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6 6-10 용서 =========================================================================
10장 용서 - 2.
“저, 전하…… 이것은……!”
“조, 조작입니다! 이건…… 아닙니다!”
귀족파의 인원들은 공황에 빠져 소리를 질렀다.
정변을 일으키기도 전에 증거를 들켰다. 그리고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단두대에 목을 들이밀고 있는 상황이란 것을 깨달았다.
저 황태자가 손짓 한 번만 하면, 자신들은 모두 한 줌의 핏물로 변할 것이다. 자신들뿐 아니라, 가문도 멸문이었다.
그리고 악몽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촤악!
만찬회 장 벽 쪽에 서 있던 시종들이 커튼을 일제히 치웠다.
그리고 드러나는 섬뜩한 무기들.
수많은 총신으로 이루어진, 분당 600발의 연사가 가능한 기관총, 개틀링이었다. 무려 5대. 황태자가 손짓만 하면 만찬회 장 안에 있는 이들은 모두 목숨을 잃을 것이다.
“……!”
“저, 전하! 살려주십시오!”
모두가 허겁지겁 목숨을 구걸했다.
린덴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입 다물어라. 지금부터 한마디라도 더 하면 당장 목숨을 거두겠다.”
“……!”
장내에 죽을 듯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귀족파의 귀족들은 죽음의 공포에 벌벌 떨며 황태자를 바라봤다.
린덴은 얼음 같은 눈으로 그들을 주시하다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시종들이 무언가를 홀의 밖에서 가져왔다.
귀족파의 인원들의 눈이 커졌다.
시종들이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불이 펄펄 끓어오르는 화로였던 것이다.
‘왜 화로를?’
설마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태워 죽이려고 화로를 가져온 것인가?
그들은 공포에 질려 생각했다.
그때, 린덴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상원위원장 메르키트.”
“…….”
“그리고 서부의 윌리엄, 중부의 에릭, 웰링턴, 매피슨.”
그는 가만히 몇몇 이름을 거론했다.
“내가 왜 너희의 이름을 따로 부른 지는 잘 알고 있겠지.”
호명당한 이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모두 백작급 이상의 대귀족으로, 귀족파의 중핵이었다. 동시에 혈탑의 비극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었다.
아마 따로 중한 벌을 내리려고 언급한 것이리라.
“솔직히 말하지. 난 너희를 모두 죽이고 싶다. 단순히 이름을 부른 이들뿐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전부다! 모조리 목을 베어 어머니의 영정 앞에 바치고 싶어.”
그 말에 모두가 벌벌 몸을 떨었다.
이제 그의 신호 한 번이면 저 무자비한 총의 포화에 자신들은 형체도 남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이미 눈을 질끈 감고 생을 포기한 사람도 있었다.
린덴은 한참이나 말없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숨이 막힐 듯한 적막이 홀 안에 가득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었다.
린덴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탄식과도 같은 한숨.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그 한숨에 귀족파의 인원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황태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너희를 모두 죽여 버리는 것보단, 그래도 살려두는 것이 제국에는 조금 더 낫겠지. 이런 너희라도 나름의 역할이 있는 자들이니까.”
“……?”
“그러니! 단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린덴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잊고 나에게, 이 공제에게 충성을 바쳐라. 목숨과 영혼을 걸고, 영원히. 그러면 공제의 이름으로 맹세하니, 너희의 죄악은 이 화로에 던져 잊겠다.”
“……!”
귀족파의 귀족들은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이게 무슨……?
“저, 전하……?”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저 황태자가 자신들을 용서해 주다니?
“물론 이름을 따로 거명한 자들은 안 돼. 간단히 용서하기엔 죄가 크니. 이름을 거명한 자들은 재산을 몰수하고 작위를 박탈해 평민으로 강등시키겠다.”
그 말에 귀족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저 정도면 굉장히 자비로운 처사였다.
이름이 거명되었던 자들은 귀족파의 중핵임과 더불어 혈탑의 비극 때 황후가 목숨을 끊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저들만큼은 단두대에 보낼 것으로 생각했다.
린덴은 제왕의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거절해도 좋다. 원하지 않는 것을 강요하진 않겠다. 하지만 거절하면 나도 국법으로 너희의 죄를 엄단할 수밖에 없다.”
역모에 대한 국법.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가문의 멸문이었다.
‘도대체 어째서?’
귀족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물론 황태자의 제안은 그들로서는 천국에서 내려온 밧줄과도 같았다.
하지만 왜 그가 이런 자비를?
물론 이렇게 자신들을 거두면, 정치적으로 이득이 있긴 했다.
황제파뿐 아니라, 자신들 귀족파까지 휘하로 거두면 모든 귀족 세력을 망라하는 강력한 황권을 얻게 되는 것이니까.
일찍이 유례가 없던 절대 황권의 탄생이었다. 그것도 한 줌의 피도 흘리지 않고.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 절대 황권은 자신들을 모조리 죽여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들을 한꺼번에 죽이면 제국에 혼란이 일기야 하겠지만, 오로지 복수에 눈이 먼 황태자가 그런 걸 신경 쓸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황태자는 그 이유를 따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저 지엄한 목소리로 명했다.
“지금 당장 선택해라. 충성을 맹세하면, 이 화로에 역모에 대한 증거를 던지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국법대로 처리하겠다.”
