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172화 (172/194)

00172  6-9 실타래  =========================================================================

9장 실타래 - 3.

살얼음 같은 정국 속, 하루가 더 지났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덕에 암셀의 몸 상태는 확연히 좋아졌다.

쇼크도 완전히 회복되었고, 수술 부위에 통증이 있긴 했지만, 병실 안을 걸어 다니는 거동도 가능했다.

하지만 몸이 좋아졌음에도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아버지, 통증이 많이 심하세요?”

걱정스러운 딸의 물음에 암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그의 얼굴이 어두운 이유.

그건 어제 엘리제가 남기고 간 말 때문이었다.

‘그들은…… 황태자 전하와 미하일 전하는 그날의 비극으로 인해 평생을 괴로워하셨습니다.’

암셀은 생각했다.

그날의 일을 저지른 것은 동생을 위해서였다.

그러니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맞는 건가? 정말로?

‘미하일 전하. 지펠 전하.’

마리엔의 아들들. 조카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그날의 비극 이후 웃음을 잃었다.

장미 정원에서 도원결의 놀이를 하며 우애를 맹세하던 형제들은 그날 이후 ‘적’이 되었고, 행복을 잃었다. 대신 아픔을 얻었다.

왜 그걸 지나쳤을까?

아니, 왜 모른 척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후작. 후작.’

뒤뚱뒤뚱 걷던 귀여운 아이.

당시 린덴은 참 순하고 착한 아이였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좋아하던 그 순한 아이는 그날 이후 표정을 잃었다. 오로지 가슴의 고통 속에 칼을 담았다.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으로 인해 많은 이가 불행해졌다. 고통받았다.

그러면 자신은 옳았던 건가?

“유리엔.”

그는 딸을 불렀다.

“네, 아버지.”

유리엔이 의아한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넌 그날의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난 세월 동안 아버지가 혈탑의 비극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낸 적은 처음이었다. 꺼내기는커녕 그녀가 언급하기만 해도 불쾌히 화냈었다.

“그건 갑자기 왜?”

“그냥 네 생각이 듣고 싶구나.”

유리엔은 머뭇거렸다.

하지만 대답을 피하진 않았다. 그녀는 이 문제에 대해 아버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숙모님, 마리엔 황비 마마가 괴로우셨을 것 같아요.”

“그러느냐?”

“네.”

자신이 황태자를 짝사랑하고 있기에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정말 괴로웠다.

그러나.

“그렇지만 그날의 일만큼은 아버지와 숙모님이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

암셀은 딸의 얼굴을 바라봤다.

유리엔은 아버지의 심기를 거슬렸을까 봐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눈을 피하진 않았다.

“……이유가 있다고 잘못이 정당화될 수는 없으니까요.”

“…….”

암셀은 입을 다물었다.

평생 하고 싶었던 말을 단도직입적으로 해버린 유리엔은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암셀은 평소처럼 화내진 않았다.

그저 그는 로즈데일병원 밖의 창밖을 바라봤다.

차일드 가문의 재력으로 만든 로즈데일병원은 워낙 고층의 건물이라 론도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암셀은 저 끝에 있는 황궁을 보았다.

그리고 그 황궁 깊숙이 있는 백원의 궁, 혈탑도 보았다.

모든 비극이 일어났던 곳.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참이나 말없이 있다 입을 열었다.

“유리엔.”

“아버지. 혹시 기분이 상하셨다면…….”

“아니다. 내 너에게 이를 말이 있는데, 잘 듣겠느냐?”

“네?”

유리엔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딸을 보는 암셀의 눈이 잔잔히 따뜻해졌다.

“아버지?”

“우리 차일드의 금언을 가슴에 새기고 있느냐?”

“아, 네.”

금언.

차일드의 당주가 될 자가 가슴에 새겨야 할 문장이었다.

“네, 당연히…… 그건 왜요?”

갑작스러운 말에 유리엔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다. 잠시만 이쪽으로 와보겠느냐?”

그녀는 오늘따라 이상한 아버지의 태도에 머뭇거리며 다가갔다.

병상 침실에 딸이 다가오자, 암셀이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하였다.

