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과의사 엘리제-174화 (174/194)

00174  6-9 실타래  =========================================================================

9장 실타래 - 5.

‘어머니, 누이.’

백원의 궁 밖으로 나와 그들이 떨어졌던 장소를 찾았다.

그들을 떠올리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당신들의 한을 갚아주겠습니다. 악몽에서 벗어나게 해주겠습니다. 이제…… 정말, 정말 멀지 않았습니다.’

그래, 오늘의 일은 분명 자신의 마음을 흔들려는 수작이다.

이 능멸은 곧 갚아줄 것이다.

그렇게 린덴은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저 궁 옆으로,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울렸다.

쿠웅!

“……!”

린덴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무언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들리는 육중한 소리였다.

갑자기 뭐지? 뭐가 떨어진 거지?

‘설마……?’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암셀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지금 바로 이곳에서 뛰어내려. 어머니와 누이가 죽었던 것처럼. 똑같이. 그러면 네 사죄를 받아주지.’

아닐 거다.

저 독사 암셀이 그런 일을 저지를 리가 없다.

그런데 왜일까? 이유 없이 팔이 파르르 떨렸다.

“…….”

린덴은 소리가 났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뭐라고 말하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장소에 도착한 린덴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암셀이었다.

그가 정말로 탑에서 몸을 던졌다.

이미 생명이 빠져나간 그의 얼굴은 기이하게 평안해 보였다.

***

린덴은 멍한 얼굴로 사자궁에 돌아왔다.

차일드 후작의 자살로 론도 전체가 난리가 났지만 정신을 추릴 수가 없었다.

‘그가 죽었다고? 정말로?’

린덴은 중얼거렸다.

“왜?”

왜 자살했단 말인가? 도대체 왜?

‘……죄송했습니다. 진심으로.’

그게 정말 진심이었다고?

그래서 자살했다고?

“웃기지 마.”

그는 짓눌린 신음을 뱉었다.

“웃기지 말라고!”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어머니와 누이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이제는 이런 식으로 자살해?

‘웃기지 마. 그래도 용서할 수 없어.’

그의 손이 계속해서 떨렸다.

감정이 요동쳐 조절되지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요동치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비서관 크리스를 불렀다.

“전하? 차일드 후작이……!”

크리스는 다급히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알 수 없는 혼란으로 요동치는 린덴의 눈동자를 본 것이다.

“전하?”

“크리스, 지금 당장 로열 가드와 총기사단을 움직여라.”

크리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로열 가드와 총기사단을?

린덴은 짓씹듯 명했다.

“론도 내에 있는 모든 귀족파의 귀족들을 다 잡아들여.”

“전하?”

“정변까지 기다리지 않겠다. 기다릴 필요도 없지. 이미 그들이 길버트 백작과 연계해 역모를 꾸민다는 증거를 다 가지고 있는데.”

명을 받은 크리스는 머뭇거렸다.

물론 린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들은 귀족파의 인원들이 역모를 꾸미려는 증거를 다 확보한 상태다. 그러니 그 증거만으로도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굳이 정변을 일으키기 기다린 것은 조금 더 확실히 적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성을 잃으셨어.’

그래, 지금 황태자 린덴은 정상이 아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전하, 잠시 진정하시고 결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당장 수도 내에서 병력을 움직이기에는 미하일 전하와 검기사단이 걸립니다.”

“아, 미하일. 검기사단.”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내 손으로 해결하겠다. 그리고 그 전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벽에 걸린 검을 꺼내 들었다.

“마리엔 1황비. 그 죄인의 목을 먼저 베겠다.”

크리스가 만류했으나 린덴은 듣지 않았다.

무작정 유리궁으로 향했다.

‘빌어먹을.’

그의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얽혀들었다.

‘……죄송했습니다.’

“닥쳐!”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죄를 저질러 놓고, 이제 와서 사죄라고? 그런다고 자신이 받아들여줄 것 같은가?

‘절대 용서하지 않아. 절대로.’

그는 이를 바득 갈았다.

그런데 그 순간 하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론.’

론. 린덴의 아명.

그 이름을 부르던 이는 그의 어머니였다.

흑발의 아름다운 그녀는 늘 차분한 사랑이 담긴 목소리로 아들을 불렀었다.

‘론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어렸던 그는 이렇게 답했었다.

‘음악가가 되고 싶어요.’

‘음악가?’

‘네, 지난번 음악을 들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악기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 말에 레베카는 쿡쿡 웃었었다.

