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3 6-9 실타래 =========================================================================
9장 실타래 - 4.
하지만 결국 스탠은 주인의 고집을 이기지 못했다.
암셀은 홀로 탑을 올라갔다.
“하아, 하아.”
탑은 가파른 나선형 계단이었다.
원래 폐병이 있던 그인지라,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갈 때마다 숨 쉬기가 괴로웠다. 수술받은 부위에서도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암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옮기고, 쉬고, 다시 한 걸음 옮기고.
그렇게 탑을 올라갔다.
그리고 이윽고.
끼익!
낡은 철문이 열리며 탑의 꼭대기 층이 나타났다.
건물에 솟아 있는 탑.
백원의 궁이 혈탑이란 별명을 갖게 한 황후 레베카가 몸을 던진 곳.
“…….”
암셀은 입을 다물었다.
건물 위, 워낙 높이 솟아 있는 탑이라 황궁은 물론 론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는 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높군.”
내려다보기 힘들 정도로 아찔할 정도의 높이였다.
이곳에서 황후는 딸과 함께 몸을 던졌다.
“난…… 잘못하지 않았어.”
그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그 의문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날의 일로 고통받아온 두 사람의 고통을 한 번만 생각해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등불을 든 여인.
모두에게, 심지어 적인 자신에게도 한결같은 선의로 대하던 소녀의 말.
자신이 살아온 또 하나의 이유, 유리엔.
그녀의 질책도 생각났다.
‘이유가 있다고 잘못이 정당화될 수는 없으니까요.’
‘난. 이 암셀은 무엇을 위해 살아온 걸까?’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일드 가문은 오로지 돈을 숭상한다.
프러시엔 공국에서 시작한 그들의 계파는 자신들만의 금융 제국을 세웠고, 프랑소엔과 브리티아 제국이 대륙 전체의 운명을 건 해전을 벌일 때 주가 정보 조작을 해 대륙의 금줄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오로지 돈만을 바라는 가문. 그런 가문의 당주인 그는 일평생 돈을 위해 살았다.
하지만 정말 돈이 가장 중요했나?
아니다.
그의 삶의 이유는 가족이었다.
마리엔과 유리엔.
불쌍한 동생과 하나밖에 없는 딸.
그들을 위해 살았다.
하지만 제대로 산 것일까?
‘잘못 살지 않았다. 잘못하지도 않았어.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야.’
암셀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유리궁에 버려져 날마다 울던 동생.
그 동생을 보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으니까.
하지만…… 정말?
정말 잘못하지 않은 걸까?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암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은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몇 달…… 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는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근거는 없었다. 그저 직감적인 느낌이었다.
자신의 삶이 길게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탓일까?
속마음이 물었다.
정말 잘못하지 않았나?
암셀의 얼굴에 깃든 씁쓸함이 더욱 짙어졌다.
정말…… 후회하지 않는가?
암셀은 그 깊은 물음에 애써 대답하지 않았다.
그 물음에 답하는 순간, 지금까지의 삶이 부정될 것 같았기에.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아.”
그는 괴로운 숨을 토했다.
‘남은 시간,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이제 귀족파와 황제파는 파국만이 남았다. 이제 서로가 서로의 목을 벨 것이다.
그리고 그건 결국 자신이 뿌린 씨앗 때문이었다.
만약 그날의 비극이 아니었다면, 황태자 린덴은 귀족파를 이렇게 적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귀족파도 황태자에게 칼을 겨누지 않았겠지.
새로운 황제를 맞아 황제파와 귀족파는 각각 신흥 상인 계층과 기존 대지주 계층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각자의 역할을 하며 시대를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돌이키기엔 늦었다.
이미 파국을 앞두고 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 그들 앞에는 피의 길밖에 남지 않았다.
“유리엔.”
그는 딸의 이름을 불렀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목숨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 싸움에 지면 딸은 죽을 것이다. 정변을 꾸민 가문의 후계자를 살려둘 리가 없으니까.
만약 그렇게 되면 자신의 잘못 때문에 딸이 죽게 되는 것이다.
“하아.”
그런데 그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들렸다.
“이곳에 암셀, 네놈이 웬일이지?”
낮은. 그러나 서늘한 분노가 담긴 목소리.
“……!”
암셀은 고개를 돌렸다.
“전하.”
깊은 분노가 담긴 차가운 금안.
나타난 이는 바로 황태자 린덴이었다.
***
린덴은 비틀린 목소리를 뱉었다.
“어찌 네놈이 감히 이곳에 올 생각을 했지?”
“…….”
“이곳은 네놈 따위가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분노로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저 추악한 놈이 발을 디딘단 말인가.
이 백원의 궁은 그의 아픔이 담긴 성역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추악한 놈이 이곳에 오다니.
저놈이 발을 디뎠다는 것만으로도 오물로 더럽혀지는 기분이었다.
“감히 이곳에 오다니. 설마 어머니와 누이를 모욕하러 온 건가?”
맹렬한 적의에 암셀은 쓴웃음을 지었다.
등불을 든 여인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황태자 전하는 그날의 일로 일평생을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과거 황태자의 모습도 떠올랐다.
‘후작. 후작.’
순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던 아이.
그 아이가 지금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으로 원한을 갚으려 하고 있었다.
“그런 뜻으로 온 것은 아닙니다.”
“하! 그러면? 사죄라도 하려고 온 건가?”
“…….”
“왜? 죽을 날이 머지않으니, 자신이 죽인 자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궁금하기라도 했나 보지?”
린덴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 보니 몸은 많이 나아졌나 보군. 그거 하나는 다행이야. 네놈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걱정했었는데. 죗값을 치르지도 않고 편안하게 죽으면 어떻게 하나 말이야.”
