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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엘리제-175화 (175/194)

00175  6-10 용서  =========================================================================

10장 용서 - 1.

린덴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3황자 미하일에게도 만찬회 전에 사자궁으로 오라 전하도록. 황제의 직권을 대리하여 내리는 황명이니 거절은 용납지 않겠다고 전해라.”

***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째각째각 울리는 시계 소리를 들으며 린덴은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런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

비서관 크리스는 그런 황태자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귀족파 전원을 동원한 만찬회라니. 그리고 3황자 전하와 단독 면담까지.’

황태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어제처럼 감정에 못 이겨 내린 명령은 아니란 것이다.

지금 황태자의 분위기는 냉철한 평소와 똑같았다. 아니, 오히려 더 차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때, 린덴이 가만히 물었다.

“크리스.”

크리스는 공손히 답했다.

“네, 전하.”

“엘리제는 지금 어디에 있지? 병원에 있나?”

크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답했다.

“……암셀 후작의 장례식에 갔습니다.”

황태자는 그 말에 잠시 침묵했다.

“……많이 슬퍼하던가?”

크리스는 씁쓸히 답했다.

“네.”

“……그렇군.”

린덴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암셀의 죽음은 엘리제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화합으로 이어지는 계기를 만들려 했지만 그게 그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린덴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눈을 감았다.

둘 사이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다시 시간이 흘렀고.

시계가 만찬회가 시작하기 한 시간 전을 가리켰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전하, 란돌입니다. 3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그의 동생, 미하일이 도착했다.

***

외숙부인 암셀의 죽음 때문일까? 미하일의 얼굴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린덴은 눈을 뜨며 말했다.

“어서 와라.”

“……갑자기 무슨 일이야?”

미하일은 경계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갑작스러운 면담이라니?

또 곧 이어지는 만찬회는 무엇이란 말인가?

린덴이 동생에게 말했다.

“일단 앉지. 란돌, 차를 가져와라. 어떤 종류를 좋아하지? 그나마 백차(白茶)를 좋아했던가? 청의 백차로 가져와라.”

“네, 전하.”

얼마 지나지 않아 란돌이 차를 내왔다.

따뜻한 향이 방 안에 퍼졌다.

린덴은 차를 입가로 가져가며 크리스와 란돌에게 말했다.

“너희는 이만 나가봐라. 미하일과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

“……전하.”

크리스는 황태자의 안위를 걱정했다.

궁지에 몰려 역모를 꾸미고 있는 3황자다. 단둘이 있는 틈을 타 검을 휘두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하지만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나가봐라.”

“하지만…….”

“명이다. 나가 있어.”

어쩔 수 없이 둘이 나가자 린덴은 동생에게도 말했다.

“너도 앉아.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거냐?”

“…….”

미하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린덴을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그때 문득 드는 생각.

‘혹시 리제가 하려던 일이?’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모른다.

어차피 더 악화할 상황도 없고, 다름 아닌 그녀가 시도하려는 일이기에 시간을 주었지만, 애초에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던 일 아니었나.

그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고 물었다.

“무슨 생각이야? 우리가 지금 이렇게 차나 마실 사이는 아니잖아.”

“그렇지.”

린덴은 동의했다.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있으면서 한가롭게 차라니.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말했다.

“그러면 바로 용건을 이야기하지.”

“…….”

미하일은 굳은 얼굴로 린덴의 말을 기다렸다.

린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하일.”

“듣고 있어.”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난 마리엔 황비를 용서할 수 없다. 절대로.”

“……!”

미하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네가 계속 마리엔 황비를 감싼다면 난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알고 있어. 그 이야기를 하러 부른 거야?”

미하일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는 이야기다. 애초에 둘이 싸우고 있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린덴은 마리엔을 용서할 수 없다. 미하일도 어머니를 포기할 수 없다.

그게 바로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린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고작 그 이야기를 하러 부른 것은 아니지.”

“그러면?”

린덴은 동생의 눈을 바라봤다. 자신과 닮은, 하지만 더 부드러운 눈매의 금색 눈동자.

“난 억울하게 죽은 레베카의 아들로서, 그리고 이블린의 동생으로서 마리엔 황비를 단죄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단죄의 내용을 지금 너에게 말하마.”

“……!”

“마리엔 황비를 데리고 이 브리티아 섬을 떠나라. 영원히. 살아 있는 한 다시는 브리티아 섬을 밟지 마라. 마리엔 황비가 같은 땅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토악질이 나올 것 같으니. 이게 바로 내가 내리는 단죄다.”

그 말을 들은 미하일은 눈을 부릅떴다.

잠깐? 이건?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

린덴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선택해.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때는 단두대로 다스리겠다. 마리엔 황비뿐 아니라 너까지 모두.”

서릿발 같은 명령.

하지만 미하일은 흔들리는 눈으로 린덴을, 자신의 형을 바라봤다.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형님? 정말로?”

영원히 브리티아 섬에 돌아오지 못하는 혹독한 추방령. 하지만 린덴이 원래 원하던 목숨을 뺏는 것에 비하면 사실 용서나 다름없었다.

미하일은 이 생각지도 못한 용서에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정말로? 오로지 복수를 위해 일평생을 살아온 그가 아닌가? 정말 이런 용서를?