린덴, 아니, 어린 론은 조심히 물었다.

‘나 황제 안 되고 싶은데. 음악가하면 안 될까요?’

레베카는 부드럽게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된단다. 난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과거의 일을 떠올린 린덴은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란 말이 그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이게 바로 제 행복입니다. 저들의 피로 원한을 갚지 않는 한 저에게 평안은 없습니다.

어머니가 바라던 그의 행복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다. 바로 그들 때문에!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오늘, 모든 것을 끝내겠습니다.’

그런데 왜일까?

검을 차고 유리궁으로 향하는데 그들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어머니와 누이.

그들은 왜인지 아릿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린덴은 알 수 없이 가슴이 울컥했다. 도대체 모르겠다.

그들이 왜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지.

왜 유리궁에 도착할수록 표정이 슬퍼지는지.

‘제기랄. 제기랄!’

그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때, 떠오르는 한마디.

‘만약 그분들의 한을 다른 식으로 풀 수 있다면…… 그러면 저들을 살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 엘리제가 했던 말.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린덴은 버럭 소리쳤다.

이윽고 유리궁에 도착한 그는 저지하는 시종을 거칠게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리엔!”

쓸쓸한 궁 안에 그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어디지? 어디에 있느냐?’

시뻘게진 눈으로 안을 둘러보았다.

그가 이 유리궁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리엔이 광증에 빠진 후 한 번도 보러 온 적이 없었으니까.

널따란 유리궁 안에는 쓰러진 시종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일일이 문을 열며, 방 안을 확인했다. 바로 목을 베기 위해 한 손에는 검을 움켜쥔 채.

그리고 마지막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와장창!

방 안에서 무언가 요란히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들리는 비명 소리.

린덴은 그 소리에 흠칫 멈칫했다가 곧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이곳인가 보군.’

분명 마리엔이 광증에 빠져 내는 소리일 것이다.

‘네년도 이제 끝이다.’

그는 벌컥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마리엔.”

단죄를 위해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이었다.

린덴의 눈이 흔들렸다.

“끄, 끄…… 폐…… 하…….”

마리엔 황비는 방구석에 쪼그려 벌벌 떨고 있었다.

자해한 것인지 흉터투성이인 팔에, 드레스 곳곳이 피에 젖어 있었는데, 그가 들어온 것은 눈치도 못 챈 것 같았다.

젊은 시절 아름답게 빛나던 금발은 푸석푸석하게 변해 있었다.

“…….”

린덴은 입술을 깨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 코앞까지 다가왔건만 여전히 마리엔은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오로지 광증에 빠져 벌벌 떨 뿐이었다.

그는 검을 들어 올렸다. 은색의 날이 서늘하게 빛났다.

이제 이것을 내려치기만 하면 마리엔의 목은 떨어질 것이다. 드디어 어머니와 누이의 복수를 하게 되는 것이다.

“…….”

그런데 왜일까?

평생을 바라고 바라온 복수인데, 이상하게 손이 내려가지 않았다. 검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순간 떠오르는 암셀의 말.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 미하일의 얼굴도 떠올랐다.

오로지 어머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자신과 적대하는 동생.

“……웃기지 마.”

린덴은 비틀린 목소리를 흘렸다.

그때, 마리엔 황비가 광증에 빠져 다시 소리를 내었다.

“끄…… 폐하…… 밀러…… 밀러…….”

밀러. 젊은 시절, 그녀가 민체스터를 부르던 이름이었다.

“……!”

그 말을 들은 린덴의 눈이 다시 요동쳤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닥쳐!”

이를 악물고, 검을 더욱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내리 그었다. 바로 마리엔의 목을 향해 일직선으로.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전하!”

익숙한 목소리!

그가 사랑하는 엘리제였다!

다급히 나타난 그녀가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검을 멈추지 않았다. 더욱 힘을 주어 내리그었다.

그리고……!

파악!

검날이 마리엔 황비의 목…… 바로 옆에 박혔다.

목숨을 뺏기 직전 마지막 순간, 방향을 튼 것이다.

“……전하.”

상황을 들은 것일까. 엘리제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린덴은 돌아보지 않았다.

오로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원수, 마리엔 황비를 노려볼 뿐이었다.

“끄…… 으…… 폐…… 하…….”

목숨을 잃은 뻔한 상황이었건만, 마리엔은 여전히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자신의 목 옆에 박힌 검날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린덴도.