딸을 어깨를 잠시 살짝 껴안은 것이다.

“아, 아버지? 왜 갑자기?”

유리엔은 당황했다.

암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냥. 한 가지 생각이 나서 말이다.”

“무슨 생각이요?”

하지만 암셀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하였다.

“지금 바로 외출 준비를 해주겠느냐?”

“아버지?”

유리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바로 어제 수술을 받았다. 물론 침실에 누워 있기만 할 필요는 없지만 외출이라니. 말도 안 됐다.

하지만 암셀은 다시 말했다.

“오늘 꼭 가야 할 곳이 있단다. 반드시 가야 하니, 준비해 주도록 하거라.”

***

차일드 가문의 마차가 암셀을 태우고 론도 시내를 달렸다.

“괜찮으십니까, 각하? 너무 무리하시는 것은 아닌지.”

그를 모시기 위해 따라온 중년의 기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차 밖의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던 암셀은 문득 입을 열었다.

“스탠 경.”

“네, 각하.”

“자네가 우리 가문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됐지? 오래된 것 같은데.”

중년의 기사, 스탠은 옅게 웃으며 답했다.

“35년째입니다.”

“그런가. 정말 오래되었군.”

“네, 화기의 발달로 기사단이 해체돼 갈 곳 없는 종자였던 저를 소 공자였던 후작님께서 받아주셨지요. 그때 정말 감사했습니다.”

암셀이 물었다.

“자네는 자네의 삶을 후회하지는 않나? 평생을 우리 차일드를 위해, 나를 위해 살았는데.”

스탠이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이십니까, 각하. 각하를 모실 수 있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저에게 후작님은 은인이나 다름없는 분이니까요.”

스탠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물론 그도 자신의 주군이 밖에서 어떻게 불리는지는 알고 있었다.

독사. 돈놀이꾼. 혈탑의 비극을 일으킨 이.

명망 높은 엘 후작과 반대로 악명만 높은 주군.

그래도 암셀은 주변 사람들을 아꼈다. 특히 스탠, 그에게는 은인이나 다름없는 분이었다.

“그런가?”

“네.”

그 말에 암셀은 웃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암셀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네. 갑자기 궁금해서.”

이후 암셀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그러고 스쳐 지나가는 론도의 풍경을 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

평소와 다른 주군의 모습에 스탠은 고개를 갸웃했다.

따각따각.

그렇게 한참을 달린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브리티아 제국의 황궁이었다.

“황궁에 도착했습니다. 유리궁으로 가겠습니까?”

스탠이 물었다.

그는 암셀의 용건이 당연히 1황비 마리엔이 머무는 유리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암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유리궁에 가려는 것이 아니네.”

“그러면?”

“백원의 궁으로 가지.”

“……!”

스탠은 깜짝 놀라 주군을 바라봤다.

“백원의 궁…… 말씀이십니까?”

평소 혈탑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싫어하는 주군이었다.

그런데 그곳을 직접 가겠다고?

암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곳에는…… 어째서?”

그 물음에 암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그도 모르겠다.

그냥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안내해 주게.”

백원의 궁은 죄를 지은 황족이 유폐되는 장소였다. 따라서 수많은 사연이 맺혀 있는 곳.

정권 다툼에 밀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이도 있었고, 정말 죄를 저질러 갇힌 이도 있었다.

황후 레베카도 이곳에 갇혔다. 그리고 그녀의 딸과 같이 목숨을 버렸다.

“…….”

암셀은 잠시 말없이 건물의 외벽을 바라보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냥 평범한 석재 건물이었다. 건물 위로 높은 탑이 솟아 있었다.

혈탑이란 별명처럼 피 칠이 되어 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감옥처럼 삼엄해 보이지도 않았다.

“이곳인가.”

암셀은 중얼거렸다.

외벽을 보던 그는 시선을 돌렸다. 백원의 궁 주위에는 가시덩굴이 있었는데,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아무런 나무도, 꽃도, 가시덩굴도 없이 휑한 땅.

바로 혈탑의 꼭대기에서 몸을 던진 황후 레베카와 황녀 이블린이 떨어진 장소였다.