암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잘됐어. 기다리고 있어라. 네놈의 목은 반드시 내 손으로 직접 쳐줄 테니. 단두대도 필요 없어.”
그러며 황태자는 등을 돌렸다.
저 추악한 놈과 한마디의 대화도 더 나누고 싶지 않았다.
“경고하니 당장 이곳에서 꺼져. 지금이라도 네놈의 목을 날려 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으니.”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황태자 전하.”
암셀이 그의 등에 나직이 입을 열었다.
린덴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암셀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
하지만 암셀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그를 바라볼 뿐.
한참이나 지속되는 침묵에 린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하자는 거지?
암셀의 눈빛은 기이했다. 그를 바라보고 있지만, 어딘가 머나먼 곳을 더듬는 듯한 눈동자.
린덴이 다시 인상을 찌푸리려는 순간이었다.
도저히 생각지도 못한 말이 그의 귀에 들렸다.
“……죄송했습니다.”
린덴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뭐?
“……죄송했습니다.”
“……!”
린덴은 눈을 부릅떴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했다. 도저히 저 추악한 놈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잘못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암셀을 바라봤다.
린덴의 얼굴에 담긴 감정은 놀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극한 차가움.
그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린덴이 다시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고 물었다.”
“…….”
“……죽고 싶나, 후작?”
린덴은 암셀에게 다가가더니 왈칵 멱살을 잡았다.
“……죄송하다고?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그래, 죽기 전 나와 어머니, 누이를 한 번에 능멸하려고 이곳에 왔나 보군.”
암셀은 눈을 감았다.
멱살을 움켜쥔 린덴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도저히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뭐라고? 죄송하다고?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인제 와서?
“아니면 그냥 죽고 싶은 것인가? 이 자리에서 내 손에 죽고 싶어서 날 조롱하는 것이지?”
암셀은 말했다.
“조롱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 그러면? 설마 진심이라고 말하는 것이냐?! 이 가증스러운!”
린덴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멱살을 쥔 손을 팽개쳤다.
암셀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그런 그를 보며, 린덴은 품 안에서 권총을 꺼내었다.
찰칵!
총알을 장전하고는 그대로 암셀 후작의 미간에 겨누었다.
“그 가증스러운 입에 다시 한 번 물으마. 진심이라고?”
“…….”
“대답해!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쏘겠다.”
총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
반면 암셀은 미간에 총이 겨눠진 상황임에도 차분히 그를 바라봤다.
“진심입니다.”
“이……! 끝까지……!”
린덴은 이를 악물었다. 계속되는 능멸에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못 참으려는 찰나!
황태자와 암셀의 눈이 마주쳤다.
“……!”
린덴은 흠칫 놀랐다.
암셀의 눈이 공허했던 것이다.
평소의 날카로운 빛이 아니었다.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 순간 린덴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금 암셀은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하지만 린덴은 인정할 수 없었다.
저 추악한 놈이 죄를 뉘우쳤다고? 있을 수 없는, 아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가증스러운……!’
린덴은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권총이 불을 뿜었고, 총알이 암셀의 머리칼을 스쳐 벽에 박혔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총구를 틀어 목숨을 뺏는 것을 자제한 것이다. 완벽한 복수를 위해서는 저놈을 지금 이렇게 죽여선 안 된다.
린덴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 네놈은 미안해할 자격도 없어. 그리고 편하게 죽을 자격도 없다. 가증스러운 말은 닥치고 기다리고 있어라. 네놈이 이렇게 죽으려고 나서지 않아도 너와 마리엔, 그리고 귀족파의 운명은 이미 다 결정되어 있으니까.”
등을 돌려 탑의 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기 전,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죄송했다고? 진심이라고? 내가 평생 들었던 말 중, 가장 웃기고 기분 나쁜 말이군.”
그때, 암셀이 나직이 말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받아들여 주시겠습니까?”
“어떻게?”
린덴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죽어.”
“……!”
그는 손가락으로 탑 너머를 가리켰다.
“지금 바로 이곳에서 뛰어내려. 어머니와 누이가 죽었던 것처럼. 똑같이. 그러면 네 사죄를 받아주지.”
린덴은 분노를 못 이겨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 실소를 터트렸다. 저 추악한 암셀이 자신의 말을 따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하면 저와 마리엔을 용서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린덴은 입을 다물고 암셀을 바라봤다.
암셀의 눈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둘 사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린덴은 낮게 말했다.
“네놈이 할 수 있다면. 그러면 용서해 주지.”
그리고 그는 대답을 듣지 않고 탑의 계단을 내려왔다.
***
‘빌어먹을. 제길.’
계단을 내려가며 린덴은 욕설을 내뱉었다.
‘뭐라고? 인제 와서?’
그는 암셀의 사과가 진실로 진심일 것이라고는 터럭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가증스러운 능멸이 분명했다.
‘제길.’
하지만 탑을 불쾌히 내려가던 그는 걸음을 우뚝 멈추어 섰다.
방금 본 암셀의 눈빛.
무언가 비어 보이던 그 눈동자는 거짓을 말하는 이의 것이 아니었다.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그놈이 진심일 리가 없잖아.’
린덴은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술이 찢어지며 피가 흘렀다.
‘빌어먹을. 진심이면? 진심이면 어쩔 건데?’
어머니와 누이가 그놈 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그러면 용서해 주어야 하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가슴이 요동쳤다.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제기랄!”
결국, 그는 주먹으로 탑의 벽을 후려쳤다. 손등에 피가 흘러내렸지만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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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