“……어째서?”

그 물음에 린덴은 눈을 감았다.

왜냐고?

그도 모르겠다.

사실 지금도 마음속에서는 마리엔 황비의 목을 치고 싶은 마음이 들끓어 올랐다. 살려두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사랑한다, 내 아들.’

어제부터 자꾸만 떠오르는 그 말을 생각한 순간 다시 가슴이 울컥했다.

린덴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모르겠다. 그냥…… 그냥…….

그는 다시 요동치려는 가슴을 참으며 말했다.

“선택해라. 받아들이지 않으면 피로 죗값을 갚도록 하겠다.”

***

그리고 그 시각, 황궁의 글로리아 홀.

대연회를 하는 장소인 그곳에는 만찬회 준비가 마련되어 있었고, 수없이 많은 귀족이 불안한 눈으로 앉아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귀족파의 인원들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우리를 한 번에 초대하다니.”

그들 중 이 자리에 오고 싶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대부분 인원이 빠지지 않고 참석한 이유는 단 하나.

초청장에 쓰여 있던 단 하나의 문구 때문이다.

-참석하지 않는 자, 피로 그 값을 물리라!

그 문구 때문에 꺼림칙하면서도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암셀 후작이 살아 있었다면 강단 있게 초청을 거부했을지도 모르지만, 암셀이 죽은 지금은 구심점이 될 자가 사라졌다.

한 귀족이 두려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함정은 아니겠죠? 우리를 한꺼번에 제거하려는.”

다른 이가 고개를 저었다.

“설마…… 아니겠죠. 이렇게 공개적으로 만찬회를 초청해서 그런 일을 할 리가…….”

귀족들은 설마 그들을 죽이기 위한 함정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

비밀리에 초대한 것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공개적으로 만찬회를 초청해서 근거도 없이 살육을 일으킬 수는 없을 테니까.

모두 그런 생각으로 초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이 끊임없이 들었다. 함정이면 어떻게 하지?

지금 이 자리에는 귀족파 인원이 대부분 모여 있었다. 황태자가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기로 각오하고 독한 마음을 먹은 것이면, 그들은 모두 끝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마음속으로 떨고 있을 때,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만찬회 시작 시각인 정오가 다가온 것이다.

“황태자 전하께서 먼저 식사를 즐기고 있으라 하셨습니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요리가 만찬회 테이블에 차곡차곡 쌓였다.

하지만 앞에 놓인 음식에 손을 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황실에서 솜씨를 부린 요리들이니 모두 최고의 진미들이었지만, 식사를 즐기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도대체……?’

모두 황태자가 등장하기만 초조히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시종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 납십니다!”

홀의 문이 열리며 황태자가 만찬회 장으로 들어왔다.

“전하를 뵙습니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린덴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암셀의 죽음으로 이제 귀족파 서열 1위가 된 메르키트 백작이 대표로 나서 말했다.

“이렇게 만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그런데…… 혹시 저희에게 어떤 하명할 말씀이 있으신지…….”

“…….”

린덴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무감정한 눈동자.

메르키트는 그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무감정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선명한 증오가 느껴졌다.

‘좋지 않구나.’

메르키트는 불안감을 느꼈다.

저 황태자는 항상 자신들을 저렇게 바라봤다. 그에게 귀족파란 암셀 후작과 마리엔 황비의 음모에 동조해 황후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틀린 생각은 아니지.’

그는 속으로 한탄했다.

혈탑의 비극은 암셀과 마리엔의 주도하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들 귀족파가 동조했다. 귀족파의 인원들은 끝없이 황후를 비방했고 황후의 직위를 폐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그 상소들은 황후의 영혼을 말라 비틀게 했고, 죽음으로 이끌었다.

그러니 자신들은 저 황태자의 원수였다.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모두 모인 건가?”

“네, 전하.”

메르키트는 답하였다.

“내가 너희를 부른 이유가 궁금하겠지. 우리가 사실 이렇게 마주앉아 사이좋게 밥을 먹을 관계는 아닌데 말이야. 그렇지?”

그 말에 장내가 침묵에 잠겼다.

황태자는 차가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너희를 만찬회에 초대한 이유가 있다. 크리스, 준비한 것을 내오도록.”

“네, 전하.”

비서관 크리스가 손짓하자 곧 시종들이 그릇들을 내왔다. 그릇은 원형의 철제 덮개로 덮여 있어, 안의 내용물이 보이지가 않았다.

“……?”

귀족파의 인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뭐하려는 것이지? 웬 음식을?

“너희 손으로 열어보아라.”

그들은 의아한 얼굴로 철제 덮개를 치웠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음식이 아니라, 한 뭉치의 종이가 나왔던 것이다.

“이게…… 무슨……?”

그리고 나온 것은 음식이 아니었다. 한 뭉치의 종이였는데, 그 내용을 읽어본 사람들은 경악에 휩싸였다.

“이, 이건…… 이…… 이럴 수가…….”

단순히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공포였다. 그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서류에 쓰여 있는 내용은 다름 아닌, 그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던 증거였다!

애초에 길버트 백작의 회유가 음모였으니, 증거를 모조리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모와 관련된 증거뿐이 아니었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저지른 죄가 있다면 모조리 서류에 적혀 있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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