하늘이 억울하게 죽은 그들의 피를 슬퍼한 것일까?

저 땅에는 그날 이후, 어떤 식물도 자라지 않게 되었다.

‘마리엔 황비 마마가 소중하시듯이 황후 마마와 황녀 전하도 황태자 전하의 소중한 어머니와 누이였습니다.’

작은 소녀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가.”

암셀은 중얼거렸다.

그런 것 따위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오로지 주변만 돌아봤다. 자신의 것을 챙기는 것도 벅차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자신의 것을 챙기는 것도 그에게는 벅찼다.

그래서 자신만, 주위만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암셀은 고개를 저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지.”

백원의 궁은 비어 있었다.

죄를 지은 황족이 유폐되는 곳이니까.

애초에 로마노프 황실은 손이 귀해 황족이 많지 않았다.

이 넓은 황궁에 머무는 이들도 몇 안 되는데, 백원의 궁에 사람이 머무는 경우는 드물었다.

로열 가드가 잠깐 제지했으나, 제국 최고의 권세가 차일드 후작인 것을 알고 떨떠름하게 비켜주었다.

암셀은 말없이 백원의 궁 내부를 살폈다.

마찬가지로 평범했다.

약간은 낡은 방에 기본적인 가구들이 있을 뿐이었다.

“백원의 궁에 황족이 유폐되면 방 안에만 있게 되는 건가?”

“네, 각하. 원칙적으로 방 밖으로 나오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런가.”

로열 가드의 답에 암셀은 방 안을 다시 살폈다.

“이곳이 황후 마마가 머물렀던 곳인가?”

“……네.”

로열 가드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저 암셀 후작은 황후 레베카를 죽게 한 자다. 그런 그가 황후에 대해 물어보니 좋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곳과 비슷한 구조의 방. 낡은 침대와 테이블이 있었다.

안쪽에 작은 창문이 트여 있었다.

“6개월인가?”

“네?”

“황후 마마가 머물렀던 기간이.”

“…….”

암셀은 방구석에 난 창문을 바라보았다.

문득 떠오른 한 가지 의문.

황후는 6개월이나 이 방에 갇혀 있으면서 저 작은 창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전에는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의문이다.

‘폐하! 거짓입니다! 아닙니다! 제발 믿어주시옵소서!’

당시 그녀가 울부짖던 것이 생각났다.

암셀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란 것을. 왜냐면 그녀의 죄는 모두 그가 꾸며낸 음모였으니까.

저 창을 보며 희망을 품었을까? 황제가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는?

하지만 그 희망은 자신의 손으로 모두 끊어버렸다.

결국, 황후는 6개월 동안 말라 비틀어갔다. 그래서 죽었다.

‘이유가 있다고 잘못이 정당화될 수는 없으니까요.’

딸이 자신에게 했던 말.

“하아.”

암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를 부축하던 스탠 경이 놀라 물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네.”

암셀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로열 가드에게 물었다.

“건물 위 탑은 지금 개방 중인가?”

“……네.”

스탠 경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탑을 올라가시려고요? 안 됩니다. 지금도 무리하고 있는데.”

대수술을 받은 지 이틀도 안 됐다.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는 것도 터무니없이 무리하고 있는 것인데 종탑이라니?

“괜찮네. 등불을 든 여인이 워낙 단단하게 수술해 놔서 끄떡없는 것 같군.”

“하, 하지만 절대 안 됩니다.”

하지만 암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한번 올라가 보고 싶어.”

스탠이 강하게 만류했으나,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암셀은 평소에 부리지 않았던 고집을 부렸다.

더군다나.

“나 혼자 올라갔다 오겠네. 자네는 여기에 있게.”

“각하?!”

지금도 부축을 받아서 걷고 있는 암셀이다. 그런데 탑의 계단을 혼자 걸어 올라가겠다고?

‘오늘따라 도대체 왜 이러시지?’

스탠은 흔들리는 눈으로 암셀을 바라봤다.

주군이 이상했다. 단지 이상한 것을 떠나서 어쩐지 위태위태해 보였다.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