정이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전 삶, 엘리제도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그녀도 린덴의 냉대를 못 견디고, 큰 잘못을 저질렀다.
그녀도 처음부터 악했던 것은 아니다. 못된 버릇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 정도였다.
하지만 끝없는 냉대가 그녀를 변하게 했고, 결국 그런 죄악까지 저지르게 만들었다.
그만큼 돌아오지 않는 사랑은, 그리고 질투는 사람을 비뚤어지고 일그러지게 한다.
그러니 당시 혈탑의 비극을 일으켰던 마리엔 황비의 마음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옳은 일은 아니지.’
그것이 그녀의 결론이었다.
그래, 어떤 괴로운 마음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든, 잘못은 잘못이었다.
자신이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전 삶의 잘못이 정당화되지 못하듯이. 이 일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백작이 하려는 말의 전부인가? 미안하군. 좋은 답을 들려주지 못해서.”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할 말이 더 있지? 분명히 말하지만, 난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아. 잘못 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알고 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암셀 후작의 생각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는 없다는 것을.
그래도.
“각하.”
“말하게.”
“……정말 죄송하지만 아까 전 저에게 말씀하셨던 것. 후작님께 드리는 부탁을 지금 해도 되겠습니까?”
암셀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날의 일을 회개하라거나 사과하라거나 그런 것이라면 듣지 못한 걸로 하겠네.”
“아닙니다.”
“그러면?”
“……미하일 전하의 아픔을 봐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
뜻밖의 말에 암셀은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제는 마지막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일평생 괴로워해 온 황태자 전하의 마음도 한 번만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저는 각하와 황비 마마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황태자 전하는 그날의 일로 일평생을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각하께 마리엔 황비 마마가 소중하시듯이 황후 마마와 황녀 전하도…… 황태자 전하의 소중한 어머니와 누이였습니다.”
그러며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지금 제 말이 주제넘은 것임을 압니다. 하지만 평생을 고통받아온 황태자 전하의 사랑하는 이로서, 그리고 미하일 전하의 소중한 친우로서 부탁합니다. 그날의 일로 고통받아온 두 사람의 고통을 한 번만 생각해 주시면 안 될까요?”
왜일까.
말을 하는데 눈물이 맺히려고 했다.
아마 린덴, 미하일. 평생을 괴로워해 온 그들의 아픔이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린덴은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으로 평생을 고통받아왔다. 지금 이 순간도, 그리고 앞으로도 고통받을 것이다.
그리고 미하일은?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나는 것이 꿈인 그는 그날의 비극의 굴레에 사로잡혀 고통받고 있다.
그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울컥했다.
“각하께서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제가 지금껏 귀족파에 정치적 이념과는 상관없는 도움을 드려 왔다는 것을. 물론 큰 도움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보상을 바라고 한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하지만…….”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도움들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기쁘셨다면 제 부탁을 한 번만 숙고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들은…… 황태자 전하와 미하일 전하는 그날의 비극으로 인해 평생을 괴로워하셨습니다.”
암셀은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는 한참이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되는지 모를 시간이 지나고.
그가 입을 열었다.
“……이만 가보게.”
엘리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더는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충분히 말할 만큼 말했다.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었다.
“편찮으신 몸에 죄송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쾌유하시길 주님께 기원합니다.”
엘리제는 병실을 나섰다.
그런데 그녀가 방문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백작.”
암셀이 그녀에게 말했다.
“네, 각하.”
“……오늘 날 치료해 준 것 고마웠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편히 쉬십시오.”
***
로즈데일병원을 나온 엘리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싸늘한 바람이 그녀 주위를 떠돌았다.
‘다른 방법을 써야 했을까?’
그녀는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처음에는 자신이 받은 황실 십자가로 귀족파의 죄를 감해달라고 린덴에게 빌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러라고 하사한 황실 십자가도 아니고, 그의 한 서린 원한은 어떻게 푼단 말인가?‘
그가 납득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래도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
그녀는 씁쓸히 생각했다.
알고 있다.
방금 자신이 한 행동.
그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자신의 말을 듣고 과연 암셀 후작이 죄를 뉘우칠까?
글쎄.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만약 암셀 후작이 뉘우친다면? 그래서 황태자에게 사과를 한다면?
그러면 황태자는 그 사과를 받아줄까?
그렇게 평화롭게 끝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그것도 역시나 회의적이었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니까.’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 현실은 동화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 그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일은 남들이 보면 비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이렇게 한다고 다가올 현실이 바뀔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알아. 나도 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일을 했던 이유.
기적이라도 일어나길 바라서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린덴이 행복하길 간절히 바라기에. 그리고 소중한 미하일이 죽길 바라지 않기에.
그래서 이런 무모한 일을 했다.
무력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런 것밖에 없으니까.
‘주여.’
엘리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자신에게 내린 황실 십자가를 움켜쥐었다.
‘도와주소서.’
그녀는 그렇게 기도했다.
============================ 작품 후기 ============================
오늘 쉬는 날인줄 몰라서...ㅠㅠ 연재 쉰다고 미리 출판사에 이야기를 못했네요. 꼭 평일 공휴일에 한번 쉬어보고 싶었는데...
어쨌든 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