“하, 하…….”

린덴은 웃음을 흘렸다.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이게 뭐냐고! 제기랄!”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슴이 터져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다시 떠오르는 어머니의 목소리.

린덴은 이를 악물고 등을 돌려, 방을 빠져나왔다. 검도, 마리엔 황비도 버려둔 채. 자신이 사랑하는 엘리제도 놔두고.

‘빌어먹을. 제길.’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다.

속으로 끝없이 욕설을 내뱉으며 거칠게 끝없이 걸었다. 가만히 있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걸으니 익숙한 장소가 나타났다.

백원의 궁.

레베카와 이블린이 떨어졌던 비극의 장소.

“하…….”

그곳에 도착한 린덴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 하…….”

왜일까?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끝없이 떨어졌다.

‘어머니…… 누이…….’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모르겠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냥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제길…….’

린덴은 눈물을 멈추고자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평생의 괴로움이 터진 것일까. 도저히 멈춰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저벅.

그의 등 뒤로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곧…… 따뜻한 느낌이 등에 닿았다.

엘리제였다. 그녀가 그를 등 뒤에서 안은 것이다.

“린덴…….”

“…….”

린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희미한 떨림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아픈 떨림이었다.

“……나.”

“네, 린덴.”

“……절대 그들을 용서하지 않아.”

린덴은 강하게 되뇌었다.

“절대로. 절대로…….”

그 말에 엘리제는 울컥 눈물이 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린덴. 그래도 괜찮으니…….”

“…….”

엘리제는 눈물 흘리며 말했다.

“아프지 마세요……. 제발…….”

다른 건 모르겠다.

그가 아프니 그녀도 아팠다.

그녀는 양팔로 그의 가슴을 감싸 안았다. 그저 그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둘은 한참이나 눈물을 흘렸다.

***

린덴이 감정에 못 이겨 내렸던 명령은 일단 크리스의 필사적인 만류로 저지되었다.

만약 그의 만류가 아니었다면 론도 한복판에서 검기사단과 총기사단의 유혈 충돌이 벌어질 뻔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어둠이 깊어졌지만 린덴은 잠을 이루지 않았다.

“…….”

그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아.”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들을 용서할 수 없어. 절대로.”

그래,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슴에 답답함이 치밀었다.

암셀이 탑에서 떨어진 장면이 생각났다.

마리엔이 부들부들 떨던 모습이 생각났다.

왜?! 도대체! 끝까지 악하게 있을 것이지, 마지막 순간 자신의 마음을 흔들리게 한단 말인가?!

‘제길. 빌어먹을.’

그는 죄 없이 불행히 죽은 그들을 떠올렸다.

‘어머니. 누이.’

하지만 왜일까. 이전과 다르게 그들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생각나는 말.

‘난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어머니가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했던 다른 말도 생각났다.

‘사랑한다, 내 아들.’

왜일까. 그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빌어먹을.”

눈을 질끈 감았다. 뜨거운 눈물이 뺨 밑으로 떨어졌다.

문득 미하일이 떠올랐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날의 비극의 굴레에 벗어나지 못하고 일평생을 괴로워한 동생.

엘리제,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도 떠올랐다.

이런저런 생각이 뒤죽박죽 얽혔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건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아…….”

그는 다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깊은 새벽.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깜빡 옅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어머니와 누이가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린덴은 눈을 떴다.

전일 격랑에 휩싸였던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 그는 평소의 냉철함을 되찾았다.

그는 란돌에게 명했다.

“비서관 크리스를 불러라.”

“네, 전하.”

곧 크리스가 도착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그래.”

“어떤 일로……?”

“오늘 만찬회를 열겠다.”

“네?”

크리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정국에 갑자기 만찬회라니?

“장소는 황궁 글로리아 홀에서, 시간은 정확히 정오에. 그리고 참석 인원은 귀족파 인원 전원.”

“……!”

크리스의 눈이 커졌다.

귀족파의 인원들을 초청해 만찬회를 열겠다고? 그게 무슨?

“그리고 글로리아 홀에는 다음 서류를 준비하여라.”

그러며 린덴이 건네 준 서류를 본 크리스는 다시 한 번 놀랐다.

귀족파의 인원들이 역모를 꾸몄다는 증거를 담은 서류였던 것이다!

“오늘 만찬회에서 저들 귀족파에 대한 처우를 결정하겠다.”

<주말은 쉽니다!!>

============================ 작품 후기 ============================

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