그 말에 귀족파의 인원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망설이는 눈빛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사실상 정권 다툼은 끝난 것이다. 그들의 패배였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죽음이냐, 아니면 새로운 황제의 시대를 맞아 충성을 바칠 것이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한 명, 두 명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그 자리의 모두가 무릎을 꿇고 황태자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길고 길었던 정쟁이 끝을 맺는 소리였다.
그렇게 론도의 비극은 막을 내렸다.
***
미하일도 황태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미 기운 싸움이었고, 그가 황위 다툼을 벌였던 이유 자체가 어머니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그는 황위 따위에는 큰 관심 없었다.
미하일은 준비되는 대로 곧바로 마리엔과 함께 브리티아 섬을 떠나기로 했다.
귀족파는 글로리아 홀에서 맹세했던 대로 황태자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했다.
단, 메르키트를 비롯해 혈탑의 비극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한 중핵들은 재산이 몰수당하고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굴욕적인 처벌이었지만 가문의 몰살을 피한 것만으로도 그들은 감사했다.
그렇게 황태자는 정쟁에서 완전히 승리했고, 황제파를 비롯해 귀족파까지. 제국의 모든 정치 세력을 한 손에 쥐어진 절대 황권의 주인이 되었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연 그날.
황태자는 혈탑에 올랐다.
“…….”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오롯한 제국의 주인이 되었지만, 그의 얼굴에 기쁨의 빛은 없었다.
그저 가라앉은 눈빛으로 어머니가 죽은 곳에서 론도의 전경을 바라볼 뿐.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지만, 린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날이 깊어가며, 황혼이 지고 있을 때, 그의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전하.”
익숙한 목소리.
그가 사랑하는 그녀였다.
“왔는가.”
린덴은 고개를 돌려, 엘리제를 바라봤다.
담담하지만 아픔이 흐르는 눈동자에 엘리제는 가슴이 울컥했다.
“……전하. 린덴.”
그는 씁쓸히 웃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탑 위라서 바람이 차다. 나는 괜찮으니 내려가 보도록.”
“…….”
하지만 엘리제는 내려가지 않았다.
저렇게 온몸으로 아파하는데, 어떻게 두고 내려가겠는가.
그녀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히…… 조심히 그를 뒤에서 껴안았다.
“……!”
등에 와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린덴은 흠칫 놀랐다가 눈을 감았다.
왜일까? 괜찮았는데,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따뜻함을 느끼니 다시 가슴이 흔들렸다.
“……괜찮으신가요?”
린덴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다, 라고 답하려다 고개를 저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괜찮지 않은 것 같다. 아팠다.
“괜찮지…… 않은 것 같군.”
“……린덴.”
“사실 잘 모르겠다.”
린덴은 저 멀리 펼쳐진 론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아파 보여, 엘리제는 더욱 힘을 주어 그를 껴안았다.
“난 어머니와 누이의 원한을 갚길 원했어.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그들을 죽음으로 몰았던 마리엔 황비와 귀족파의 놈들의 목을 치고 싶어.”
“…….”
“하지만……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군. 잘…… 모르겠어.”
그래, 잘 모르겠다.
자신이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인지.
다만 계속해서 떠오르는 말.
‘사랑한다, 내 아들.’
린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왜 계속 저 말이 떠오르는지. 왜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그냥…… 계속 가슴이 울컥했다.
그때, 그의 등을 감싸 안고 있던 엘리제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전 그 두 분이 복수를 바랐는지, 아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다만?”
“이건…… 제 생각이지만…… 그분들은…… 린덴의 지금 선택을 싫어하진 않았을 것 같아요.”
“……어째서지?”
린덴이 물었다.
엘리제는 답했다.
“왜냐면…… 그분들은…… 복수보다도 린덴이 행복하길 바랐을 테니까요.”
“……!”
그 말에 린덴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가?”
“네.”
엘리제는 조심히 말을 이었다.
“저도……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간절히요. 왜냐면…… 사랑하니까요.”
그 말에 린덴은 그녀의 품 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의아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엘리제를…… 그대로 껴안았다. 자신의 품 안으로. 강하게. 으스러지게.
린덴은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난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린덴은 가만히 물었다.
“리제.”
“네, 린덴.”
“나도…… 이런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 물음에 엘리제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봤다.
“네, 행복해질 수 있어요.”
“그럴까?”
“네, 왜냐면…… 제가 옆에 있을 거니까요.”
“……!”
그 말에 린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엘리제는 손을 들어 그를 마주 안았다. 그리고 말했다.
“제가 옆에 있을게요. 계속…… 계속…… 영원히…….”
“…….”
“사랑해요, 린덴.”
린덴은 말없이 그녀를 더욱 깊게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를 느끼며 말했다.
“정말 내 곁에 계속 있을 건가?”
“네, 계속요.”
“정말로?”
“네.”
“나중에는 귀찮을지도 몰라. 내가 떨어지지 않아서. 난…… 네가 없으면 안 되니까.”
엘리제는 미소를 지었다.
“저도…… 당신이 없으면 안 돼요, 린덴.”
그렇게 둘은 서로를 마주 봤다.
많은 아픔. 눈물과 상처의 길을 지난 후의 마주 봄이었다.
엘리제는 가만히 속으로 기도했다.
‘우리의 앞날에 축복과 행복이 가득하길.’
그런 그들을 축복하듯, 황혼이 내려앉았다.
황혼을 맞아 론도가 붉게 물들었다.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자신들의 앞날도 저렇듯 아름답길.
그렇게 엘리제는 속으로 기도했다.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